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권위는 정치적이면서 문헌적”이라는 테제는 많은 연구자들의 문화권력의 구조와 전략,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Norton, 2004: 47). 문화권력은 세계정치에서 자국의 국익을 창출․보호․증진하기 위한 국가행동의 추동력이 되기도 한다. 국민국가를 단위로 보았을 때, 문화권력을 높이기 위한 일국의 전략은 대외문화정책, 문화외교, 문화교류, 문화원조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20세기 중반 소련을 축으로 한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한 공공외교정책에도 다분히 문화권력을 위한 국가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Arnt, 2005). 국무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세계콘서트 투어를 했던 루이암스트롱의 문화교류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이다(Cowan & Arsenault, 2008). 재즈외교를 통해 미국정부는 자유주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고,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의 토대를 다졌다. 그러나 21세기 세계정치에서 비국가행위자의 등장과 권력분산으로 인해 문화정치 담론에서 국가역할에 대한 논의는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김문환, 2004).
역설적이게도 20세기 후반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에 대응하여 지식과 문화에 중심을 둔 소프트파워 권력현상이 나타나면서 신공공외교1를 추진하는 여러 국가들은 자국의 연성권력을 높이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Melissen, 2005; Cull, 2010). 공공외교 선발국인 영국은 1990년대 후반 블레어(Tony Blair) 행정부가 문화산업육성을 국가 미래전략으로 설정하고, 국가기조에 따라 외무성은 소프트파워를 높이기 위한 공공외교정책과 국가브랜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바 있다(Pamment 2016). 실천적으로 세계문화정치에서의 연성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역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정치 담론에 소프트파워 개념과 실천을 접목해본다면 국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문화정치의 새로운 영역을 도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문화정치와 소프트파워를 연계한 학문적 탐구와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초해, 필자는 시험적 연구(파일럿스터디)2를 통해 문화를 권력자원으로 국제정치에서 소프트파워를 발휘하고 있는 소위 문화연성권력국가의 정부는 문화정치의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근거하여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서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국가역할을 분석하고 21세기 문화정치영역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주제와 관련한 검증할만한 가설이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먼저 문헌연구를 통해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문화정치 영역의 개념적 모델을 고안한 후, 실제 사례분석을 수행하여 앞서 고안한 개념 모델을 경험적으로 분석하여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소프트파워30인덱스에서 발표하는 문화분야 소프트파워 세계 4위권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를 사례 국가로 선정하여 각국의 중앙정부, 대사관, 문화원 종사자 등 공행정주체 총 16명을 인터뷰하여 질적 탐구를 수행했다.
다음 장에서는 문화정치의 개념적 토대가 되는 문화주의, 구성주의, 메타문화담론 등 다양한 관점을 탐색하고, 21세기 소프트파워의 권력현상과 문화정치 추세를 살펴본 후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문화정치와 국가역할 개념화 및 개념적 모델을 도출했다. Ⅲ장 사례분석에서는 사례 국가 선정이유와 연구방법 및 연구를 위한 분석틀을 제시하고, 인터뷰 결과를 분석한다. 마지막 Ⅳ장에서는 4개국 비교분석으로 도출된 결과를 바탕으로 21세기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국가가 역할을 하는 문화정치영역에 대해 밝히고, 본 연구결과의 이론적, 정책적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Ⅱ. 문화와 국가역할에 대한 문헌고찰
문화주의자들이 정의하는 문화정치는 공간적 범주 내에서 사회적으로 행해지는 의미를 갖는 모든 실천과 권력관계라는 점에서 ‘모든 것’이며,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지배적 배타문화가 내재해 있다(Shunya, 2000). 이 때문에 문화주의자들은 문화개념의 역사성에 집착(Williams, 1983)하거나 경험의 개념에 집착(Thompson, 1963)하는 한계점을 보인다. 반면, 구성주의자들은 정치의 사회적 관계질서를 결정짓는 기능 측면에서 정치의 영향력과 문화적 형성의 윤곽과 구성에 주의를 기울여 문화정치를 이해한다(Shunya, 2000). 대표적인 구성주의자인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세계화와 탈식민주의로 인한 정체성의 변화가 국민국가의 틀을 해체시키고 있는 과정에 정치의 권력편제가 일어나고, 정체성, 이익과 가치 등의 영역이 문화정치에서 과도한 특징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했다(Mulhern, 2000). 문화정치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실천의 가장 우위에 점하는 높은 진실로 정신적 의미를 부여받고 민족성을 나타내는 문화와 언어/텍스트가 중요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공공정책이 민족적 유산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Jordan과 Weedon(1995; Mulhern, 2000: 265에서 재인용)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들 예컨대, 공식적 문화와 종속적 문화의 구분, 전시해야 할 문화와 숨겨야 할 문화, 기억되어야 할 역사와 주변에 머물러야 할 역사, 투사할 사회적 이미지와 주변적 이미지, 들리게 되는 목소리와 그 근거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정치적이지 않은 그 어떤 문화적 실천이 있는가, 혹은 문화적이지 않은 그 어떤 정치가 있는가?”라는 문화주의론적 관점도 일견 타당하다고 보인다. 문화정치에서 두 가지 패러다임인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는 서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로 상보적이라는 Hall(1980)의 주장은 문화정치를 이해하는 가장 주요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메타문화 담론(사회적 욕망의 기호화)의 측면에서 ‘문화’는 존재의 역사적 조건에 근거한 ‘일반적인 권위’이며, 정치는 일정한 형식의 ‘사회적 권위’이다(Mulhern, 2000). 문화는 ‘개인의 집단에 대한 관계’와 ‘집단 내에서 개인의 의미’의 기초를 결정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일부이다(조윤영, 2004: 56). 동시에, 문화는 국가의 정책적 이슈이며, 국가 정체성과 깊이 연관된다(김명섭, 2016: 167). 국민 개개인의 삶의 영위 방식, 가치관, 사유체계와 직결되어 문화가 생성되고 경험되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상 전쟁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문화적 정체성의 충돌이었다는 점에서 국가의 이익과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국민국가의 틀에서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국가의 정체성, 국가이익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권위의 속성을 지니며, 국제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국가행동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한 세계화의 급속한 진행, 자본주의의 확산, 초국가행위자의 등장과 21세기 정보화 기술혁명으로 가속화된 지구화 등 환경변화에 따른 문화정치에 접근하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 번째 관점은 ‘문화전쟁’이다. Mitchell(2000)은 일련의 문화전쟁 사건들에서 보이듯 문화는 사회적 관계, 제도, 구조를 둘러싼 사회․정치․경제적 권력을 지닌다고 보았다. 지구화가 촉발한 “정치경제의 격렬한 구조개편 과정은 곧 문화의 격렬한 구조개편 과정과 일치”한다는 특징이 있다(Mitchell, 2000: 55). 문화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이 상호결정적 관계(Thompson, 1963; Williams, 1977)에 놓여있는 이유는 이념, 사회적 실천, 국가제도라는 상부구조와 경제기반이 상호작용하여 일상생활이 영속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문화전쟁의 관점은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인종, 성, 젠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펼쳐지는 문화의 구성 방식에도 주목하게 한다(정수진, 2015).
또 다른 관점은 ‘시간=공간의 압축과정’이다. 자본주의 확산과 세계화로 인해 세계의 모든 공간에 탈영토화가 되면서 공간의 불균등, 중층적인 편제, 장소의 고유성을 엮어내는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Shunya, 2000: 175- 176). 문화산업의 발달은 시간=공간의 압축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이며, 대표적으로 대중문화는 문화의 구축이 무한히 다양해 보이는 저항들로부터 조직화되고 문화구축이 단순히 하향식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Adorno & Adorno, 2001; Adorno & Horkheimer, 2007; Mitchell, 2000). 오히려 기술의 발전과 대중매체의 발달로 문화의 산업화가 생산자와 수용자 측면에서 더 빠르게 확산되는 과정을 통해 문화산업이 구축되었다(문현병, 2002).
권력이동의 관점에서 김문환(2004)은 정보․통신 혁명으로 국가의 상대적 쇠퇴와 비국가적 행동 주체의 등장을 촉진하는 요인을 1) 국내 사회의 구조적 변화, 2) 경제적 상호의존과 매체의 발달, 3) 이데올로기의 동요와 소프트파워의 등장, 4) 환경 파괴와 국경을 넘어선 생활공동체 의식, 5) 국제연합의 활성화와 NGO파워의 대두로 설명했다(김문환, 2004: 91). 이 중에서 소프트파워는 역설적이게도 국가가 실천적 차원에서 추진하는 공공외교정책의 전략적 토대로 활용되고 있어 21세기 대외관계에서 국가의 역할을 논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외교의 주체가 국가에서 비국가적 행위자로 확대되고, 타국민을 외교의 대상으로 하는 공공외교의 추진체계에서 국가중심, 민간중심, 혹은 민관파트너십 등의 다양한 거버넌스 양태(김기정, 2012)로 나눠볼 수 있겠지만, 김문환(2004: 97)이 미국의 사례를 통해 밝혔듯이 문화교류정책과 국제교류사업에서 가장 중추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연방정부인 점을 보면, 민제외교(people to people, interpeople diplomacy)적 성격을 지닌 외교활동에서 역시 국가의 역할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공공외교 선발국인 영국, 캐나다, 호주의 경우도 정부의 주도하에 외교정책의 기틀을 마련하고, 준정부기관 및 비국가행위자들이 중앙정부와 합목적성을 띠고 활동할 수 있도록 나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거대한 예산을 배정하여 공공외교를 추진해 왔다 (조기숙․김화정, 2020). 특히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자국의 문화에 더 방점을 두면서 소프트파워 강화를 위한 정책기조를 세우고 있고, 호주도 기존의 공공외교국을 소프트파워국으로 개편하면서 소프트파워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캐나다는 호주 문화외교의 성공적인 사례에 영향을 받아 북미문화외교이니셔티브(NACDI: The North American Cultural Diplomacy Initiative)를 가동하고, 문화소프트파워에 진력하고 있다. 이 점에서 문화선진국의 문화 ‘권위’를 지키기 위한 국가 단위의 ‘전략’이 수립되고 있으며,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소프트파워 개념은 문화에서의 국가의 역할(외교상의 이익과 국익 증진)을 더 강화해 준다고 보여진다.
1990년대 세계화․정보화․민주화에 직면하면서 국제정치학자들은 전통외교에서 중시하던 군사력과 경제력과 함께 지식과 문화에 기반을 둔 소프트파워 권력현상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전재성, 2009). 연성권력 혹은 매력을 뜻하는 소프트파워는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조세프 나이(Joseph Nye)가 고안한 개념으로 미국패권의 쇠퇴론에 대응해 문화․이념․지식․제도․정책 등 소프트파워 부문에서 미국이 여전히 월등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Nye, 1990). 소프트파워가 패권주의적인 이념에서 출발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실천가들은 급변하는 외교환경에서 외교의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주요한 토대로 소프트파워를 활용하고, 공공외교와 연계하여 외교활동을 수행해왔다. 실제가 이론에 영향을 미쳐 소프트파워 연구는 꾸준히 증가추세다.
나이(Nye, 2004)에 따르면 소프트파워는 제도를 통한 아젠다 설정, 가치, 문화, 제반정책을 통한 매력의 행동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차용성 파워(cooptive power-타국이 원하는 바를 구체화시키는 능력)로 매력적인 파워이다. 반면, 군사력과 경제력을 구성요소로 하는 하드파워는 보상, 매수를 통한 회유책이나 무력, 제재로 인한 강제적 행동 스펙트럼에서 작동하는 명령성 파워(command power)이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는 명령성-차용성의 행동스펙트럼 선상에서 상관성을 지니며 서로 간의 긍정적 상호작용으로 스마트파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Nye, 2004: 32-35). 소프트파워가 설득의 힘을 강조했다면, 스마트파워는 소프트파워와 함께 하드파워의 지원을 받아야 성립된다는 점에서 정책결정자와 공적인 영역에서 한층 더 ‘상품성’ 있는 개념이 되기도 했다(조윤영, 2009: 49).
21세기 소프트파워 권력현상은 커뮤니케이션의 세계정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프트파워는 권력의 관점에서 기술, 정보, 지식,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의 변수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국제정치에서 매력을 개념화했다. 예컨대, 머리의 힘(지식 기반 실력이 발산하는 매력), 포장의 힘(국가브랜드, 정책 및 지식공공외교), 마음의 힘, 제도의 힘, 규범의 힘, 지혜의 힘 등이 매력 개념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김상배, 2019: 34). 이 중에도 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하는 마음의 힘, 즉 매력으로 끄는 심력은 문화정치의 구조, 전략, 매커니즘에 있어 소프트파워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국제관계에서 지구적 상호의존성이 심화되고, 상이한 문화권으로 인한 갈등이 빈번해지면서 외교와 협상의 도구가 필요한 상황(조윤영, 2004: 53)에서 소프트파워 권력자원을 활용한 문화외교의 전략적 접근으로 갈등 당사자들과 중재 혹은 조정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국의 매력적인 대중문화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김상배, 2019: 38)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정치와 21세기 소프트파워 권력현상에 대한 문헌고찰에 기초해, 본 연구는 소프트파워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문화정치의 영역 개념화를 시도했다. 필자는 문화는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이익을 아우르는 사회적 권위라는 관점(Mulhern, 2000; 조윤영, 2004; 김명섭, 2016)을 견지하고, 문화가 국가의 정책적 이슈인 동시에 국가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틀에서 문화정치와 국가역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국가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확산과 세계화의 외재적 요인을 고려한 문화의 산업화와 기술과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한 상향식 문화구축은 21세기 문화정치 환경에 특징적인 면으로서 문화정치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나이(Nye, 2021)는 자신의 소프트파워 개념은 자유주의적 현실주의론(liberal realist)에 기초한다고 했다.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행위를 권력(power)으로 보는 기본적인 관점도 여기에 기인한다. 권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소프트파워를 해석하는 시각도 다를 수 있고 비판적일 수 있다. 일례로, 헤이든(Craig Hayden, 2012)은 소프트파워는 권력의 실체를 측정할 수 없는 수사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헤이든이 구성주의론자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소프트파워를 분석했기 때문에, 이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건설적 비판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의 소프트파워 개념은 국가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 용하다. 다만, 나이가 연성권력의 권력자원으로 상당히 폭넓게 제시한 (자유주의레짐과 사회주의레짐의 이분법으로 구분 짓는) 가치와 지나치게 제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주로 일국의 대중문화의 영향력에 국한하는) 문화에 대해서는 개념적 토대와 구체화가 필요하다.
필자는 앞서 살펴본 개인정체성-국가정체성-국가이익의 연관성을 개념화한 정체성 담론이 설득력을 지닌다고 본다. 정체성은 일국의 가치체계와 문화정치에 골간이 되기 때문에 나이의 가치와 문화에 대한 개념을 보충할 수 있다. 국가정체성에 기반한 소프트권력자원은 언어, 민족, 전통문화 등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권력자원들이 매력으로 끄는 힘을 발휘하여 국가행동으로 이어질 때, 소프트파워를 통한 국가이익추구와 국가생존전략이 문화정치가 다루어야 하는 독립적인 영역이 될 수 있다.
주권국가 체제하의 국가역할은 퍼트남(Rober D. Putnam, 1988)의 국내협상과 국제협상의 차원을 개념화한 투-레벨 게임(two-level game) 이론에 근거하여 국내적 차원(국내정치)과 국제적 차원(국제정치)으로 나눠볼 수 있다. 각 차원에서 나이가 주장한 하드파워/소프트파워 구분법을 적용하면, 국내적 차원의 국가역할은 권력자원 생산․발굴․발전, 국제적 차원에서는 국가행동과 대외전략을 대입해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국내차원-하드파워, 국내차원-소프트파워, 국제차원-하드파워, 국내차원-소프트파워로 분류할 수 있다. 네 개로 구분된 각 영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문화정치에서 국내적 차원의 하드파워 영역은 경제력과 연관된다. 자본주의 확산과 세계화에 대응한 문화의 산업화가 핵심축을 이루며, 국가는 국내차원에서 하드파워 권력자원을 생산․발굴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국가의 경쟁력을 도모한다. 국가가 문화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과 실행을 통해 국내의 대중문화, 문화예술, 창조산업 등을 지원하고 육성해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국의 경제력을 강화하게 된다.
둘째, 국내적 차원의 소프트파워 영역에서 문화정치는 소프트권력자원의 토대가 되는 정체성을 다룬다. 국가정체성은 개인의 정체성과 국익을 연결하며, 대외적인 국가행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국내차원의 소프트권력자원 생산․발굴․발전에 기여한다. 국가정체성 권력자원은 국가생존전략과 국내정책의 주요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특히, 국가의 역할은 국가의 정체성과 연계되는 언어, 민족, 역사적 전통에 기인한 문화 등을 함양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프트파워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자원이 진화한다.
셋째, 국제적 차원의 하드파워 영역으로 범주를 확대하면, 문화정치영역은 국제정 치에서 일어나는 권력정치 혹은 상위정치, 지정학을 둘러싼 일국의 국가이익추구와 국가생존전략의 선상에 놓인다. 급속한 지구화의 영향, 세계정치의 구조, 타국가와의 상호작용 등 다양한 외재적 요인이 국제적 하드파워 문화정치영역에서의 국가역할에 영향을 미친다. 하드파워 영역은 국내차원의 문화산업이 국가의 범주 밖으로 확장되어 국가가 세계문화교역의 장에서 양자무역 혹은 다자무역의 형태로 무역통상의 경제적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이를 통해 국가는 경제력에 기반한 강제적 행동이 가능한 명령성 파워를 기를 수 있다.
넷째, 국제적 차원의 소프트파워 문화정치영역은 국가가 발산하는 매력이나 심력과 관계가 있다. 국가는 타국/타국민을 끄는 힘, 즉 매력을 발휘하여 궁극적으로는 국가이익을 제고할 수 있다. 한 국가의 매력과 심력은 국제정치에서 설득과 협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술과 대중매체의 발달로 공중3의 권력과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문화구축이 점증하는 양상을 띤다. 국가는 타국의 공중이 수용할 수 있는 문화영향력을 발휘하여 타국이 원하는 바를 구체화시키는 차용성 파워를 행사할 수 있다.
요약하면, 21세기 소프트파워 권력현상을 반영한 문화정치에서 국가의 역할이 요구되는 영역은 ‘문화산업’, ‘국가정체성’, ‘문화교역’, ‘문화영향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헌연구를 통해 도출된 네 영역을 [그림 1]과 같이 도식화하여 개념적 모델로 제시한 다. 다음 장에서는 이 모델을 재검토하기 위한 질적 탐구로 문화소프트파워가 높은 국가를 대상으로 실제 사례를 다루겠다.
Ⅲ. 사례분석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문화정치와 국가역할을 분석하기 위한 국가로 소프트파워30인덱스의 평가에 근거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을 선정했다. 소프트파워30인덱스는 전 세계국가의 기업/산업, 문화, 디지털, 참여, 교육을 평가하여 소프트파워가 높은 30위권의 국가를 순위별로 발표하는 지표이다. 여섯가지 평가항목은 70%의 객관적인 데이터와 30%의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측정된다. 소프트파워30인덱스가 발표되기 시작한 2015년부터 본 연구를 위한 설문조사가 이루어진 2018년까지 문화부문만 따로 집계하여 세계 10위권 내에 든 국가를 정리해 보면 <표 1>과 같다. 1위 미국, 2위 영국, 3위 프랑스, 4위 독일로 네 국가가 문화연성권력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와 스페인도 세계 랭킹 5위권에 들기는 하지만, 본 연구에서는 순위의 변동 없이 부동의 문화권력을 보이는 1위부터 4위까지의 국가를 분석대상으로 한다.
년도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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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호주 | 스페인 | 캐나다 | 이탈리아 | 중국 | 벨기에 |
2016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호주 | 스페인 | 이탈리아 | 캐나다 | 중국 | 일본 |
2017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호주 | 스페인 | 이탈리아 | 중국 | 캐나다 | 일본 |
2018 |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스페인 | 네덜란드 | 호주 | 벨기에 | 중국 | 이탈리아 |
본 연구의 분석틀은 앞서 문헌연구를 통해 도출한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문화정치와 국가역할에 대한 개념적 모델에 기초한다 ([그림 1]). 첫째, 국내차원-하드파워 영역인 ‘문화산업’은 국가경쟁력을 도모하기 위한 국가역할에 해당한다. 이 영역은 국가의 대외적 행동의 경성권력자원으로 활용된다. 문화산업 영역에서는 국가가 국내의 대중문화, 문화예술, 창조산업 등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공공행정을 통해 지원․육성함으로써 자국의 경제력을 강화하는지 여부를 분석한다. 둘째, 국내차원-소프트파워 영역인 ‘국가정체성’은 국익추구와 국가생존전략의 기초가 된다. 이 영역 또한 일국의 대외활동을 위한 연성권력자원이 된다. 이 영역에서는 국가가 자국의 언어, 민족, (역사적 전통) 문화와 관련된 정체성을 함양하여 국가의 비물질적 소프트파워 권력자원을 생산․발굴․발전시키는지 여부를 다룬다. 셋째, 국제차원-하드파워 영역은 국제정치에서 일국의 강제적 행동 및 명령성 파워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교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국가가 세계문화교역의 장에서 양자무역, 다자무역을 활성화하여 자국의 무역통상 발전에 기여하는지 여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국제차원-소프트파워 영역의 ‘문화영향력’은 국제정치에서 일국의 차용성 파워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영역에서는 국가가 국제관계에서 문화영향력을 행사하여 국가의 매력/심력을 발휘하거나, 국익을 제고하는지 여부를 분석한다(<표 2>).
[그림 1]을 바탕으로 저자 구성.
측정도구로는 구조화된 질문지를 사용하였다. 설문지의 문항 구성은 국내적 차원의 하드파워적 속성(문화산업, 대중문화, 문화예술, 창조산업, 공공행정, 국내경제력)에 대한 6문항, 소프트파워적 속성(국가정체성, 언어, 민족, 전통적 문화, 소프트파워 권력자원)에 대한 5문항, 국제적 차원의 하드파워적 속성(세계문화교역, 양자무역, 다자무역, 무역통상)에 대한 4문항, 소프트파워적 속성(문화영향력, 국가의 매력/심력, 국익)에 대한 3문항으로 총 18문항으로 구성하였다. 또한, 각 문항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심층 인터뷰하여 연구의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대한민국 주재 외국공관, 문화원에서 근무하는 본국에서 파견 나와 있거나, 한국에서 주최한 유네스코 국제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했던 각국의 공행정주체를 대상으로 했으며, 2018년 3월부터 2019년 3월까지 대면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문화원이 존재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경우 10년 이상의 경력자를 섭외할 수 있었으나, 문화원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은 3년˜5년 경력자를 섭외하여 총 16인을 인터뷰했다. (<표 3> 참조)
영어권 국가 2개국과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2개국의 서로 다른 언어를 고려하여 세계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했다. 본 연구자가 직접 영어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심층인터뷰 내용을 문서화했으며, 연구자의 메모를 참고하여 재해석의 과정을 거쳤다.
네 국가 모두 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중앙정부가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고, 공공행정을 통해 자국의 문화산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데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20세기 중후반부터 ‘문화’에 대한 개념과 담론이 ‘고급문화/저급문화’에서 ‘대중문화’, ‘상업예술’, ‘문화의 민주화’, ‘문화민주주의’, ‘창조성’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고급문화(순수예술분야)에 국한되었던 국가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특히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영향으로 문화의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이 중요해지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문화산업이 정부의 주요 정책 기조로 떠올랐다. 21세기에는 정보화 기술혁명의 가속화와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디지털경제의 중요성이 배가되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는 디지털산업을 문화산업정책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문화산업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의 문화산업은 엔터테인먼트산업(entertainment industry)으로 대중문화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미디어 분야까지도 포괄적으로 아우른다.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음반, 인터넷, 게임, 잡지출판, 신문출판, 서적출판, 정보서비스, 광고, 놀이공원, 스포츠 등의 세부분야가 있고, 미국의 기업들은 각 세부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국무부14). 지난 40년간의 미국 국내 산업에서 서비스 분야와 지식경제분야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고, 지식기반 경제, 무중량경제(weightless economy5), 디지털시대 4차 산업혁명(Industry 4.0)경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국무부2). 지식이 경제성장의 추동요인으로 작동하고 있고, 지식 자체는 생산과정에서 투입됨과 동시에 산출/혁신이 된다(국무부2). 이 때문에 미국이 창조경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조분야 종사자들의 투입이 곧 경제적 산출이 된다는 점과 양질의 상상력 및 사회문화적 가치 중심의 경제전반에 창조성을 독려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다(국무부2).
문화의 산업화는 영국이 가장 앞선다. 영국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을 1990년대 후반부터 추진했으며, 근래에는 창조산업이 영국의 중점산업이던 금융서비스보다 두 배 이상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더욱 끌어올리면서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영국문화원1). 현재 국내에서 지식 집약적(knowledge-intensive) 산업군이 각광을 받고 있고, 폴란드의 CD PROJEKT(글로벌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의 플레이어)의 성공사례6처럼 세계시장에서 활동하는 국내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영국문화원1, 2). 창조성을 지원할 수 있는 공공정책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고, 창조산업의 상위개념인 창조경제의 관점에서 산업간 연계효과, 비창조적 분야의 종사자들과의 협력, 지방정부의 역할 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영국문화원1). 창조는 인지영역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하고, 지식 집약적이라는 특징 때문에 불균형하게 확산될 수 있어, 창조경제에 대한 전략적 경제정책입안과 디지털환경에 대응한 기술기반 국가시스템 개발이 요구되고 있다(영국문화원2).
프랑스는 국내의 문화창조산업(CCI: Cultural and Creative Industries) 정책에서 자국의 문화상품과 서비스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20세기 후반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노력에서 보여지듯, 프랑스는 대중은 단순히 문화의 수용자가 아닌 문화예술분야의 행위자임을 인식하고, 자국의 문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국내 문화산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대사관 문화담당관, 문화원). 프랑스의 문화산업은 공예, 디지털 예술, 라이프스타일, 패션, 비디오 게임, 디자인, 건축, 출판, 영화, 영상예술, 라이브 공연(live performance) 등 창조성을 대표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창작자들의 가시성(visibility)을 중시하고,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도록 이질적인 분야 간의 협력을 촉진하여 창조적 시너지를 내고 있다(대사관 문화담당관). 최근 프랑스는 디지털 기술을 전략적 우선순위로 두고 문화공유, 문화 자체로의 목적, 창조적 도구로서의 디지털 적용을 위해 정부가 수년간 공공정책을 펼쳐왔다(알리앙세프랑세즈). 비디오게임, 화자형식의 새로운 음향․영상, 증강현실, 혁신적인 도서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를 ‘디지털 예술가’로 구분하고, 이들의 활동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한다(알리앙세프랑세즈).
독일의 문화창조산업(Cultural and Creative Industry)은 영화제작자, 시각예술 공연예술, 건축, 디자이너, 컴퓨터 게임 개발자 등을 아우르며, 이들은 양질의 문화, 문화적 다양성, 창조적 재개발 등을 대표함과 동시에 빠르게 성장하는 창조적인 지식기반 경제를 이끈다(ifa1). 문화창조산업 분야가 세계경제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더 많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ifa2). 연방경제에너지부처와 연방정부문화미디어정부조직의 협력 하에 지난 2007년부터 문화창조산업 이니셔티브를 추진해서 소규모이지만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창조성이 뛰어난 비즈니스 업체들과 프리랜서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다(ifa2). 2018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문화창조산업 분야 고용자 수 증가로 사회적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지난 10여 년간 이 분야에서 20만개의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었다(ifa2). 독일 국내 산업별 성장을 보면, 1-2위가 근소한 차이로 자동차와 기술엔지니어링 산업분야이고, 3위 문화창조산업, 4위 화학산업, 5위 에너지산업이다(ifa2). 문화창조산업은 국내산업에서 매우 비중있는 핵심 산업 분야로 간주되고 있다.
네 국가에서 모두 거론된 디지털시대 문화산업과 창조경제의 중요성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급속한 기술환경의 변화에 따른 지구화에 기인하고, 이전의 고급문화와 예술지원이 지배적이었던 문화산업분야를 광범위하고 실용적인 분야로 확장하는 현상을 낳았다. 디지털 플랫폼과 데이터, 디지털 컨텐츠 개발과 관련된 디지털산업 분야로의 확장시도가 두드러진다(ifa1). 각국은 새로운 문화정책과 대응전략이 제시하고, 창조적 활동들의 아이디어와 영향력을 문화교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문화산업이 낳는 경제적 하드파워는 국내차원과 국제차원이 긴밀하게 연동이 된다. 특히 영국과 미국은 2008년에 열렸던 UN 무역개발회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영국문화원1, 국무부2). 당시 회의에서 창조경제, 창조산업, 문화산업 등이 거론되면서 지구화시대 경쟁우위 촉진과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주요 원천으로 창조성이 강조되었고, 이에 따른 정부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문화산업이 문화정책의 주요 의제가 되었다.
문화분야 소프트파워 세계 4위권 중 세 국가는 모두 유럽권이다. 영국의 유럽이탈이 진행되면서 영국은 자국의 정체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긴 하지만, 그간 유럽연합의 주요 회원국으로서 구축된 유러피언 정체성을 완전히 탈피한다고 보기 어렵다(외무성, 영국문화원3). 세 국가는 ‘유럽의 유럽화’를 추구하고, 유러피언 정체성에서 더 나아가 세계시민 정체성을 지향한다(ifa3). 민족국가 단위의 정체성을 지양하는 데에는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리더인 독일의 역할이 크다고 보여진다. 소프트파워 관점에서의 문화정치 영역([그림1])에서 도출된 국내차원-소프트파워의 언어, 민족,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국가정체성은 다양성과 인류 보편적 가치중심의 세계시민정체성 추구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국민국가 틀에서의 국익추구와 국가생존전략보다는 지구적 맥락에서의 공존과 지속을 위한 국가행동으로 변화하고 있는 양태를 보인다.
독일의 코스모폴리타니즘 어원(weltbürgerliche)은 사회적 환경에서 사람 간의 차별적 거리에 대한 비판적/철학적 시각을 내포하고 있으며, 코스코폴리타니즘은 평화적 공존의 기초가 되는 국가성 배제와 세계시민의식의 기초가 된다. 독일은 세계시민 정체성 추구를 위해 평화의 문화를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지구적 공공영역(global public space)’에서 상이한 문화 간 대화와 상호이해, 인권증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ifa3). 슈타인마이어(Frank-Walter Steinmeier) 전외무부장관이 강조한 ‘문화적 지성(cultural intelligence)’은 국가의 일원이 배타적 민족주의나 국익추구에 함몰되지 않고,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민족/국가정체성을 형성하여 지구적 일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문화적 지성은 관용과 대화, 그리고 평화를 가능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독일정부는 타문화에 대한 이해능력, 공감력, 아이디어 교류와 지구적 도전에 대한 초국가적 협력을 지향하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연대의식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문화간 대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미래의 주역인 청년을 대상으로 한 세계시민교육에 주력하고 있다(ifa3).
프랑스가 캐나다와 연대하여 성공리에 이끌어낸 UNESCO 문화다양성 협약(2005)은 프랑스의 대도시 외곽(the banlieues)의 용광로(melting pot) 개념을 근간으로 하며, 주변지역과 다문화 이웃과의 하이브리드 혼합을 지향하는 개방과 관용의 가치가 내재해 있다(외교유럽부).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는 사회적 문화적 개방성과 세계시민의식에 방점을 두고 있다. 국민이 정치적 의지공동체로서 국가정체성에 대한 헌신을 하듯이 보편적 세계시민주의 의식의 감정적 부분인 소속감을 특히 강조한다. 더 넓은 공동체와 보편적 인류로의 소속감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호의존성과 지역차원, 국가차원, 지구적 차원의 사이에 상호연결성을 강화한다(외교유럽부). 프랑스는 인류애를 모두가 함께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지구적 책임감으로 여기고, 세계시민교육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프랑스가 UNESCO에서 문화적 다양성(2005)과 세계시민교육(2015)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갈등과 분쟁 극복에 기여하려는 국가 차원의 의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영국은 유럽연합이탈(Brexit)로 유럽정체성보다 자국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유럽연합 잔류 여부에 대한 국내 정치화와 국민투표 결과, 잔류지지와 탈퇴지지의 근소한 차이에서 나타났듯이 유럽의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외무성). 이미 1960년대부터 영국정부는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을 준비해왔고, 인종적 다양성, 문화적 이질성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어왔다(영국문화원4). 영국사회의 다양성 증대는 진보당과 보수당의 문화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다양성’과 ‘우수성’이라는 정치적 가치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영국문화원4). 하지만 영국의 국가 정체성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영국은 자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인류 공통의 이익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영연방국가연합(The 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승화시켜 독립된 주권국가 간의 자발적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국의 언어, 문화, 전통이 영연방 구성원국가 외에도 많은 국가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이 크다(외무성2). 따라서 유럽이탈 이후의 영국은 자국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보다 인류보편적 가치와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지구화 속에서의 영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찾고 있다(영국문화원4).
마지막으로 미국은 대표적인 이민국가로서 다문화의 중요성이 이미 자국이 내세우는 가치에 내재되어 있고, 다민족․다문화가 국가를 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국무부2). 흔히 미국의 정체성을 용광로 혹은 모자이크로 설명하는데, 사실상 미국은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추구할 뿐, 단일한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공공문화는 공동체의 지속성과 특수성을 유지하고, 각 공동체가 역사와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과 유산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정책입안자들은 공공문화에 대한 정책적 지원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중시여긴다(국무부2). 유럽국가들의 세계시민 정체성을 추구와 미국의 다민족․다문화 가치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두 가지 접근법 모두 인류보펀적 가치에 기반한 메타소프트파워를 지향한다는 데에 맥을 같이 한다.
국내차원의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의 문화정치영역에서 발견된 새로운 영역은 사회응집력과 회복력이 중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경제적 하드파워 성격을 지니는 문화산업이나 가치 지향성의 소프트파워적인 정체성과는 이질적이다. 네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된 국내 현상은 불확실성 증폭과 사회 불안정이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대항한 911테러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세계적 확산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는 국내의 포퓰리즘 등장, 극우 정당의 득세, 이슬람 혐오 등의 현상을 낳았다. 사회적 불안 현상은 2010년대 중후반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유럽국가에서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대표적 현상들로는 중산계급 붕괴와 노동계급의 불평등으로 인한 마크롱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 노란 조끼 운동이 주변국가에도 확산되는 양상(외교유럽부), 난민유입 무슬림 난민의 사회적 범죄와 이에 반하는 이슬람 증오범죄 증가 추세(외무성), 독일 대안당(AfD: Alternative fur Deutschland) 극우 포퓰리즘 득세(ifa3)이다. 여기에 지난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우선주의 정책기조까지 더해져서 민족주의의 여파가 유럽권 국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ifa 3).
각국의 국내 문화정치에서 주요한 의제는 사회 안정과 위기 대응이다. 이를 위해 사회응집력과 회복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외로움부처(Department of Loneliness)를 2018년에 신설하고, 세계 최초로 국가가 국민의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영국문화원3). 고독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질병, 나아가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국민의 정신적 건강을 다스려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는 새로운 문화정치의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이질적인 문화 간의 대화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연방정부 차원에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으며(ifa3), 프랑스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정책적 타협안 마련과 실업 및 고용안정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외교유럽부). 이와 같은 사회응집력과 회복력을 위한 문화정치영역은 국가구성원의 정신과 연계되는 메타소프트파워의 영역임과 동시에 실업 문제 해결 등의 경제적 하드파워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국내차원의 하드파워에서 디지털산업이 중요하게 거론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네 국가 모두 기존의 양자무역, 다자무역과 디지털통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WTO에서 미국, EU, 일본 등 디지털통상 분야에서의 국제규범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KOTRA 2020). 미국은 디지털경제 전환과 무역환경의 변화에 대응해 국가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미중통상분쟁과 같은 충돌을 완화하기 위한 통상전략을 수립하고 있다(국무부2). 독일은 지난 2010년 중반부터 4차 산업혁명을 주창하기 시작했고, 제조업과 디지털 기술을 통합한 소위 스마트 제조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2010년 후반부터 디지털 통상외교 이슈에 대한 유럽연합 차원의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괴테문화원, 대사관 문화담당관). 프랑스는 디지털세를 도입하면서 통상전략을 구체화하면서 미국과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으며(외교유럽부, 대사관 문화담당관), 영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디지털 통상 네트워크를 론칭하여 자국의 디지털 기술 전문성을 확대하여 무역 투자 기회를 도모하고 있다(외무성). 디지털 무역대응이 주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UN의 지속발전가능목표(SDG: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선진국들에게도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다. 4개국에서 모두 거론된 사항은 2030 지속가능발전 의제(ASD: Agenda for Sustainable Development)7와 창조산업영역의 이니셔티브이다. 창조분야는 국가의 발전과 성장 전략의 일부분으로 역동적인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촉진하고, 국가 경제를 재활성화한다. 문화, 사회적 자본, 창조산업에 투자하는 것은 사회공동체의 전반적인 발전에 기여하고, 개인의 자존감, 삶의 질, 소통과 사회 응집력에 도움을 준다. 지속가능성은 자원을 착취하여 미래세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바꾸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해결법으로 경제성장과 인간의 욕구를 충족해 나가느냐의 문제이다. 창조산업은 환경적․생태학적 함의를 고려하면서 경제적 목적으로 전통적인 지식을 수요자에게 연결하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성은 문화적 창조산업의 지속발전가능한 패러다임의 동일선상에서 창조적인 기술, 다양한 분야 간의 협력, 기업가정신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도록 한다. 디지털화는 이러한 지향점들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따라 4개국은 문화와 창조경제의 성장을 도모하는 포괄적인 발전과 국제협력에 주력하고, 특히 중앙정부는 지방정부 혹은 민간영역의 기업과의 공동자금조달을 위한 정책적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대외문화정책에서 새롭게 추진하고 있는 ‘시청각 공보관(Audiovisual attachés)’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프랑스의 창조적인 능력을 알리고 해외전문가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알리앙세프랑세즈). 현재 30여 명의 시청각공보관들이 프랑스의 영화, 비디오게임, 음악, 가상현실 등 디지털문화산업분야를 알리기 위해 전 세계 92개국에서 활동하면서 자국의 디지털 미디어산업의 해외확산에 진력하고 있다.
21세기의 지구화와 디지털기술발전에 따른 국가 간의 상호의존성과 초연결성 때문에 일국의 대중은 타국의 일방적인 문화영향력을 받는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닌 쌍방향 소통의 능동적인 상대이자 자국의 능동적인 외교행위자이기도 하다. 문화영향력은 20세기의 산물로 국민적․민족적 권리가 중요하던 시기에 매력으로 끄는 힘이었다고 할 수 있고, 21세기는 신뢰구축을 통한 국제평판이 국제차원-소프트파워 영역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타국 대중이나 초국가적 행위자 등을 모두 아우르는 세계시민으로부터의 긍정적인 평판을 얻기 위해 4개국 공공기관 종사자들은 신뢰구축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쌍방향 대화를 촉진하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유의 가치를 추구해왔고,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노선에도 세계평화를 도모하는 근본적인 공공외교정책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국무부1). 미국의 20세기 공공외교는 사회주의 프로파간다와 차별되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상업적 대중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문화제국주의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20세기 후반 대두되기 시작한 미국 쇠퇴론과 911테러 이후 미국의 공공외교는 국제사회와 세계시민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는 그의 국제외교정책 기조가 국제정치에서 UN을 중심으로 한 다자외교의 중요성을 강조시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화할 수 있는 국제환경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다(국무부1). 이는 21세기 미국 공공외교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로 WHO, UNESCO 등 국제기구탈퇴와 지원중단으로 국제질서를 흔들어 놓고 동맹국들과의 신뢰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국무부의 교육문화국은 타국 대중과의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대사관 문화담당관).
국제평판의 중요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브랜드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을 비롯한 캐나다, 호주와 같은 공공외교 선발국들이다. 영국은 타국국민, 글로벌 시민들이 자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국과 이해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중립적인 단체가 측정한 국가브랜드순위(Nation Brand Index), 좋은국가순위(Good Country Index), 소프트파워 30위 국가(Soft Power 30 Index) 등의 자국에 대한 평가 결과를 외교정책 기획과정에 반영하거나 근거자료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외무성). 긍정적인 국제평판과 신뢰 구축은 자국의 대외활동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은 2006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당신이 독일인(Du bist Deutschland)’ 이라는 대내적인 캠페인을 벌여 국민의 자부심을 독려하고, 대외적으로 국가의 명성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괴테문화원).
프랑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영연방국가들이 중심축인 앵글로색슨족의 세계적 영향력(Anglophone World)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언어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의 국제기구인 프랑코포니(Francophonie)를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프랑스의 문화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외교유럽부). 20세기 후반 미국 헤게모니의 지속과 함께 미국 대중문화산업의 전 세계적 확산으로 인한 미국화(Americanization) 현상을 저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프랑스정부는 1993년 관세무역일반혁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에서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 문화상품에 대해서만은 협정대상에서 예외로 할 것을 제기하기도 했다. 프랑스도 영국이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호의적인 국제평판 구축을 위한 국가브랜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에펠탑 120주년 기념 관광브랜드를 ‘프랑스에서의 만남(Rendez vous en france)’이라는 슬로건으로 다시 구성하여 2009년부터 브랜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외교유럽부). 외교유럽부 산하조직 프랑스문화원(Institut Français)을 중심으로 체계화된 프랑스 문화외교는 문화영향력 추구에서 문화다양성과 가치를 더 중시하고 있다(외교유럽부). 또한, 문화외교 실행체계 면에서 국가역할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프랑스문화해외네트워크(French cultural network abroad)는 프랑스정부의 중앙집권적인 거버넌스 체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정부가 직접 나서서 디지털화(digitalization)과 전문적 기술 지원 등 국가의 대외정책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앞장 서고 있다.
국제적 차원에서 소프트파워-하드파워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새로운 영역인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화간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국가는 상호호혜적인 문화교류를 수행하며, 상호 간의 이해 증진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뢰구축을 통한 국제평판이나 문화상품과 서비스 무역의 영역인 문화교역과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주목할 점은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이 국내차원-하드파워의 문화산업에서 다루는 하드파워 기술력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한 국가의 디지털 기술혁명과 관련된 기초적인 시설과 시스템이 얼마나 잘 구축되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타국에 발신하는 자국의 문화컨텐츠를 통한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이해의 정도가 전통적으로 이루어지던 오프라인 문화교류의 효과성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문화간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이해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상호성에 기초한 관계구축이라는 점에서 소프트파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Ⅳ. 21세기의 문화정치영역과 이론적․정책적 함의
본 연구는 21세기 소프트파워 권력현상을 반영한 문화정치에서 국가의 역할 영역을 탐구했다. 문헌고찰을 통해서 국내차원-하드파워 측면의 ‘문화산업’, 국내차원-소프트파워에서 ‘국가정체성’, 국제차원-하드파워의 ‘문화교역’, 국제차원-소프트파워에서 ‘문화영향력’을 국가가 다루는 문화정치 영역으로 개념화했다. 소프트파워30인덱스의 문화부문에 세계 랭킹 4위권에 지속적으로 진입해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을 사례 국가로 선정하여 총 1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그림 2]와 같이, 문화정치의 네 가지 영역 중에 ‘문화산업’과 ‘문화교역’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교역과 문화산업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도전에 대한 대응력이 중요해졌음을 반증했다. 국제문화교역에서는 양자․다자 무역뿐만 아니라, 디지털통상이 추가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 문화산업은 기존의 대중문화, 문화예술산업, 창조산업과 더불어 디지털 플랫폼과 데이터, 디지털 컨텐츠 개발과 관련된 디지털산업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문화교역과 문화산업에서 경제적 하드파워에 미치는 디지털 경쟁력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현실이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프트파워 측면에서의 결과는 문헌연구를 통한 개념적 모델과 사례분석결과가 상 이했다. 국내적 차원에서 언어, 민족, 전통문화에 기초한 ‘국가정체성’은 다양성, 가치 중심의 지구화 시민을 강조하는 ‘세계시민 정체성’으로 진화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다문화 존중, 서로 간의 공유된 가치 등이 정체성 담론에서 매우 중요했다. 국제적 차원에서 역시 다른 결과가 도출됐다. 매력을 발신하여 국가이익에 기여하는 ‘문화영향력’은 문화선진국들이 지향점으로 추구하는 영역이 더이상 아니다. 문화선진국들은 신뢰구축을 통한 국익도모를 중시하고, 이를 위해 ‘국제평판’을 주요 영역으로 다룬다. 본 연구는 네 개의 영역 검증 및 각 영역의 구성요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소프트파워-하드파워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새로운 두 영역이 존재함을 발견했다.
우선, 국내차원에서 세계시민 정체성이나 문화산업과는 구분되는 영역이 존재했다. 불확실성 증폭으로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과 사회 안정의 위기 대응이 요구되면서 네 국가 모두 사회 응집력과 회복력을 중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태를 설명하기 위해 필자는 Keyes (1998)의 ‘사회적 웰빙’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사회적 웰빙이란 개인의 웰빙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소들을 일컫는 개념인데, 문화선진국들은 사회 응집력과 회복력을 강화하여 궁극적으로 각 사회 구성원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책 의도를 지니기 때문에, 본 연구는 이 영역을 사회적 웰빙에 해당한다고 본다. 사회적 웰빙은 경제적 하드파워와 사회 안정이라는 소프트파워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국제차원에서는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이다. 일방향적인 문화전파에서 벗어나 쌍방향의 문화교류를 지향한다. 상호 간의 이해 증진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호성을 바탕으로 한다. 문화컨텐츠를 활용한 타국의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디지털 혁명 시대에 따라 진화하고 있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과 문화컨텐츠의 디지털화 등이 선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국의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은 디지털 기술력 하드파워와 문화컨텐츠를 활용한 소프트파워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효과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이 영역도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동시에 존재하는 양가적인 성격을 띤다.
살펴본 바와 같이, 문화연성권력국가의 정부는 국내외 안팎의 다양한 문화영역에서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 비국가행위자의 등장과 권력분산으로 인한 정부역할의 축소가 예측되기도 하지만,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는 문화정치의 실천적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 본 연구의 이론적 함의는 정치외교환경의 변화에 따라 국가는 지향점을 달리하게 되고, 공공재/공공정책이 필요한 영역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며 도태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21세기 문화정치는 이와 같은 끊임없는 환경변화에 적응과 조정의 과정이며, 국가는 변화와 진화의 연속선상에서 선제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네 국가의 문화정치영역은 문화영향력→국제평판, 국가정체성→세계시민정체성으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고, 정부가 경제력 하드파워도 문화정치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문화선진국들은 문화산업과 국제문화교역에 디지털을 추가하여 급속하게 변화하는 문화정치 환경에 대응하고 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중간성격에 해당하는 ‘사회적 웰빙’과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은 문화정치의 새로운 영역으로 대두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인터뷰 대상자로부터 자유주의 체제하에서의 세계안보질서가 언급되어 문화정치 영역에 안보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부 있었고, 프랑스와 독일 분석에서 유럽연합군과 미국 주도의 패권주의 세계질서에의 힘의 균형에 대한 내용이 거론되었다. 몇몇은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에서 간접적으로 이미 안보영역을 다루고 있다고 하여, 문화정치 영역으로서의 군사력 하드파워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국의 정책사례 분석을 추가하여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문화세계정치 변환의 맥락에서 국가별 차별화된 국가역할에 대한 후속연구가 요구된다.
본 연구의 정책적 함의는 정부는 소프트파워 차원의 문화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하드파워적 문화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정치 환경변화에 따른 정부의 공공재 생산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에, 21세기 문화정치에서 소프트파워-하드파워의 전 영역에 걸친 정부의 주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