Ⅰ. 서론
문화정책이 구현하고자 하는 문화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가? 개인들이 제각각 경험하는 문화현상들 중에서 사회가 공동으로 추구할 가치를 확인하고, 정책으로 채택하는 합리적인 논의절차는 어떠해야 하는가? 문화정책연구에는 가치를 소통하는 인문학적 접근과 함께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논증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 문화의 내재적 가치를 주장하는 인문학적 접근법은 반론의 영역 바깥에 있는 고대 철학자들의 주장과 지난 수 십년 동안 사상계를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로부터 이론적 지지를 받아왔다. 이런 주장들은 서로 공약불가능한 수준으로 다양하면서도 일방적인 측면이 있다. Sayer(2003)는 사회과학에서 문화를 중시하기 시작한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 이후, 문화를 다루는 방법론이 오히려 신자유주의 가치관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꼬집었다. 문화가 가장 정의하기 힘든 단어 중 하나라는 것처럼, 문화의 가치도 합리적 토론이 어려운 ‘공약불가능성’을 넘어 ‘불가지론’ 수준으로 인식된다.
과학적 논증으로 소통되기 힘든 문화의 가치는 정치가들에 의해 대중의 감성을 움직이는 정책슬로건으로 잘 다듬어져 ‘주장’된다. 반면 슬로건 달성을 위해 공적자원을 투입할 때는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실증적인 증거기반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이 요구된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숫자는 그 자체로도 소통과 설득의 효율성과 효과성이 높지만, 좀 더 확고한 신뢰를 줄 수 있도록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통해 생산되어야 한다. 근대 자연과학의 득세 이후, 그 기저에 깔린 인식론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문화와 같은 인간현상 연구에도 실증주의의가 거의 유일한 과학적 연구방법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공공정책 분야에서도 신공공관리론의 득세 이후 실증주의 접근법은 정책의 실행과 그것을 지원할 연구의 기저를 이룬다. 하지만 이렇게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숫자로 보고되고 소통되는 문화정책의 성과와 문화의 본질적 가치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불만은 문화행정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문화정책의 소통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연구방법론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정광렬(2009)은 다양한 정책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 또는 설득을 위해서는 문화 고유의 가치와 특수성만이 아닌, 현상을 기반으로 설득 가능한 언어가 필요한데 반해, 문화정책 연구에 적합한 이론과 방법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문화정책연구가 동어반복적으로 문화정책의 필요성과 가치를 논하고 있으며, 과학적인 문화정책의 정립을 위한 개념화와 전제, 방법론, 체계 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부가 이미 결정한 정책의 집행을 위한 후속 수단이나 정당화를 위한 연구가 많은 점”, “이론과 방법론의 검증을 위한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이론 연구가 미흡한 점” 등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다(정광렬, 2009).
반면,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 연구방법을 인간사회 연구에 대입할 수 있느냐, 그러한 연구 방법론이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해 왔다. 사회학을 사회물리학이라고 부른 콩트부터, 실증주의자들은 자연과학 연구의 엄밀한 객관성을 적용해 사회과학의 과학적 입지를 확립하고자 했다. 반면, 베버, 딜타이를 위시한 반실증주의자들은 사회현상과 인간의 행위는 자연현상과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자연과학 연구방법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입장에서 해석주의 인간과학을 주장해 왔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 차이는 거칠게 분류하면,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라는 연구방법론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희은(2011)의 주장처럼, 사회과학에서 실증주의 연구, 특히 양적방법론을 유일한 과학적 방법론으로 치부하는 경향은 과학과 인간사회의 변화를 고려할 때 이제 재고될 필요가 있다. 가장 정확한 실증적 분석은 인공지능(AI)에게 맡겨 놓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합의된 가치에 근거하여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소통 역량이 인간에게 남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문화정책의 소통가능성 제고와 연구방법론의 다양화를 위해 비판적 실재론을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시론적 연구이다. 문화정책연구에서 실증주의가 강해지는 경향을 정책의 소통가능성 제고 관점에서 살펴본다. 공공기관 주도 문화정책연구 사례를 중심으로, 실증주의 연구의 기저를 이루는 인식론의 한계로 인해 문화행정의 현장에서 봉착하게 되는 문제점들을 파악해 보고, 그 한계점들을 보완할 방안을 비판적 실재론을 통해 제시해 본다. 이를 위해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문헌연구를 통해 보다 과학적이며 소통가능한 문화정책연구로 전환을 고려할 때 활용 가능한 이론자원들을 소개한다.
Ⅱ. 문화정책연구에서 실증주의 경향과 봉착한 문제점
학술연구에서 실증주의 접근법은 경험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가는 과학적 노력의 일환이다. 실증주의에 기반한 연구는 재현 가능한 실험과 개인적 가치 해석을 배제한 과학적 논증을 통해 다른 연구자와의 소통가능성을 높여준다. 마찬가지로 문화정책연구에서의 실증주의 경향이 강해지는 현상도 공공정책의 소통가능성 제고 노력 관점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실증주의 문화정책연구가 논쟁적인 가치를 소거하여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소통에 수월한 방법론적 장점을 가진 점과, 공공성 확보 차원에서 문화정책의 소통 요구가 갈수록 커지는 환경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아울러 정책주체가 고려해야 하는 소통의 대상도 시민 주권자뿐만 아니라, 정책의 정당성을 지지해 줄 전문가, 공공자원 분배를 위해 설득해야 할 다른 영역의 행정가, 국제사회에서의 경쟁자 또는 파트너까지로 확대되고 있는 점도 문화정책의 소통 가능성 제고 필요 요인으로 파악된다.
공공부문의 주도성이 큰 우리나라 문화정책 연구의 주요 경향을 개괄할 수 있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연구목록을 살펴보면, 제목에서 ~분석, ~지표/동향 분석, ~지표/기준/지수 개발연구, ~평가 등은 계량적 주제에 관한 연구이고, ~방안/방향/과제연구, ~사례연구, ~기초연구, ~제도개선 등은 비계량적 주제에 관한 연구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연구들의 방법론을 살펴보면 하나의 연구 안에서도 설문조사나 데이터 분석뿐만 아니라, 문헌 및 사례조사, 전문가 자문과 델파이 분석, 이해관계자 면담(FGI) 등 질적방법론과 양적방법론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완전히 질적방법론만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계량적 데이터 제시나 유사한 사례 또는 진술의 확보 여부에 따라 연구에 근거한 정책 제안의 타당성이 다르게 인식되는 경향을 무시할 수 없다. 방법론보다 그 기저에 깔린 인식론 차원에서 실증주의가 중시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정책 연구의 객관성이나 정책 자체의 소통가능성 제고를 위해 먼저 활용되는 것이 계량화, 즉 숫자이다. 실증주의 연구에서는 보편적 원리를 찾아내는 인과관계 검증을 위한 변수측정이 중요하므로 자료의 계량화를 요구한다. 실증주의는 관찰 가능한 인간의 행태에 초점을 두고, 행위의 동기나 목표 등 가치나 의미가 포함된 것은 분석에서 제외한다(송근원, 2008). 문화정책이 가치 지향적이지만, 공공자원의 집행과 관련된 사실들을 계량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공공행정의 일상적인 소통을 위해서 불가피하다. 실증주의 인식론에 기반한 신공공관리론의 성과주의 예산체제에서는 공공재원의 집행으로 구현된 문화의 가치를 (불완전하더라도) 계량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양혜원 등(2019)에 따르면, 미적 가치와 내재적 가치 중심으로 전개되는 예술의 가치 연구가,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한 재정 긴축 압박이 현실화된 1980년 이후 주로 영국을 위시하여 예술의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실증적으로 규명하는 영향(impact) 연구로 확대되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예술지원 예산 삭감에 대응하여, 입법 로비 기구인 Americans for the Arts에서는 “예술을 지원해야 하는 10가지 이유(10 reasons to support the arts)”를 매우 구체적인 숫자1와 함께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보더라도 성과주의 문화행정 체계 안에서 설득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의 가치를 계량화 하는 실증주의적 접근은 불가피하면서도 유용하다.
이처럼 공공정책 집행의 정당성과 그 수행실적에 대한 감시를 위해서 ‘증거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이 요구된다. 이에 따라 정책 대상의 상태와 변화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지표체계가 구축되고, 정기적인 통계조사가 시행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실증주의적 접근이 보다 효율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의 문화정책 네트워크인 세계도시문화포럼(WCCF: World Cities Culture Forum)에서도 회원도시들의 문화지표를 비교하는 통계자료집인 WCCR (World Cities Culture Report)을 발간하는 이유를 “Without hard evidence we can't make hard argument”, “Evidence is essential if we are to achieve our goal”라는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발효된 문화관련 법률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그 정책대상의 현황파악 실태조사를 중시하며, 그것을 위한 정기조사를 국가나 지자체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문화다양성, 여가실태, 지역문화실태 등 문화지표 체계 개발을 위한 연구, 통계관리 시스템 구축, 현황 실태조사 등의 실증주의 연구들이 많아지는 경향도 나타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지표체계는 공공정책 주체가 천명하는 정책의 가치관을 반영하기도 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정책의 성과관리체계가 되기도 한다. 관리의 편리를 위해 계량화된 지표조사의 결과를 종합지수화 하고, 이를 도시 또는 국가 간에 비교하는 것도 대표적인 실증주의 연구사례이다. 조사된 지표들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종합지수를 산출하고, 이를 비교와 관리의 기준으로 활용한다. 비교의 권위와 집행의 구속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표조사를 공식승인 통계화 하고, 주요 국정지표와 연결하는 경향도 생긴다2. 이 과정에는 보편원리를 지향하며, 재현(再現)적 관리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실증주의 인식론이 반영된다. 이런 접근법은 정책의 지향점이나 현 상태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므로 정책의 소통과 관리의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선택되기 쉽다. 반면, 도시경쟁력 지수 등 비교를 위한 지수화 연구는 세계화와 창조도시 정책 붐 이후 도시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문화정책연구의 실증주의 경향을 부추기는 외부요인으로 강요되는 측면도 있다.
‘문화비전 2030’,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 등 최근 문화부나 지자체가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거나 법률에 근거한 기본계획을 만들 때 원탁회의, 순회 청책 세미나 등 소위 공론장을 열고, 그 논의 결과를 종합하여 발표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때 최종 발표되는 정책의 내용적 완성도 보다 얼마나 많은 횟수의 회의가 열렸고,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느냐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보다 많은 목소리들을 담아서 가장 적절한 정책을 도출했다는 것으로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는 경험된 현상들에서 보편원리를 찾아가는 실증주의의 귀납의 원리가 적용된다. 이 또한 정책 이해당사자들과의 소통가능성을 높이는데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실증주의 방법론이 채택된 사례이다. 이처럼 문화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 기조에 따라 다양한 의견들을 상향식으로 수렴하고, 현장과의 정책소통을 중시하는, 소위 거버넌스형 정책태도가 요구되는 점도 실증주의 경향성을 강화하는 외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증주의 방법론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듯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의 가치를 계량화하는 과정에서 문화의 작용이나 관련 현상을 온전하게 서술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해결되지 않는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동안 문화분야에 대한 공적 투자의 근거를 보다 과학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문화예술의 가치를 계량화하려는 노력은 수없이 시도되었지만, 아직까지 합의된 모델을 도출하지는 못하고 있다3. 그런데 김세훈(2015)이 지적하듯이, 지나치게 문화의 본질적 가치를 주장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추진되는 계량화 연구가 오히려 문화의 가치를 좁은 의미로 축소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양혜원 등(2019)은 예술의 가치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그 가치가 발현되는 과정이나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타 분야 정책사업의 효과성을 제고하기 위한 장식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태조사연구도 사실은 이를 담당하는 정책주체의 지향점과 역할범위에 맞추어 지표체계가 구성되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숫자로 표현된 실증주의 연구결과가 매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정책주체의 의도와 가치가 반영되는, 오히려 더 객관적이지 못한 측면이 간과된다. Oakely(2004)는 전 세계적으로 창조산업 붐을 이끌었던 영국 DCMS의 Creative Industry Mapping Document에서 창조산업에 과학영역이 제외된 안타까운 실수가 영국의 오래된 “두 문화의 전통(인문사화와 과학기술의 분리)”이 반영된 것이며, 통계조사 결과도 소위 창조계급들에게 만연해 있던 비정규직과 불안정한 노동 조건의 문제점을 가리는 “Political Mapping”이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정책의 목표에 따라 구성된 실태조사 통계수치의 변화를 정책성과와 등치시키려는 부적절한 경향이 증거기반의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된다. 그리고 숫자의 힘은 너무 커서, 만들어지는 순간 본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상황을 통제하기 어렵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정부에서 발표하는 통계에서 지자체별 순위를 본인들의 치적인 양 홍보하거나, 언론이 정부의 정책성과 비판에 이와 직접적 인과성이 없는 통계조사결과를 활용하기도 한다4. 문화생태계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실태조사는 숫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허위 행정자료 보고 통계로 전락할 위험이 상존한다.
공공정책 담당자들은 갈수록 더 많은 공론장을 열고, 현장의견을 청취하여 정책으로 정리한다지만, 이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오히려 줄어들지 않는다.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공론장에 개별 현상을 직접 진술할 당사자를 모두 참석시킬 수도 없고, 그 현상을 대표하여 원리적으로 진술할 대표자를 선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거버넌스 공론장이 공전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최대한 많은 현장의 목소리(사례)를 채집하여 가장 많거나, 강한 목소리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원리)을 결정하는 방식은 방법론적으로는 실증주의의 귀납법에 가깝다. ‘답정너’인 하향식 형식적 거버넌스라고 비난받지 않으려고 백지 상태로 모든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면, 어느 정도로 충분히 많은 개별 사례들을 들어야만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방법론적 한계에 봉착한다. 운영자는 보다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 워드클라우드 등 분석도구로 말의 맥락을 소거한 정량적 분석결과를 보여주면서, 상충되는 의견들을 적절히 종합한 ‘담론’으로 매끄럽게 정리해낸다. 하지만 모두의 의견을 정량적으로 존중한다는 공론장에서 정작 문화의 가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할 과학적 토론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례를 듣겠다는 귀납적 방법과 정해진 원리의 실천방법을 찾겠다는 연역적 접근으로 운영되는 거버넌스 공론장은 보편적인 시민들에게도 감동을 줄 ‘새로운 발견’은 없이, 문화의 가치에 대한 오래된 주장을 반복하며 형식적으로 공전된다.
한편, 실증주의 연구 방법론이 문화정책의 철학과 대치되는 모순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문화정책의 개입 대상을 종합지수화 방식으로 단순화하여 이해하는 것은 문화정책이 지향하는 다양성과 분권의 철학과 대치된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진흥한다고 하면서 하나의 원리를 반영한 지수로 중앙정부가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접근이다. 이처럼 정책의 효율적인 실행과 보편적 소통을 위해 채택되는 실증주의 방법론이 문화의 다양한 가치를 단순화시키는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여러 가지 오류들을 만들어낸다. 정광렬(2009: 14)은 문화정책에 관한 학술적인 논문들은 가정이 심하거나 연구대상에 대한 개념화가 미흡한 수준에서 통계적 기법을 사용하여 주로 현상에 대한 기술과 이해 위주이며, 왜 라는 설명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윤견수(2008)는 행정학 연구방법론의 다원화를 위해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실증적으로 도출된, 과학적이라는 보편원리가 현실에서 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거나, 형식주의로 빠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오류들을 이해하고 보완할 새로운 인식론과 연구방법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Ⅲ. 비판적 실재론 및 이를 활용한 정책연구 비판 사례에 대한 개괄
존재론(ontology) 대 인식론(epistemology), 합리론(rationalism) 대 경험론(empiricism) 등의 이항대립이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지탱해 왔다. 자연과학의 발전,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의 발호, 정치와 종교의 분리, 개인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성장 등의 영향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의 이항대립은 경험론과 실증주의(positivism)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경험을 중시한 전통은 버클리의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나 흄의 “원인과 결과는 필연이 아니므로 경험 없이는 알 수 없다”와 같은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들에게 모든 진리를 인식하는 출발점은 인간의 경험이므로 자율의지와 내면을 중시하는 관념론과 인간의 인식 및 가치의 보편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대주의로 흐르게 된다(서민규, 2019: 378).
영국의 과학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는 1975년에 실재론적 과학론(A Realist Theory of Science)에서 ‘비판적 실재론’을 주장하며, 1930년대부터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실증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비판에서 기획된 ‘실재론으로의 귀환’을 주도하였다. 바스카는 (자연)과학이란 경험되는 현상의 기저에서 그것을 일으키는 인과적 힘을 찾아내는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 활동은 그동안 데이비드 흄의 인과성 이론이 무시해온 ‘층화된 존재’와 그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발현’ 메커니즘을 초월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더 적절히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이 그의 이론 중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에 바스카는 그의 관점을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이라도 불렀다(이기홍, 2017). 바스카는 사회가 인간에 앞서 실재하며, 인간의 본질은 결코 각각의 개인들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고,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개인들이 변형하고, 재생산하는 구조, 관행, 관습의 앙상블이지만 동시에 사회는 사람들로 환원될 수 없다고 보았다(신희영, 2003). 이로써 사회를 이해하는 보편적 법칙과 행위의 개인적 의미 추구 사이에서의 논쟁을 해소하고, 해석학의 대상이었던 믿음과 의미에 대한 과학적 설명 또는 비판의 가능성도 주장하였다. 이렇게 과잉-자연주의적-실증주의(hyper-naturalistic positivism)와 반-자연주의적-해석학(anti-naturalistic hermeneutics)의 오류를 벗어나는 자신의 입장을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라고 불렀다. 그리고 초월적 실재론과 비판적 자연주의를 합쳐서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으로 명명하였다.
비판적 실재론은 사회 실재론과 비판적 자연주의를 적용하여 사회과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흄의 법칙(Hume’s Law, is–ought problem)에 따라 ‘이다(is)’에서 ‘이어야 한다(ought)’로, 존재에서 당위로, 사실에서 가치로, 서술에서 명령으로 나아가는 논증에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이기홍, 2017). 이와 같은 사실-가치의 이분법은 사회적 실천들과 사회정책들에 대한 과학적 논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바스카는 과학연구에서도 가치의 배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며, 가치판단에서 자유로운 사실판단은 없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이성적 논의의 금지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진술이 ‘수많은 유대인이 죽었다’보다 더 정교하고 정확한 진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사실명제가 가치 입장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오류나 허위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객관적일 수 있다. 바스카는 사회과학에서의 적절한 설명이 곧 가치 판단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설명적 비판’이며, “인간과학의 목표는 실증주의적이고 도구적인 예측과 통제가 아니라, 비판적이고 실재론적인 심층설명과 인간해방에 있다”고 강조하였다(베르트 다네마르크 외, 2001).
바스카는 경험론과 실증주의 관점에서 존재론을 인식론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근대 이후 서양철학의 태도를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라고 규정했다(김명희, 2015: 265). 경험론적 실증주의는 실재를 인간의 감각에 맞춰 정의하며, 이를 경험적 사실로 환원한다. 반면, 비판적 실재론은 이것이 인간의 경험가능성을 세계의 본질적 속성으로 취급하고, 오로지 인간 존재에 입각해 분석하거나 환원하는, ‘인간중심적 오류(anthropic fallacy)’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은폐된 인간중심주의적 존재론”은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로 이어졌던 서양의 근현대 철학에 뿌리깊이 박힌 인간 중심주의를 반영한다. 포스터모더니즘은 서구 위주의 근대성과 일극중심성에 반대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강조한 점 등의 긍정적 측면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바스카는 포스터모더니즘 담론의 보편성 부인, 판단적 상대주의, 현상주의를 강력히 비판했다(이기홍, 2017).
바스카는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세계는 존재론적으로는 평평하지 않으며 ‘깊이 있고 두꺼운(with ontological distance or depth)’ 세계라고 상정하고, 존재의 영역을 실재적, 현실적, 경험적 영역, 세 가지 층위로 구분했다([그림 1]). 경험론적 실증주의의 ‘인식론적 오류’는 결국 다양한 층위로 존재하는 실재들을 인간의 경험으로 인식하는 하나의 영역, 즉 경험적 영역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이다. 층화된 세계에 존재하는 객체, 기제, 구조는 뒤섞여 있지만, 좀 더 기본적인 층위의 기제들이 결합하여 상향적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층위(layer)는 그 아래 기저적 층위들로 환원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특성을 띤 새로운 객체들이 ‘발현’(emergence)할 뿐이다. 따라서 경험적 영역의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만으로 실재적 영역을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의 존재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이론적 개념으로 연결되어야 할 ‘자료들’과 ‘사실들’은 일상적인 ‘경험적 영역’에서 인식된다. 하지만 세계는 발현된 현상과 그것이 발생하는 기제와 구조로 층화되어 있으므로, 과학자는 발생하는 사건들의 경험적 규칙성이 아니라, 그 발생기제의 존재와 작동방식 또는 인과법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흄의 경험주의는 존재론적 원자론에 입각하여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건들이 늘 연결되어 일어나는 상황(constant conjunction)을 탐구한다. ‘비가 오면 항상 땅이 젖는다’는 규칙성을 관찰하고, 비가 오는 사건(A)과 땅이 젖는 사건(B)이 항상 연결되어 있는(C: constant conjunction) 현상에서 인과법칙을 도출한다면, 흄과 같은 경험론자의 관점에서는 A와 B와 C의 경험과 그것들이 발생하는 시간적 상관성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A와 B사이의 필연적 법칙과 인과적 매커니즘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귀납적 방식으로 우연적인 것의 규칙성을 발견하고, 시간상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상관관계가 높다고 해석된 현상에 대해 인과성을 부여할 뿐이다. 실증주의 관점에서는 칸트의 말대로 인과성은 실제 세계의 특성이 아니라, 오로지 인식주체의 구성물이며, 인식대상의 실체가 아니라 “인식자의 주 관적 능력으로 둔갑” 한다(서민규, 2019: 389).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서 인과성은 원자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객체나 관계들의 인과적 힘이나 성향, 실체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나 메커니즘과 관련된다(신희영, 2013: 401). ‘무엇이 그것의 변화를 발생시켰는가?’ 즉 변동의 원인에 대한 해명은 층화된 존재론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신희영, 2019: 133). 예를 들어, 문화향유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다는 통계조사에서 시작하여 문화향유 활동이 행복감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연구는 단순히 지표들 간의 상관관계를 검증하는 또 다른 통계연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 간의 상호작용을 밝히는 다른 방식의 연구이어야 한다.
실험실과 같은 폐쇄체계(close system)에서는 특정한 인과적 자극이 항상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내므로, 재현되는 현상들의 상관성들이 인과성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개방체계(open system)에서 현상은 연역적 법칙에 따라 예측 가능하도록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국면(conjuncture)’으로만 취급되어야 한다(이기홍, 2017). 자연계나 사회나 모두 층화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개방체계이다. 특히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복잡한 내적구조와 자기결정, 학습과 해석을 통해 스스로의 인과적 힘(casual force)을 발휘하는 인과적 행위자(casual agents), 즉 인간이 ‘변형적 사회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중요 변인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의 탐구대상인 인간의 행위나 사회적 현상에 대해 원인(cause)과 결과는 외적 관계인 반면, 이유(reason)와 행위는 내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사회연구에서는 인과적 설명이 부적절하거나 불가능하므로 해석적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인간 행위의 이유가 되는 의도는 사회를 거울처럼 반사한 것도, 행태적 충동의 표현도 아니다. 인간의 정신적 층위의 실재가 발현한 것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정책연구에서 당사자들의 의도 또는 ‘이유’를 정책행위의 원인으로 파악할 필요도 있다.
경험사례에서 보편원리를 찾고자 하는 실증주의 연구에서 많이 사용되는 귀납적 논증에서는 관찰된 현상의 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관찰이 행해지는 조건들이 다양할수록 그 결론이 참일 개연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정확한 추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관찰을 해야 되는지 결정할 수 없는 한계, 즉, ‘흄의 역설’이 발생한다. 사소한 반례 하나가 앞서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추론해낸 보편원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거나 미래에 일어날, 즉 관찰 불가능한 사례는 추론에 사용될 수 없다는 점, 인간의 경험과 감각 이 능동적 해석의 산물이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이렇게 제한적인 관찰에서 도출된 결론을 참이라고 ‘경험적으로’ 논증할 수 없는 한계도 있다. 반면, 연역적 방법은 그것을 사용할 때 전제가 되는 보편법칙 또는 일반성을 갖는 지식 주장을 최초에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연역적 방법으로는 단지 기존의 지식을 경험적으로 검증하기만 할 뿐 일반성을 갖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없다(이기홍, 2008). 연역법은 논증의 타당성에 입각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전제에서 결론을 끌어내기 때문에 퍼스가 말하는 과학적 탐구의 ‘놀라움’을 선사하지 못한다.
경험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을 넘어서 관찰할 수 없더라도 세계에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실체들에 대한 추론과 이에 대한 초월적 논증과정을 통해서만 지식의 새로운 발견과 도약이 가능하다([그림 2]). 실제 인과관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존 지식의 전제에 담겨있지 않은 새로운 전제를 찾아가야 하는데, 이러한 개연적 추리 과정이 가추법이다(이희은, 2011). 그 추리과정에서의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추법만이 과학적 창의성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 퍼스의 기본 모형은 다음과 같다.
퍼스에 따르면, 여기에서 가추법을 과학적 논증으로 만드는 요건은, H가 얼마나 진리에 가까우며 일반적인가가 아니라, H를 전제로 수용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의 문제이다. 귀납은 실제로 그러함(actually is)을 보여준다면, 가추는 ‘그럴 수도 있음(may be)’을 제시하는 것이다(Peirce, 1998, 이희은, 2011 재인용).
‘가추(abduction)’가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는 원인기제가 있을 것이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면, ‘역행추론(retroduction)’은 그런 사건을 발생시키거나 발생하지 않을 여러 가지 대안적 조건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며, 가장 설명력 높은 가설을 채택해 나가는 검증 방법이다. 정책연구가 이미 발생한 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일반화를 넘어서 사회변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적 사회과학’을 지향한다면, “행위나 사회조직 같은 온갖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건 X가 존재하고 그것이 바로 X이려면 무슨 속성이 존재해야 하는가? 또는 무엇이 X를 가능하게 하는가는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정책을 기획할 때 주로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기존의 연역과 귀납의 추론에는 논리적 추리능력, 통계 분석능력이 요구되었다면, 사건 발생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가추와 역행추론을 위해서는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추상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가추와 역행추론을 초월적 논증 방법이라고 부른다. 문화정책연구에서 문화의 가치를 당연한 전제로 전개하는 연역적 추론이나 경험되는 사례들에서 문화의 가치를 정리하려는 귀납적 논증보다는 가추와 역행추론을 활용한 초월적 논증이 더 적합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를 ‘덜 집권화 된 공공영역에서 성과 지향적 문화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공관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하는데, 그것의 공통적인 요소는 대체로 ‘원자화된 개인, 강력한 시장, 축소지향형 정부’로 요약된다(이영철, 2003: 56). 가치와 의미를 소거한 인간 행태를 계량적으로 관찰하고, 인과관계를 검증하여 보다 효율적인 관리방안을 찾아내는 실증주의 정책연구는 신공공관리론의 기조에 잘 부합한다. 2001년부터 새로운 행정학 연구 방법론으로서 비판적 실재론 도입 방안 연구들을 발표해온 신희영(2003)은 신공공관리론의 오류가 그것이 기초한 실증주의의 인식론과 존재론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하였다. 신공공관리론은 인간 행위자들이 이기적이며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로서 원자화되어 있다고 보는 ‘존재론적 원자론’ 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경험주의 연역법칙 모델에 따라, 보편법칙에서 특수한 개별현상을 예측하는 포섭주의(subsumption)를 채택하고 있다. 이처럼 신공공관리론은 시장과 정부, 개인과 제도 및 사회적 구조를 존재론적으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경영과 행정을 동일시하며, 조직과 제도의 실재를 간과했다는 비판에 비판적실재론이 주장하는 층화된 세계관과 발현적 속성을 적용하였다(신희영, 2003).
실증주의 정책평가는 객관성과 비교가능성을 위해 정량적 지표를 선호하는데, 송원근(2008)의 비판처럼, 오히려 관찰 가능한 정책행동, 즉 ‘보이는 것’만을 평가하는 한계를 내포한다. 실증주의 접근법은 몰가치적으로 정책을 분석하기 때문에 정책의 존립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애당초 목표 자체를 다루지 않고, 정책과정에서 행위자가 부여하는 의미에 대한 분석이 없다. 그리고 실증주의 접근법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정책상황에 대한 분석이 취약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엄격한 의미의 실험설계나 변수통제가 불가능한 몇몇 사례 연구를 통해서는 보편적 법칙을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에 단지 정책의 실패 원인만 제시할 뿐이다(송원근, 2008).
신희영(2019)은 실증주의 정책평가의 인과성에 대한 연쇄주의 이론의 한계를 비판하며, 그 대안을 비판적 실재론에서 찾았다. 동일한 원인, 동일한 조건을 상정하는 연쇄주의 이론의 폐쇄체계 가정에 대해 비판하고, 인과관계를 외적인 관계로만 보는 인식도 비판했다. 교육정책평가를 비판한 이성회(2018)는 정책성과평가의 목적이 평가결과의 일반화가 아닌 “정말 쓸모 있는” 설명이 되도록, 실증주의를 대신하여 비판적실재론의 인식론을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실재론적 정책평가는 층화된 세계와 개방 체계, 사회 실재론과 인과적 행위자를 인정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무엇이 작동하는가?’ 보다는 ‘정책의 그 무엇이 어떤 정황에서, 어떤 점에서, 그리고 누구에게 작동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춘다(이성회, 2018).
이영철(2005), 신희영(2013) 등은 가치와 사실을 모두 다루어야 하는 행정학 연구에서 실증주의 연구방법론의 대안으로 비판적실재론의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권향은(2017)은 한국적 행정이론 연구방법론을 추구하며, 이론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이분법을 극복할 대안으로서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공공현상의 이면에 숨은 공통의 패턴을 찾는 것이 행정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하며, ‘과학주의 행정학’의 기틀을 마련한 사이몬(Hebert Simon)을 실재론자로, 맥락 중심의 이해와 통찰에 기반하여, 거대 담론과 보편이론보다는 당면한 현실문제에 적용되는 ‘작은 진실(small truth)’에 무게를 둔 왈도(Dwight Waldo)를 반실재론자로 구분하여 비교하였다. 바스카는 보편이론과 특수이론은 일반화가 검증된 정도(degree)의 차이에 따라 그 수준(level)의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 어떠한 이론도 “완전히 보편성을 지닌 것”이나 또는 “완전히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구분할 수 없으니 오히려 양자택일보다는 양쪽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매개하는 입장을 취했다(권향은, 2017: 11). 권향은(2017)은 외국의 정책이론을 수입하는 한국 행정학 이론이 일반적 설명력 높은 ‘학술성’뿐만 아니라, 현실의 맥락을 반영한 토착화로 ‘실천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 비판적실재론을 제시하였다.
Ⅳ. 실증주의 문화정책연구가 봉착한 문제와 이에 대한 실재론적 보완
실증주의 분석을 위해서는 정량적 데이터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측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박근화·김지학(2019)은 박물관, 미술관 이용객 현황이 동일 기준으로 집계될 수 있도록 카메라나 무선신호를 이용한 보다 정확하고, 표준화된 측정방안을 제시하고자 시행한 연구에서, 오히려 근본적으로 ‘방문객’, ‘입장객’, ‘관람객’으로 세분화된 정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방문객, 입장객, 관람객 중 어떤 출입행위를 계측하느냐에 따라 카메라의 설치 위치와 계측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미술관의 경우라면 핵심 콘텐츠가 있는 전시실까지 들어오는 관람객 숫자를 측정해야 하겠지만, 이제는 로비나 카페만 이용하는 단순 방문객의 이용 행태를 조사하는 것도 기관운영 전략 수립을 위해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숫자를 전시 관람 인원과 동일시하여 기관의 연간 운영성과로 합쳐서 발표한다면, 이 또한 층화된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경험된 모든 숫자를 하나로 인식하는, ‘평평한 세계관의 인식론적 오류’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실증적 증거 채집의 오류와 보다 근원적인 측정 불가능성의 문제는 단순히 양적 계측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계측의 이유가 되는 가치와 관련된 문제이다. 미술관의 이용객 숫자를 정확하게 계측할 과학적인 방법은 미술관이 제공해야 할 핵심가치 서비스가 수준 높은 전시인지 편안한 문화나들이 공간인지 정의한 이후에 확정될 수 있는 것이다. 계측의 이유 또는 가치에 대한 정의 없이는 문화정책행위를 객관적 사실로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이 애초에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다. 박근화·김지학(2019)은 더 나아가서 “이것이 성과나 평가에 이용될 경우 통계에 개입할 가능성과 함께 제대로 된 통계를 산출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성과나 평가에 이용하지 않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들의 우려처럼, 이런 측정의 목적이 평가와 비교일 때는 ‘측정 불가능성’ 또는 ‘공정하고 정확한 측정행위의 수행 불가능성’에 봉착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역문화재단 등 공공기관들의 평판과 성과급을 결정하는 경영실적평가가 기관장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아니고, 객관적인 실적평가로 보여지기 위해 계량지표가 중시된다. 문화사업의 계량지표들의 적절성에 대한 피평가 기관의 반감은 매년 지표개선 요구로 표출되지만, 실증주의 정책평가 틀 안에서는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한다. 한편, 평가단은 제출된 계량실적(또는 지표)의 적절성에는 관심 없이 데이터의 진실성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별도의 현장실사를 펼치고, 경영평가가 아니라 감사 같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소영진(2009)은 정책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처방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치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서 보면, 문화시설 이용객을 방문객, 입장객, 관람객으로 나누어서 계측하는 것이 의미 있으려면, 이용객의 출현빈도라는 경험세계의 현상 너머에서 문화기관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어떻게 작동하여 이용객의 유인, 감동, 만족감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소위 문화서비스 가치의 ‘발현’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영적 조치 이전에 이와 같은 문화의 가치와 그것의 거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바로 공공문화서비스 혁신의 시작이어야 한다(김해보, 2008). 문화자원들에 대한 지표조사로 현실적 영역의 현상들을 파악하더라도 그것들이 문화도시의 매력을 만들어내는 매커니즘은 세 영역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별도의 연구과제이다. 시민 개개인이 느끼는 문화적 감동 또는 행복감이라는 경험은 도시 인프라나 문화행사 등의 현실영역에서의 사건들이 실재적 영역의 인과적인 힘에 따라 발현시키는 현상들 중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건과 현상들에 대한 실증적 측정결과로 문화도시라고 주장하는 인식적 오류에 빠지지 말고, 그 이면에 있는 인과 원리, 즉 문화의 가치의 작동 매커니즘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실적 비교를 위한 실증주의 정책평가가 오히려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재론적 평가모델을 적용한 “쓸모 있는 평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단순한 평가결과뿐만 아니라, 맥락-메커니즘-결과 간의 관계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문화정책의 개선 방향을 도출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포우슨(Ray Pawson)이 영국 리즈 대학의 30여명의 사회과학자들과 함께 20여 년 간의 비판적 실재론을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맥락(context) + 매커니즘(mechanism) = 결과(outcomes)” 혹은 CMOs 로 공식화한 ‘실재론적 평가모델’을 참조할 만하다(이성회, 2018).
‘지역문화실태조사’는 지역문화진흥법에 근거하여 5년마다 시행된다. 2019년 3월에는 문화부가 지역문화실태조사 결과를 지수화하여 ‘지역문화종합지수’ 상위 10개 지역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종합지수 산출 과정에서 각 지표들이 각기 다른 현장의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의미와 정보는 사라진다. 지자체들의 종합순위만 관심을 끌 뿐, 상세 맥락이 소거된 지표조사결과를 근거로 지역에 맞는 지역문화진흥 정책을 수립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지역문화의 다양성을 중앙정부의 단일 기준으로 인식하겠다는 철학적 오류가 증거기반으로 현실에 맞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실증주의 접근 방법론의 장점을 무색하게 한다.
중앙정부의 정책관리를 위한 종합지수화로 지역문화진흥의 수준을 서열화하는 것은 지역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 취지와도 배치된다. 지역문화진흥법 제 11조(지역문화실태조사)에서는 ‘기본계획의 수립 등을 위하여 지역 간의 문화격차 현황 등 지역문화진흥에 필요한 사항을 5년마다 조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지역문화종합지수연구의 목적은 ‘지역문화 공급 수준 및 문화발전 수준 진단’, ‘지역문화정책 추진의 성과 및 효과 평가’, ‘지역별 인센티브 부여 판단 기준 마련’이라고 밝히고 있다5. 그리고 현황조사 결과가 지자체의 정책성과 평가로 활용되는 것은 지역 간 문화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부의 지역문화진흥이 필요하다는 정책 취지와도 배치된다. 이처럼 지역문화실태조사와 지수화 연구에 나타난 문제는 지역문화진흥법에 근거한 지역문화기본계획의 수립과 실행체계의 철학적 오류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지역문화분권을 지향하면서도 오히려 이에 반하여 중앙정부의 기본계획에 따라 지자체가 실행계획을 수립하는 구조나 대표 지수로 종합하여 지역문화진흥의 성과를 관리하겠다는 것은 전형적인 실증주의적 접근 방식인 것이다.
우선 지역문화생태계를 중앙정부의 정책논리로 ‘평평하게’ 보는 인식론적 오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문화분권의 취지에 맞게 지역과 중앙 간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책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발현하는 것을 이해하는, 층화된 세계관이 필요하다. 국비-지방비 매칭 방식으로 진행된 예술창작지원사업에서 지자체와 보조사업들의 성과의 총합을 중앙정부 차원의 지역예술생태계 활성화 정책의 성과로 인식하는 것처럼, 중앙정부의 정책성과분석을 위해 지역의 성과를 산술합계 하는 것이 대표적인 평평한 인식론의 오류이다. 중앙정부가 설정한 정책기조와 전달체계에 따라 당초 기대한 지역문화진흥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역문화생태계가 중앙정부의 정책만 작동하는 곳이 아니라, 지자체의 다양한 정책과 시장영역까지 함께 작동하는 개방체계임을 간과한 것이다. 지역문화주체도 스스로 인과력(causal power)을 가진 행위자이다. 지역문화생태계를 변화시키는 인과력이 오로지 중앙정부의 정책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지역문화진흥에서 중앙정부의 역할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문화생태계를 중앙정부의 지역문화진흥 정책입장으로만 평평하게 보는 인식오류를 극복하려면, 단순한 산술적 합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해석, 부가할 수 있는 정책주체들의 역량이 요구된다. 지역문화자원이 많을수록 지역문화가 더 진흥되었다고 보는 중앙정부의 전제를 재확인하는 연구보다는, 특정 지역에서 나타나는 개성 있는 지역문화 현상을 그 지역에서의 독특한 맥락 위에서 이해하는 연구가 ‘새로움과 놀라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역문화균형발전이라는 논리에 맞춰 중앙정부가 설정한 가중치에 따라 지역문화종합지수를 산출하는 대신 부문별 지수화 방식을 채택하면 보다 세분화된 지역문화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파악된 계량적 결과보다는 지역의 문화적 맥락에 맞추어 현실적 어려움과 약점을 파악하여 각 지역별 문화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지역문화진흥을 도와주는 본래 취지에도 부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층화된 세계의 주체들의 인과력을 인정할 때,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단계적 이행의 관계라고 주장하지만, 엄연히 서로 충돌하는 ‘문화분권’과 ‘문화자치’의 철학적 딜레마도 ‘지역문화진흥’의 가치로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게 된다.
행정학에서는 거버넌스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자유주의’로 보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는데(신희영, 2002) 반해, 문화정책에서는 ‘문화거버넌스’가 어떤 정치적 입장에서도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탈정치화’된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 숙의 거버넌스의 현장에서는 당사자성과 대표자성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해 논의의 정당성을 의심받고, 같은 말을 쓰면서도 서로 개념이 소통되지 않는 토론으로 정책적 진보를 이뤄내지 못하며 공전하는 경우가 많다. 주최측에서 정책 초안을 가지고 가면 소위 ‘답정너’인 하향식 형식적 거버넌스라고 비난받고, 백지 상태로 모든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면, 방향성 없는 말들의 조합으로 끝나거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주최측으로 비난받는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런 소통 불가능성이 소위 공평무사하고, 객관적인 여론 정리를 위해 사용하는 실증주의적 방법론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를 극복할 새로운 방법론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반면, 문화거버넌스 숙의 현장에서의 소통 불가능성은 위와 같은 실증주의 방법론의 한계뿐만 아니라, 문화 분야의 특징을 반영하는 철학적 문제도 포함한다. 문화영역에서는 다양한 가치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중시 경향, 탈 중심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경향, 근본적 진리의 불가지론으로 빠지는 인간(개인)중심주의 성향이 타 영역보다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이 채택할 보다 보편적 가치의 합의로 나아가는 과학적 토론은 아예 거부되거나 원만하게 진행되기 어렵다. 문화거버넌스 공론장의 비생산적인 공회전 속에 문화가치의 소통불가능성을 갈수록 커지고 그에 대한 의구심도 커진다.
문화거버넌스 안에서의 소통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적절한 숙의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성만·김광구(2012: 212)의 지적처럼, 가치와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 간의 숙의 거버넌스 운영에서는 어떤 의사결정방식을 통해 합의에 도달할 것인지를 상황에 맞게 선택하고 합의하는 것이 최종 합의도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가장 손쉽게 채택되는 다수결은 초월적 논증을 불가능하게 하는, 실증주의적 인식론에 기반한 방법론이며, 앞서 소개한 것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정책대안 도출을 위해서는 현실에 기반하되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고, 상향식과 하향식 의사결정의 적절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이 필요하다. 현실영역의 경험과 실재영역의 원리를 오가며 논증하고 반증하는 가추와 역행추론이 대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
이때 연구자 또는 숙의 거버넌스 운영자는 현상(또는 여론)을 단순히 채집하고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대안을 도출할 역량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참여자들 사이에서 이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한다는 합의와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역할은 주로 “수평적 권력관계”를 지향점의 관점에서는 자칫 반-거버넌스적인 것으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거버넌스 운영 과정에서 옳음과 좋음 즉 사실과 가치의 균형, 이를 관장하는 행정과 정치의 적절한 균형도 중요하다. 다수결로 확인된 호불호 의견에 근거한 보편적 결정에만 집중할 뿐, 보다 궁극의 진리 찾기를 외면하는 정치만능주의는 과학적 토론을 위해 가장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과학적 토론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이항대립 문제는 문화라는 개인적인 영역에 국가가 개입하는 문화정책의 철학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바스카는 실증주의와 해석학(hermeneutics) 양쪽의 오류가 그들이 공유하는 존재론 즉 경험주의와 이것이 전제하는 개인주의적 사회과학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대체하여 ‘사회적 객체의 사회과학’을 주장했다. 이로서 사회를 이해하는 ‘보편적 법칙’과 행위의 ‘개인적 의미 추구’ 사이에서의 논쟁을 해소하고, 해석학의 대상이었던 믿음과 의미에 대한 과학적 설명 또는 비판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소통가능한 보편적 원리를 찾아서, 반증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검증하는 것이 과학적 토론 과정이다. 가치를 하나의 언어로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발현되는 메커니즘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다른 영역과 소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한 영역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원리가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까지 소통될 수 있는 것이 더 보편적인 과학지식이며 더 실효성 있는 정책이다. 문화가 문화정책이라는 특수하고 고립된 ‘영역’ 안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전반으로 ‘원리’로서 확산되려면 이와 같이 보다 보편적인 원리가 될 수 있는 궁극의 문화의 가치를 논증하는 과학적 토론으로 소통가능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Ⅴ.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문화정책연구에서의 실증주의 접근법이 강조되는 경향을 소통가능성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경험적 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보편적 설명을 제시하는 실증주의 연구의 방법론적 장점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소통의 요구가 커지는 환경변화를 문화정책연구에서 실증주의 연구경향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파악했다. 숫자를 통해 보다 보편적인 소통을 도와주는 실증주의 연구는 문화정책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경험되는 것만을 분석하는 평평한 세계관의 인식론적 오류로 인해 층화되고, 열린 체계 안에서 문화의 가치가 발현되는 것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실증주의 문화정책연구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문제 사례로서, ‘문화정책 행위에 대한 실증주의적 측정의 한계’, ‘종합지수화 과정에서 문화다양성과 맥락이 소거되는 문제’, ‘문화공론장에서 문화가치의 소통 불가능성’을 실재론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이에 대해서 ‘경험적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문화 가치 발현의 메커니즘 이해에 근거한 측정과 평가’, ‘층화된 세계의 개방체계 실재들의 인과력과 맥락을 존중하는 세계관 적용’, ‘소통가능 한 보편원리를 초월적으로 찾아가는 과학적 논증 방식 채택’등 비판적 실재론의 이론을 적용한 보완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미 많은 문화정책 연구에서 양적 방법론과 질적 방법론이 혼합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그 기저에 깔린 실증주의 중심의 세계관의 변화 필요성을 재차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데이터에 기반한 정확한 실증적 분석은 인공지능이 거의 모두 담당하는 현실이 이미 도래했다. 하지만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공유되는 가치에 기반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정책소통자의 역할은 인간이 계속 맡아야 할 것이다. 사실에 기반하되 문화의 가치를 초월적으로 논증하며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통해 문화정책은 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소통되고, 쓸모 있는 “인간적인” 정책으로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정책 연구방법론의 다양화를 위한 시론적 주장에서 나아가 비판적 실재론을 적용한 보다 세밀한 방법론에 대한 추가 연구를 후속과제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