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Cultural Policy
Korea Culture & Tourism Institute
Article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의 생태와 생태관광 연구

강판권1
Pan-Kwon Kang1
1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주저자
1Professor, Dept. of History, KeiMyung University

© Copyright 2022 Korea Culture & Tourism Institute .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Feb 13, 2022; Revised: Mar 07, 2022; Accepted: Apr 08, 2022

Published Online: Apr 30, 2022

국문초록

본 논문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홉 서원 중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대한 생태적 분석을 통한 생태관광의 개선 방안을 위한 연구이다. 소수서원에 대한 생태적 분석은 다른 여덟 세계문화유산 서원은 물론 우리나라 서원 전체의 생태적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원의 생태적 연구는 서원의 자연생태를 중심으로 인문생태를 동시에 분석한다는 뜻이다. 자연생태 중에서도 서원의 상징나무는 서원의 인문생태와 가치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다.

소수서원의 두 그루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의 문화변용이고, 두 그루를 심은 것은 암수딴그루인 은행나무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소수서원의 느티나무는 학자수인 회화나무의 문화변용이다. 소수서원의 상징나무에 대한 문화변용 사례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우리나라만의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소수서원에는 경렴정과 탁영지, 제월교와 광풍정 등 중국 북송대의 주돈이와 관련한 문화재가 많다. 소수서원에서 주돈이를 강조한 이유는 그가 성리학의 기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탁영지에 연꽃을 심지 않고 수련을 심은 것은 주돈이의 사상을 훼손함과 동시에 소수서원의 세계적인 문화 가치를 폄하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소수서원의 생태적 분석이 중요한 이유는 서원의 사료를 생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배경 중 하나는 서원 관련 기록이다. 그러나 아직 서원의 상징나무를 비롯한 자연생태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원의 나무에 대한 기록과 보존은 우리나라 수목(樹木)문화를 한 단계 높이는 데도 크기 기여할 뿐 아니라 서원의 콘텐츠 개발에도 적잖은 도움을 줄 것이다.

Abstract

This study analyzed Sosu-seowon, one of the nine Korean Seowon, declared by the World Heritage Center and UNESCO as the first private and ecological Neo-Confucian Academy. The ecological analysis of Sosu-seowon is not only applicable for the other eight Korean Seowons declared as a World Heritage but all Seowons in Korea. That is, the ecological study about Seowons analyzes natural ecology and human ecology simultaneously. Especially, the symbolic tree in natural ecology is essential for understanding human ecology and its value; however, it is not dealt with in the previous studies.

Two Ginkgo biloba is acculturation of Haengdan. It is the place where Confucius taught his disciples. Moreover, the two trees consider that Ginkgo biloba is dioecism. Zelkova in Sosu-sewon is acculturation of pagoda tree. The case of the acculturation of the symbolic tree in Sosu-seowon is noteworthy because it created Korean culture while accommodating Chinese culture.

Gyeong-ryeom-jeong, Tak-yeong-ji, Jewolgyo Bridge and Gwang-pung-jung are related to Chou, Tun-I in North Sung Dynasty. The first Seowon emphasized Chou, Tun-I’s ideas because he provided the basic concept of Neo-Confucianism. However, this study pointed out the problem that there are Nymphaea and not lotuses in Tak-yeong-ji. It damages not only his ideas but the value of Sosu-seowon.

Furthermore, it is critical to collect historical records of Seowon. One of the reasons UNESCO decided to inscribe Korean Seowons as World Heritage is that there are numerous historical records about them. However, this study aims to record the symbolic trees in Seowons. A few records exist about Ginkgo biloba as the symbolic tree in Sosu-seowon. This study suggested that there remains a need to record and preserve trees in Korean Seowon such as Ginkgo biloba, Korean red pine, Prunus yedoensis and Zelkova. It could also be important for the historical record of Sosu-seowon. The records and preservation of trees in Korean Seowons contribute not just to tree culture in Korea, but in Seowon content development as well.

Keywords: 소수서원; 은행나무; 행단; 경렴정; 탁영지; 광풍정; 제월교; 주돈이
Keywords: Sosu-seowon; Ginkgo biloba; Haengdan; Gyeong-ryeom-jeong; Tak-yeong-ji; Jewolgyo Bridge; Gwang-pung-jung; Chou; Tun-I

Ⅰ. 서론

우리나라 서원은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이었던 성리학을 구현한 사립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이었다. 서원은 조선의 교육과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서원은 증가에 비례해서 순기능만큼 역기능도 적지 않았다. 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의 배경 중 하나는 서원의 역기능에 대한 조처였다. 철폐 이후 서원은 근대 이후 학당으로 전환된 것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교육과 문화 분야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019년 7월 16일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아홉 곳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서원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홉 서원은 모두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운동서원, 즉 소수서원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일 뿐 아니라 성리학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홉 서원 중 소수서원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배경 중 하나는 소수서원에 배향된 안향(安珦, 1243-1306)이 무성서원의 최치원, 도동서원의 김굉필, 남계서원의 정여창, 옥산서원의 이언적, 도산서원의 이황, 돈암서원의 김장생, 필암서원의 김인후, 병산서원의 류성룡 등과 비교해서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은 단순히 배향 인물의 비중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서원 가치는 생태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원이 위치한 지자체에서는 서원과 관련한 각종 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서원 관련 행사는 우리나라의 성리학 관련 문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각종 행사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서원이 지닌 생태적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원 행사는 주로 인문생태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Eco)는 인문생태만이 아니라, 자연생태 및 사회생태를 포함하지만, 국내에서는 이 같은 생태에 대한 개념조차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생태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생태를 ‘평등한 관계성’으로 규정한다(계명대학교 한국학연계전공 엮음, 2018: 243-248). 생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생태이다. 인간은 자연생태 아래 사회생태 및 인문생태를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원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자연생태와 사회생태 및 인문생태를 통해서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서원을 이해하는 방식은 주로 인문생태에 머물러 있다. 예컨대 서원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 내용은 대부분 인문생태에 불과하다. 그간 소수서원에 대한 연구도 생태학 차원이 아니라, 개별 학문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소수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홉 서원 중 자연생태와 인문생태를 온전히 갖춘 서원이다. 특히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답게 성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의 서원이다. 그러나 그동안 소수서원에 대한 연구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지만, 생태학 차원에서 현장을 통해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성리학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이 시대의 가치는 누구나 태어나면서 지닌 착한 본성을 스스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착한 본성을 구현한 자를 성인이라 불렀다. 성인에 이르는 방법이 곧 공부(工夫)였다. 송대에 등장한 공부의 대상은 삼라만상이었다. 그래서 서원의 모든 생명체는 서원의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공부의 대상이었으며, 서원의 자연생태는 성리학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소수서원에 대한 연구는 국내학술논문은 아주 많지만 본고와 관련한 생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소수서원을 비롯한 한국 서원에 대해서는 조경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서원의 조경을 성리학의 상징나무로 분석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경학과 관련한 연구는 성리학과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에 참고문헌에서 제외했다. 소수서원을 생태학 차원에서 분석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관광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소수서원을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는 관광사업은 주로 문화관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같은 방식은 인문생태 중심의 관광사업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같은 인문생태 중심의 관광사업으로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소수서원 가치를 제대로 홍보할 수 없을 뿐아니라 관광객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본고의 소수서원에 대한 생태학적인 연구 방법론은 서원의 가치를 세계문화사적으로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 대한 생태학적 분석은 나머지 여덟 곳의 세계문화유산 서원에 대한 분석 틀을 제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원보다 1년 전인 2018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사-한국의 산지승원’에 대한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소수서원의 설립과 생태적 가치

1. 안향의 주자학 도입과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설립

조선의 주자학은 고려말 안향이 중국 원나라에서 가져오면서 보급되기 시작했다. 안향은 주자의 학문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주자를 추모했는지는 그의 호인 회헌(晦軒)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호 ‘회헌’의 ‘회’는 주희(朱熹, 1130-1200)의 호 중 하나인 회암(晦庵)의 ‘회’에서 빌린 것이다. 안향은 1289년 11월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직접 베끼고, 이듬해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돌아왔다. 안향이 도입한 ╓주자전서╜는 조선시대 주자학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1541년 7월 풍기군수에 부임한 지 2년 뒤인 1543년 8월에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과 더불어 사당 동쪽에 서원을 세웠다. 그가 세운 서원의 이름은 백운동(白雲洞)이었다. 백운동서원은 주자 혹은 주자학의 정신을 계승한 서원이었다. 주세붕이 숙수사(宿水寺) 절터인 서원을 세운 까닭은 주자가 현재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 여산(廬山) 아래에 건립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었다. 주세붕이 서원의 이름을 백록동에서 빌린 사실은 그의 「백운동에서 주문공의 「백록동부」에 차운하다/白雲洞次朱文公白鹿洞賦」에서 확인할 수 있다(周世鵬) 編, 安柾 譯, 2009: 257). 조인철의 백록동서원과 백운동서원을 비교한 연구는 두 서원의 자연생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풍수학 차원에서 분석한 것이다(조인철, 2019). 이처럼 소수서원의 자연생태에 대한 연구 거의 대부분 풍수와 관련한 내용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백운동서원의 이름은 백록동서원의 풍경과 닮아서가 아니라, 주자가 세운 서원의 이름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데 지나지 않는다. 백운동의 ‘운’은 주자의 호 중 하나인 ‘운곡(雲谷)’과도 맞닿아 있다. 주자의 호 중 하나인 ‘운곡’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모방한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주세붕이 설립한 안향의 사묘(祠廟)와 백운동서원의 좌학우묘(左學右廟), 즉 동쪽에 강학 공간, 서쪽에 제사 공간의 배치 구조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 구조와 다르다(김천민, 2020). 김천민의 학위논문은 한국과 중국의 서원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한국의 서원은 무성서원을 제외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여덟 곳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반면, 중국 서원은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숭양서원 등 송대의 핵심 서원을 분석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서원의 기본 구조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 즉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배치하고, 제사 공간인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구조, 혹은 ‘전묘후학(前廟後學)’, 즉 사당을 앞에 배치하고, 명륜당을 뒤에 배치하는 구조이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사당이 서쪽에, 명륜당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서원의 전학후묘 구조가 자리 잡은 것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모신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이다.

백운동서원의 위상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부임 다음해인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을 통해 사액(賜額)을 요청한 결과,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현판을 받으면서 한층 높아졌다. 명종이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짓도록 한 ‘소수’는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이다. 이 같은 '소수'의 이름도 주자가 무너진 서원을 다시 건립한 백록동서원의 이미지와 무척 닮았다. 신광한은 1550년 4월 하순 ‘백운동소수서원기(白雲洞紹修書院記)’도 썼다(周世鵬 編, 安柾 譯, 2009: 129-131).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은 이황이 사액서원을 받으면서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백운동서원, 즉 소수서원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소수서원의 위상은 다른 어떤 서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백운동서원 곧 소수서원의 ‘시원성(始原性)’은 그 어떤 가치보다 높다.

2. 소수서원의 생태와 가치

소수서원의 생태는 서원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소수서원의 생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생태이다. 자연생태 중에서도 죽계와 나무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죽계와 나무는 소수서원의 경관과 사회생태 및 인문생태를 구성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서원의 자연생태와 관련해서 죽계에 대해서는 풍수 관점에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식물에 대해서는 단순히 조경 차원에서만 접근할 뿐, 서원의 성리학적 가치와 관련한 분석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소수서원의 나무와 풀은 단순히 조경 차원에서 식재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공자가 아들과 제자들에게 ╓시경(詩經)╜의 금수와 초목이 지식의 습득에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듯이, 식물은 성리학자들에게 타고난 천성을 구현해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공부의 대상이었다. 성리학자들이 사용한 대표적인 공부 방법은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 중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였다. 퇴계 이황이 큰 관심을 가진 장미과의 매실나무에 대한 작품인 ╓매화시첩(梅花詩帖)도 격물과 치지의 결과물이었다.

소수서원의 자연생태는 크게 죽계와 소나무 숲을 비롯한 각종 나무들이다. 죽계는 소수서원의 가치 평가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죽계는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홉 서원 중 가장 뛰어난 경관을 갖추고 있다. 아홉 서원은 모두 크고 작은 계곡, 강 혹은 댐 주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죽계처럼 서원과 온전히 함께 하고 있는 경우는 옥산서원을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다. 죽계에 대해서는 지금의 영주시 풍기인 죽계에서 태어난 안축(安軸, 1282-1348)의 ╓죽계별곡(竹溪別曲)╜(安軸,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과 주세붕의 ╓죽계사(竹溪辭)╜(周世鵬,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축의 ╓죽계별곡╜과 주세붕의 ╓죽계사╜ 중 죽계의 자연생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죽계별곡╜이다. ╓죽계사╜는 죽계에 대한 구체적인 풍경을 읊지 않았다. ╓죽계별곡╜에서 언급한 식물은 버드나무, 복사나무, 살구나무, 국화, 단풍나무 등이다. ╓죽계별곡╜과 ╓죽계사╜는 소수서원 죽계의 자연생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의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아주 좋은 사료이다.

죽계의 자연생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는 ‘죽계구곡(竹溪九曲)’이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구곡문화는 중국 남송시대 주자가 현재 절강성 무이산시(武夷山市)에 위치한 무이산(武夷山)에서 경영한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유래했다. 죽계구곡도 무이구곡을 모방했지만, 설정은 두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죽계의 위에서 1곡을 시작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서원에서 1곡을 시작한 것이다. 전자는 순흥군수 신필하(申弼夏)가 설정한 것이다. 신필하의 죽계구곡은 ╓순흥지(順興志)╜에 수록되어 있다. 신필하가 설정한 죽계구곡의 중요한 특징은 주자의 무이구곡과 정반대로 설정한 점이다. 그러나 ╓순흥지╜의 편찬자는 신필하의 설정과 정반대로 죽계구곡을 설정했다. 이 같은 죽계구곡에 대한 상반된 설정은 ╓순흥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安廷球,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죽계구곡(竹溪九曲) : 부사 신필하(申弼夏)가 일찍이 소백산을 유람할 때 초암사 금당(金堂) 앞에 큰 글씨로 ‘죽계제일수석(竹溪第一水石)’이라 써서 새겼다. 그리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처음으로 반석에 1곡(一曲)이라 새기고, 시내를 따라 내려오면서 마지막으로 배점[梨店]에서 9곡(九曲)을 새겼다. 그 사이의 거리가 5리쯤 된다. 계곡이 길고 굽이가 많아서 가장 볼만한 데만 취한다 해도 이뿐이 아닐 텐데, 새겨져 있는 9곡은 거리가 너무 짧지 않나 여겨진다. 중국의 무이구곡은 동구(洞口)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계곡 마지막까지 가는데, 동구가 1곡이 되고 계곡 마지막이 9곡이 되었으니 이곳의 9곡과는 반대인 셈이다. 지금에 본다면, 마땅히 백운동(白雲洞) 취한대(翠寒臺)가 처음 1곡이 되고, 금성(金城) 반석이 2곡이 되고, 백자담(柏子潭)이 3곡이 되고, 이화동(梨花洞)이 4곡이 되고, 목욕담(沐浴潭)이 5곡이 되고, 청련동애(靑蓮東崖)가 6곡이 되고, 용추(龍湫)가 7곡이 되고, 금당(金堂) 반석이 8곡이 되고, 중봉의 합류되는 곳이 9곡이 되어야 한다. 우선 이 설을 기록하여 후인들의 평가를 기다린다.

죽계구곡 중에서 소수서원과 직접 관계가 있는 곳은 취한대(翠寒臺)이다. 이는 곧 현재 소수서원 동쪽에 위치한 서원 영역의 죽계에 해당한다. 죽계구곡의 설정 순서는 설정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수서원이 죽계구곡의 한 축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소수서원의 자연생태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홉 서원 중 구곡과 직접 관련된 곳은 소수서원과 옥산서원 뿐이다. 특히 경렴정과 취한대 사이에 위치한 죽계는 소수서원의 자연생태 중 백미에 해당한다.

소수서원의 자연생태에서 반드시 주목할 것은 소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 소나무 숲이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매표소 입구부터 서원의 남쪽과 서쪽, 그리고 죽계 건너 동쪽 산에 분포하고 있다. 서원 남쪽과 서쪽의 소나무 숲은 사람이 심은 것이고, 동쪽의 소나무 숲은 저절로 난 것이다. 소수서원 서편의 소나무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주세붕이 서원을 건립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린 소나무를 직접 심었다는 「치송(稚松)」 시는 남아 있다(周世鵬, 1988: 106). 앞으로 소수서원의 소나무에 대한 조사 및 기록은 서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왜냐하면 소수서원의 소나무는 ‘수목문화(樹木文化)’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앞으로 서원의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소나무(Pinus densiflora Siebold & Zucc.)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강판권, 2013). 우리나라 사람들 중 소나무의 원산지를 한국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시에볼드(Siebold)와 주카리니(Zuccarini)가 붙인 학명에는 원산지를 표기하지 않았다. 소나무의 학명 중 속명 피누스(Pinus)는 캘트어로 ‘산’을, 종소명 덴시플로라(densiflora)는 ‘빽빽하게 돋아나는 꽃이 있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서원의 인문생태의 가치만큼이나 높지만, 아직 소수서원의 가치를 평가할 때 소나무 숲에 주목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곳 소나무 숲은 단순gl 자연생태가 아니라 인문생태이기도 하다. 소나무를 인문생태로 파악한 사례는 정목(貞木)·출중목(出衆木)·백장목(百長木)·군자목(君子木)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소나무를 인문생태로 이해한 사례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이다. 세한삼우는 소나무와 매실나무와 대나무를 사람처럼 벗으로 이해한 개념이다. 소나무를 세한삼우 중 하나로 꼽은 결정적인 계기는 ╓논어(論語)╜,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운 뒤에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는 구절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 중 ‘송백’의 ‘백’을 측백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 측백나무가 아닌 소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 잣나무로 오역한 사례가 아주 많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도 이곳에 출입한 성리학자들의 중요한 공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서원의 자연생태는 물론 인문생태를 이해하는 데 필수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소수서원의 관광에서도 소나무 숲은 반드시 인문생태와 함께 주목해야만 서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릴 수 있다.

3. 현판의 성리학적 의미

서원의 현판은 성리학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는 성리학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의 ‘소수’가 주자학의 정신을 계승한 것처럼 소수서원의 각 건물에 사용한 현판은 각각 성리학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반드시 현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지만, 관광객들은 해설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현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소수서원을 비롯해서 아홉 곳 서원 어디에도 현판의 의미를 제대로 안내한 곳은 없다. 서원의 현판을 확인하는 방법은 서원의 입구부터 차례로 살피는 것이다. 소수서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현판은 경렴정(景濂亭)이다. 경렴정은 소수서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필수 현판이다. 그 이유는 경렴정의 정확한 뜻을 알아야만 소수서원의 가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렴정의 ‘렴’은 중국 북송시대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호인 ‘염계(濂溪)’의 ‘염’이다. 따라서 경렴정은 ‘주돈이를 흠모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경렴정은 주세붕이 1545년 문성공묘와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건립했다. 그런데 주세붕은 왜 정자의 현판을 경렴정이라 했을까.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렴정의 주인공인 주돈이가 중국 송학(宋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아야 한다. 주돈이는 중국 송학의 기초를 세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주돈이는 중국에서 송대 이학(理學)의 ‘개산조(開山祖)’라 불린다. 그가 남긴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송학의 우주론·존재론·인식론을 담고 있다. 주돈이의 작품은 송학이 불교와 대등한 논리체계를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편찬한 ╓근사록(近思錄)╜의 첫머리에 ╓태극도설╜을 실었던 것이다. 여조겸의 ╓근사록╜, 「후기(後記)」에 따르면, 편찬자가 주돈이의 글을 처음 실은 이유는 의리의 본원과 학문의 목표에 대한 대강을 이해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 편저, 엽채(葉采) 집해, 이광호 역주, 2004: 49-50). 따라서 ╓태극도설╜은 성리학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주세붕이 조선에서 최초로 서원을 창건하면서 경렴정을 세운 이유도 주자가 편찬한 성리학의 기본서인 ╓근사록╜의 취지를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경렴정의 현판 중 정면 바깥의 해서 현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글씨이고, 내부의 현판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글씨이다(李瀷,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경렴정 안 4면에는 주세붕의 「경렴정」 원운시(原韻詩)를 비롯해서 이황, 황준량 등의 시판이 걸려 있다. 한편, 경렴정의 방향은 성리학의 공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성리학 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 중심으로 설계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리학 공간은 반드시 직접 올라서 봐야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경렴정의 정면은 죽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쪽 소나무 숲과 마주하고 있다. 경렴정의 이러한 위치는 곧 정자의 중심이 소나무 숲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경렴정 앞에는 제사에 필요한 제물을 살피는 성생단(省牲壇)이 자리 잡고 있다.

소수서원의 다음 현판은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이다. 지도문의 ‘지도’는 ‘도에 뜻을 둔다’는 의미이다. 지도의 의미에 대해서는 주자의 거덕(據德)·의인(依仁)·유예(游藝)와 함께 ‘사재명(四齋銘)’의 하나인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자의 지도는 다음과 같다(周世鵬 編, 安柾 譯, 2009: 202).

  • 달리면서 당기는 자 / 曰趨而挹者

  • 무엇이 행하고 가지게 하는가 / 孰履而持

  •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 / 曰饑而寒者

  • 누가 먹여주고 입혀주는가 / 誰食而衣

  • 그래서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네./ 故道也者不可須臾離

  • 그대는 도에 뜻을 두지 않고 / 子不志於道

  • 홀로 아둔하게 어디로 가려는가 / 獨罔罔其何之

소수서원의 정문 이름을 주자의 사재명 중 하나인 ‘지도’로 삼은 이유도 주자학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에 뜻을 둔다’는 것은 곧 ╓중용(中庸)╜1장의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천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하고, 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에서 보듯이 천성(天性)을 구현한다는 뜻이다. 천성을 구현한 자는 곧 공자와 같은 성인이고, 성리학자들의 공부 목적도 바로 천성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지도문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현판은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의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보물 제1403호)이다. 명륜당의 ‘명륜’은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성리학의 윤리 중 대표적인 것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다. 명륜당 안에는 ‘백운동’과 ‘소수서원’의 편액이 걸렸다. 아울러 명륜당 안에는 주자가 만든 백록동서원규(白鹿洞書院規)와 세 개의 잠(箴)이 있다. 백록동서원규는 백운동서원이 주자의 사례를 그대로 모방했다는 뜻이다(周世鵬 編, 安柾 譯, 2009: 251-258). 세 개의 잠은 사물잠(四勿箴), 심잠(心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다. 사물잠은 ╓논어╜, 「안연(顏淵)」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심잠은 마음이 욕심에 공격 당하지 말도록 경계한 말이다. 중국 남송시대 범준(范浚, 1102-1151)의 작품인 심잠은 주자가 ╓맹자(孟子╜,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에서 인용했다. 남송시대 진백(陳柏)의 작품인 숙흥야매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진 아주 특별한 구조이다. 대개 정면의 칸 수가 많지만 명륜당은 측면의 칸 수가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륜당의 또 다른 특징은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소수서원 명륜당 뒤편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편에는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가 위치하고 있다. ‘곧고 바르다’를 뜻하는 직방재는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이다. ‘매일 새롭고 또 새롭다’는 일신재는 일반 교수의 집무실 겸 숙소이다. 직방재와 일신재의 특징은 한 건물에 배치한 점이다. ‘독서의 지극한 즐거움’을 뜻하는 지락재와 ‘성현의 말씀을 구해서 배운다’는 학구재는 학생이 거처하는 곳이다. 지락재와 학구재의 특징은 직방재와 일신재보다 기단을 낮게 했을 뿐 아니라, 한 칸 뒤로 배치한 점이다. 아울러 학구재와 지락재의 ‘工’ 자 형태는 ‘공부’(工夫)의 ‘공’을 따온 것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설계이다.

소수서원의 또 하나의 현판인 취한대(翠寒臺)는 이황이 세운 것이다. 취한대는 이황의 「잣나무와 대나무를 ‘취한’이라 명명하고, 함께 유람한 여러 선비들에게 주다/栢與竹名曰翠寒, 贈同遊諸彦」의 시에서 빌린 것이다. 이익의 기록에 따르면 취한대는 정자가 아니라 흙으로 만든 단(壇)이었다(李瀷,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이황은 취한대에 직접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현재 취한대 주변에는 잣나무와 대나무는 없고, 소나무만 무성하다. 그런데 취한대로 가기 위해서는 ‘청다리’라 불리는 제월교(霽月橋)를 건너야 한다. 제월교는 소수박물관으로 가는 길목 죽계 언덕에 자리 잡은 광풍정(光風亭)과 함께 최근에 세운 것이지만, 경렴정의 주인공인 주돈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주목할 명칭이다. ‘화창한 바람과 비가 그친 뒤 달’을 의미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중국 북송시대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산곡집(山谷集)╜에서 “주무숙(周茂叔: 무숙은 주돈이의 자)은 속이 시원스러워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이나 비 그친 뒤의 달과 같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 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이는 인품이 매우 훌륭하다는 뜻이다. 주자도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畫像贊)╜ 중 「염계선생(濂溪先生)」에서 주돈이를 광풍제월에 비유했다(周世鵬 編, 安柾 譯, 2009: 214). 그래서 제월교와 광풍정은 경렴정과 짝을 이루는 명칭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광풍제월을 최고의 인품으로 여겨 정자의 이름으로 애용했다. 그중 전남 담양 소쇄원의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정여창이 세운 함양군의 광풍루(光風樓)도 광풍제월에서 빌린 이름이다.

취한대 아래 죽계에는 ‘경(敬)’자 바위가 있다. 현재 ‘경’자 바위의 붉은 글씨는 주세붕의 글씨이고, ‘경’자 위의 흰색 ‘백운동’은 이황의 글씨이다(李瀷,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주세붕이 바위에 ‘경’자를 새긴 연유는 「백운동석벽각경자(白雲洞石壁刻敬字)」에서 확인할 수 있다(周世鵬 編, 安柾 譯, 2009: 241).

주세붕이 바위에 새긴 ‘경’자는 단순히 ‘공경’의 뜻이 아니라, 성리학의 중요한 공부법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자는 ╓논어╜, 「학이(學而)」 중 공자가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되 일을 공경하고 믿게 하며(道千乘之國, 敬事而信), 쓰기를 절도 있게 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기를 농한기에 해야 한다”는 구절에 대한 집주(集注)에서 ‘경’을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풀이했다. 이는 곧 ‘하나를 주장하여 다른 곳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자는 경을 비롯한 공자가 언급한 개념을 성리학에 맞게 재해석한 사람이다. 조선의 상리학자들도 주자의 견해를 거의 절대적으로 수용했다. ‘집중’을 의미하는 ‘경’은 인간의 천성을 드러내는 수양론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이황이 평생 연구한 것도 바로 ‘경’이었다. 주세붕을 모신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 위치한 무산사(武山祠) 앞에도 ‘경’자 바위가 있다. 무산사의 ‘무산’과 주세붕의 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의 ‘무’는 모두 주자가 머물렀던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의 ‘무’와 무관하지 않다. 경남 함안 칠원면에서 태어난 주세붕의 묘소는 칠서면 계내리에 있다. 주세붕의 예상대로 바위에 새긴 ‘경’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바위를 옮기지 않는 한 천 년 이상 남아 있을 것이다.

Ⅲ. 소수서원의 성리학적 상징 식물

1. 은행나무와 행단

소수서원 은행나무는 강학 공간을 의미하는 ‘행단(杏壇)’과 관련해서 주목할 나무지만, 아직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를 성리학과 관련해서 주목한 사례는 없다. 특히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는 국립인 성균관의 은행나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게다가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는 다른 서원은 물론 지방 성리학 공간의 모범 사례라는 점에서 은행나무에 대한 해석은 아주 중요하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는 이른바 소혼대(消魂臺) 바위 앞과 경렴정 뒤편 죽계 언덕에 각각 한 그루씩 살고 있다. 현재 나이는 500살로 추정하고 있다. 소수서원에는 명륜당 앞 담 쪽에도 한 그루 은행나무가 살고 있지만, 나이는 많지 않다.

우선 행단과 관련해서 이해할 것은 우리나라의 행단과 중국의 행단은 나무의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행단은 장미과의 갈잎떨기나무 살구나무인 반면 우리나라는 은행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은행나무이다. 중국의 행단이 살구나무라는 사실은 현재 산동성 곡부에 위치한 공부(孔府) 내 행단 비각 앞 나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의 간판에는 행단의 ‘행’을 살구나무(apricot trees)로 표기하고 있다. 아울러 행단 비각 앞에는 살구나무가 살고 있다. 공부 행단의 사례에 따라 중국의 서원에서도 살구나무를 행단으로 심었다. 중국의 서원 중 살구나무를 심은 곳은 송대의 삼대 서원 중 하나인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숭산 자락에 위치한 숭양서원(崇陽書院)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서원을 비롯한 성리학 공간에 살구나무를 행단으로 심은 곳은 없지만,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의 자경문(自警門) 오른편, 문성사(文成祠) 율곡 이이 영정 기준 왼편 등지에 아직 어린 나무가 살고 있지만 앞으로 해석할 부분이다.

행단은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공부한 곳을 뜻한다. 이 같은 사실은 ╓장자(莊子)╜에서 확인할 수 있다(莊子, 1993: 391).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행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다. 그는 「행단기(杏壇記)」에서 행단의 설치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조식, 경상대학교남명학연구소 옮김, 2012: 237-241). 그러나 조식은 행단의 나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행단의 ‘행’을 살구나무로 이해했다(丁若鏞 原著, 金鍾權 譯註, 1976: 40-41). 왜관수도원 소장의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1759)의 《행단고슬(杏壇敲瑟)》에도 살구나무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행단변증설(杏壇辨證說)」에서 행단의 ‘행’을 도행(桃杏), 즉 복사나무와 살구나무의 ‘행’이 아니라 ‘문행(文杏)’의 ‘행’, 즉 은행나무로 보았다. 그는 성균관 명륜당 앞 은행나무를 그 근거로 들었다(李圭景,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도 ╓기언(記言)╜의 「석록초목지(石鹿草木誌)」에서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로 보았다(許穆,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그런데 허목은 은행을 운은행(雲銀杏)으로 표기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백과(白果) 압각(鴨脚)이라 적었다. 압각은 잎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압각은 은행나무의 잎이 오리의 발갈퀴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아울러 그는 운은행이 노나라 공자의 행단의 나무로 해석하고 오래 사는 나무, 즉 ‘수목(壽木)’이라 풀이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행단의 나무를 중국처럼 살구나무로 이해한 경우도 있지만, 은행나무로 파악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성리학 공간에서는 행단을 모두 은행나무로 수용했다. 행단을 살구나무가 아닌 은행나무로 수용한 가장 대표적인 곳은 고불(古弗)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고택(故宅)인 충남 아산의 ‘맹씨행단(孟氏杏壇)’이다. 행단은 600살 정도의 두 그루 은행나무를 의미한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는 행단을 은행나무로 수용한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점에서 행단을 은행나무로 수용한 최초의 사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간의 소수서원 연구에서는 서원의 은행나무를 행단과 관련해서 주목한 경우는 없었지만, 소수서원의 행단은 다른 서원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수서원의 은행나무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두 그루라는 점이다. 소수서원에 행단을 의미하는 은행나무를 두 그루 심은 이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오로지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은행나무가 암수딴그루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서원의 두 그루 은행나무는 모두 암그루이지만, 은행나무의 경우 묘목 단계에서는 암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두 그루가 각각 암수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주목할 것은 두 그루를 심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성리학 공간에는 은행나무가 적지 않지만 두 그루를 심은 곳은 많지 않다. 소수서원에서 두 그루를 심은 것은 아마도 성균관의 예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우리나라 서원 중 은행나무가 두 그루 살고 있는 곳은 소수서원 외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제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모신 경북 청도군 이서면에 위치한 자계서원(紫溪書院)을 들 수 있다. 도동서원에도 두 그루가 살고 있지만, 김굉필의 신도비 옆의 은행나무는 입구의 은행나무보다 나이가 많이 적어서 동시에 심은 나무가 아니다. 무성서원과 필암서원에는 각각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달리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행단으로 삼은 이유는 문헌 자료가 없어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성리학 도입과 은행나무 이름의 상관성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지배이념인 송학을 남송의 주자가 집대성한 학문이다. 조선왕조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송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로 선택한 것도 송대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행의 용어가 송대에 처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북송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성유 이후가의 압각자에 화답하다/和聖俞李侯家鴨脚子」(1057)이다(歐陽修. 1986: 46). 은행 이전의 은행나무 이름은 시에서 보듯이 압각자(鴨脚子) 혹은 압각수(鴨脚樹), 백과(白果), 공손수(公孫樹) 등이었다. ‘압각’을 사용한 예는 소수서원 근처 금성단(錦城壇) 옆의 은행나무와 관련한 이익의 「압각(鴨脚)」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李瀷,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

옛날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할 때에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은 즉시 죽음을 당했고, 금성대군 유(錦城大君 瑜)는 순흥(順興)으로 귀양 가서 격문(檄文)을 돌리고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미쳐 일으키기 전에 고발한 자가 있어 역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러므로 순흥이란 고을을 폐해 없애게 되었는데, 그 고을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魯山)도 복위(復位)된다.”고 했다. 그 후 2백 30년이 넘어서 순흥부(順興府) 동쪽에서 은행나무가 갑자기 저절로 나서 자라게 되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는, 옛날에 이 나무가 있었던 까닭에 이 노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압각수가 다시 난 지 오래지 않아서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순흥을 다시 설치했다. 이때 신규(申奎)란 자가 단종은 복위되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朝廷) 의논도 모두 찬동하게 되었으니, 옛날 순흥 백성들의 노래에 한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순흥까지 갔을 때 그 은행나무가 벌써 대여섯 길 정도로 자랐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이와 같이 뚜렷이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천목산(天目山) 원산인 은행의 이름은 송대에 조공품(朝貢品)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송대에 사용한 은행의 이름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은행나무를 행단으로 삼은 이 같은 해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다. 행단의 나무를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로 수용한 것은 중국의 문화를 우리나라의 사정에 맞게 해석한 일종의 ‘문화변용’이라 할 수 있다.

2. 느티나무와 학자수

느릅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느티나무(Zelkova serrata (Thunb.) Makino)는 소수서원 매표소 앞,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 주변, 경렴정 뒤편 탁영지 언덕에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매표소 입구와 탁영지 언덕의 느티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수서원의 느티나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느티나무가 성리학 공간에서 ‘학자수(學者樹)’라 부리는 콩과 갈잎큰키나무 회화나무(Styphnolobium japonicum L.)의 문화변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회화나무를 성리학 공간에 심은 배경은 중국에서 주나라 때 삼공(三公), 즉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를 ‘삼괴(三槐)’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주나라에서는 조정(朝廷)을 ‘괴정(槐庭)’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사대(事大:중국)와 교린(交隣:일본·여진) 문서를 관장한 승문원(承文院) 앞에 회화나무 심어 ‘괴원(槐院)’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관례를 모방하여 ‘삼괴정(三槐亭)’과 같은 이름이 등장했다. ‘삼괴’를 모방한 사례는 경주 강동면의 삼괴정(三槐亭), 경북 성주군 초전면 백세각(百世閣) 담 쪽의 세 그루 회화나무 등을 들 수 있다. 서울 창덕궁의 안의 여덟 그루 회화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472호)처럼 궁궐의 회화나무도 주나라의 사례를 모방한 것이다. 성균관과 향교의 회화나무도 같은 이유로 심었다.

중국에서도 주나라의 예를 모방해서 서원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서원이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송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현재 호남성 장사의 호남대학교에 위치한 악록서원(嶽麓書院) 대성전(大成殿) 앞과 숭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숭양서원 강당 앞에 회화나무가 실고 있다. 악록서원은 남송대의 주자와 장식(張栻, 1132-1180)이 직접 강학한 서원이다. 특히 숭양서원의 회화나무는 주자의 스승이었던 정이(程頤, 1033-1107), 그리고 정이의 형인 정호(程顥, 1032-1085) 형제가 강학한 곳 앞에 살고 있다. 더욱이 이곳 회화나무에는 ‘국괴(國槐)’라는 이름표가 달렸다. ‘국괴’는 중국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의 악록서원에 대한 연구에는 성리학의 상징나무에 대한 분석은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악록서원의 건축과 문화를 다룬 저서(楊愼初, 2003)에는 상징나무를 분석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악록서원에는 주돈이를 모신 염계사(濂溪祠)가 있다. 북한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서원인 숭양서원(崇陽書院, 북한 국보문화유물 제128호)도 숭양서원을 모방한 서원이다.

조선시대 서원을 비롯한 성리학 공간에서도 회화나무를 흔히 만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 중에서는 경주의 옥산서원 입구 옥산계곡에는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도 가장 많은 회화나무 군락이 살고 있다. 도산서원에는 서광명실(西光明室) 앞에 회화나무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 죽은 나무를 완전히 처리한 상태이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구)천원 지폐 뒷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리학 공간 중 유명한 회회나무는 윤선도가 머물렀던 전남 해남 녹우당에 살고 있다.

중국에서 회화나무를 의미하는 ‘괴’는 우리나라에서는 한편으로 회화나무, 다른 한편으로 느티나무를 의미한다. 그래서 중국 문헌의 경우 ‘괴’는 회화나무로 번역해야 옳지만, 우리나라의 예를 쫓아 느티나무로 오역하는 사례가 아주 많다. 우리나라 성리학 공간에서 회화나무를 느티나무 수용한 대표적인 사례는 맹씨행단 근처의 구괴정(九槐亭)이다. 구괴정은 맹사성을 비롯한 세 사람의 정승이 각각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했다. 현재 구괴정에는 당시 심은 것으로 보이는 회화나무는 한 그루만 살고 있지만, 주변에 8그루의 후계목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성리학 공간에 회화나무를 심은 또 다른 배경은 중국 주나라 때 사(士)의 무덤에 회화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천자(天子)의 경우 봉분의 높이는 3인(仞)이며, 소나무를 심었으며, 제후(諸侯)의 경우 봉분의 높이는 1.5인(仞)이고, 측백나뭇과의 늘푸른큰키나무 측백나무를 심었으며, 대부(大夫)의 경우 봉분의 높이는 8척(尺)이며, 참나뭇과 갈잎큰키나무 상수리나무를 심었으며, 사의 경우 봉분의 높이는 4척이고 콩과 갈잎큰키나무 회화나무를 심었으며, 서민의 경우 봉분은 없고, 버드나뭇과 갈잎큰키나무 버드나무를 심었다(반고, 2005: 452). 이처럼 중국 주나라에서 봉분과 함께 나무를 심은 이유는 나무로 표시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 봉분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천자에서 사까지는 주나라의 지배층이었다. 그런데 천자와 제후의 무덤에 심은 나무의 공통점은 늘푸른큰키나무라는 사실이다. 반면 사와 서민의 무덤에 심은 회화나무와 상수리나무는 갈잎큰키나무이다. 늘푸른나무와 갈잎나무는 봉건사회였던 주나라의 신분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사와 서민의 경우 나무는 모두 갈잎나무이지만, 봉분의 여부는 엄청난 신분 차이이다.

소수서원에 회화나무 대신 느티나무를 심은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 회화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회화나무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귀한 나무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느티나무를 회화나무처럼 인식하고, 회화나무처럼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는 식물학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느티나무는 선비의 신분을 드러내는 데는 안성맞춤의 나무였을지 모른다. 따라서 성리학 공간의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중국의 수목문화를 우리나라에 맞게 수용한 대표적인 나무라는 점에서 정확한 이해와 보존이 필요하다.

3. 탁영지와 애련설

소수서원의 탁영지(濯纓池)는 성리학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연못에 사는 식물을 잘못 가꾸는 사례가 적지 않다. 탁영지의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뜻이다. 이는 연못의 물로 자신의 마음 속 더러운 때를 씻는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처럼 성리학 공간에는 대부분 연못을 갖추고 있다. 그 이유는 주돈의 「애련설(愛蓮說)」 때문이다(黃堅, 1992: 559-561).

물이나 뭍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의 꽃은 무척 사랑스럽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다. 이연(李淵)이 세운 당나라 이후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고, 줄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로 자라거나 가지를 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어서 아낀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이고,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가 도연명 후에 또 있었다는 것은 들은 일이 거의 없다. 연꽃 사랑함을 나와 함께하는 이는 몇일까?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분명 많을 것이다.

소수서원 경렴정 뒤편에 조성한 탁영지는 곧 경렴정처럼 주돈이의 사상을 담고 있는 곳이다. 주돈이의 「애련설」 이후 중국은 물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신의 거처 공간에 크고 작은 연못을 조성한 후 연꽃을 심었다. 성리학자들이 연꽃을 심은 이유는 연꽃과 같은 인품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연꽃의 특징 중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의 뜻은 다음의 ╓숫타니파타-붓다의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석가모니의 말씀과 같다(전재성, 2015: 124).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수서원의 탁영지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연꽃을 통해 자신의 착한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학습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탁영지에는 연꽃(Nelumbo nucifera Gaertn.)이 아니라 수련(睡蓮, Nymphaea tetragona Georgi)이 살고 있다. 연꽃과 수련은 모두 수련과에 속하지만, 모양과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탁영지에는 반드시 연꽃을 심어야만 서원의 설립 목적과 부합한다. 탁영지에 연꽃이 아닌 수련을 심은 이유는 탁영지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심각한 문제는 성리학 공간에 탁영지처럼 수련을 심은 서원이 소수서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만 대상으로 분석해도 연꽃 대신 수련을 심은 곳은 함양의 남계서원과 안동의 병산서원을 들 수 있으며, 도산서당 정우당(淨友塘)에는 부레옥잠과 여러해살이 풀 부레옥잠(Eichhornia crassipes (Mart.) Solms)을 심었다. 정우당에 연꽃을 심었다는 사실은 이황의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서당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한다”라는 구절(李滉,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 중 연못을 갖춘 곳은 소수서원의 탁영지를 비롯해서 남계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뿐이다. 그런데 도산서원의 경우는 도산서당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연못도 아주 작다. 아울러 복례문(復禮門)과 만대루(晩對樓) 사이에 위치한 병산서원의 광영지(光影池)도 규모가 작다. 소수서원의 탁영지는 아홉 서원 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모범 연못이라는 점에서 연꽃은 매우 큰 상징성을 갖는다. 따라서 탁영지에는 반드시 수련이 아니라, 연꽃을 심어야만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

Ⅳ. 소수서원의 생태관광 방법론

1. 인문생태 중심의 관광 해설 문제점

현재 우리나라 전역의 문화재 공간에는 일정한 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다. 이른바 문화해설사, 세계 고궁문화재 해설사, 문화재해설사 등 다양한 이름의 해설사들이 때론 일정한 보수를 받기도 하고, 때론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러한 해설사 덕분에 질 높은 관광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각 문화재 해설사들은 그곳의 문화재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 능력으로 관광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관광객들이 몰랐던 내용까지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문화관광객의 수가 늘어나면서 관련 해설서도 적잖이 출판되어 해설사는 물론 관광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 관련 해설서나 해설사의 해설에는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지적할 것은 해설서나 해설가의 관련 내용이 인문생태 중심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인문학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소수서원의 경우, 대부분의 해설서나 해설가들은 서원의 창건을 비롯해서 서원의 기능, 인물의 평가, 서원의 구조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간혹 서원의 구조에 대해서는 건축학이나 풍수학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있지만, 건축학과 풍수학의 해석은 반대로 인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하다. 그러나 소수서원을 비롯한 서원은 어떤 특정 분야만으로는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서원은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생태학 차원에서만 종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해설사의 수준이다. 최근 문화재 관련 관광객 수요가 늘면서 해설사를 양성하는 기관이나 프로그램도 증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짧은 시간의 교육으로 해설사를 배출하고 있다. 이러한 해설사 양성 시스템은 적잖은 문제를 일으킨다. 예컨대 소수서원은 단기간 교육을 받은 해설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있는 해설이 요구된다. 특히 소수서원처럼 성리학과 관련한 서원의 경우는 성리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자칫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만약 해설사가 잘못 해석하면 세계문화유산인 소수서원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성리학에 대한 지식은 단기간 내 습득할 수 없는 학문이다. 따라서 서원 해설사의 경우는 성리학에 대한 기본 소양을 갖춘 사람이 해설을 담담해야만 관광객들에게 서원의 세계적인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2. 생태관광 중심의 관광 해설 필요성

소수서원을 비롯한 어떤 문화재든 생태학 차원에서 해설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관광객들에게 소수서원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매표소 입구의 느티나무부터 소나무 숲, 왕벚나무, 숙수사지 당간지주 및 느티나무, 은행나무, 경렴정과 은행나무, 성생단, 지도문, 명륜당, 문성공묘, 직방재, 일신재, 지락재, 학구재, 명륜당 앞 은행나무, 영정각, 영정각 앞 단풍나무, 장서각, 전사청, 음수대 옆 향나무 및 등, 탁영지와 느티나무, 죽계 제월교, 광풍정, 취한대, 취한대 앞 경자 바위와 성황당 등 한 곳도 빠짐없이 관람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관광 방식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태학적으로 관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문화재 중에서도 세계문화유산의 경우는 반드시 생태학적으로 관광해야만 세계적인 문화 가치를 누릴 수 있다.

생태학 차원에서 관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존의 문화재 관광에 대한 방법을 바꿔야 한다. 기존의 방식은 인문생태 중심의 관광방법에 더해 많은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이 같은 방법은 정부나 지자체의 문화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부나 지자체의 문화관광 정책은 기본적으로 예산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결과, 관광객의 숫자를 통해 관광정책의 성과를 평가한다. 더욱이 해마다 관광객 숫자로 관광정책을 평가하다 보니 매년 관광예산을 받기 위해서는 숫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숫자 중심의 해설은 마이크를 이용해야 하는 한계도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해설사가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설할 경우에는 부득이 핸드마이크를 사용하지만, 이는 해설의 수준은 물론 다른 관광객들에게도 큰 지장을 준다. 문화재 관광은 단순히 설명을 듣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다. 따라서 그간의 관광정책과 해설 방식은 21세기 한국의 문화 수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최근 문화산업 법령에 대한 연구(김규찬, 2015)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핵심은 하루 빨리 관광객들이 문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문화 수준을 높일 수 없다. 생태학 중심의 관광 해설은 관광객들에게 한 공간에서 아주 긴 시간을 요구한다. 따라서 반드시 소수 인원을 중심으로 해설을 진행해야 한다. 그러면 마이크도 필요하지 않다. 특히 생태학적인 관광 해설은 해설사의 해설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생태학 중심의 관광 해설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가치는 관광객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체험하는 데 있다. 그간 우리나라 관광객은 아주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찾는 데 아주 익숙하다. 소수서원의 경우도 1시간 남짓이면 관광이 끝난다. 그러나 생태학 차원에서 관광하면 소수서원에서 한나절을 충분히 보낼 수 있다. 이 같은 방법은 관광산업에 매우 중요하다. 지자체에서는 관광객들이 오래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지만, 사실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관광객들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관광객들이 숙박해야만 산업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지자체에서는 관광방법을 통한 관광객 유치보다는 각종 시설을 만들어 유치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시설 중심의 관광객 유치는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지만, 생태학 중심의 관광방법은 전혀 재정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광객의 만족도도 함께 높일 수 있다.

Ⅴ. 맺음말

본 논문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홉 서원 중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대한 생태적 분석이다. 소수서원에 대한 생태적 분석은 다른 여덟 세계문화유산 서원은 물론 우리나라 서원 전체의 생태적 연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원의 생태적 연구는 서원의 자연생태를 중심으로 인문생태를 동시에 분석한다는 뜻이다. 자연생태 중에서도 서원의 상징나무는 서원의 인문생태와 가치를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다.

소수서원의 두 그루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의 문화변용이고, 두 그루를 심은 것은 암수딴그루인 은행나무의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소수서원의 느티나무는 학자수인 회화나무의 문화변용이다. 소수서원의 상징나무에 대한 문화변용 사례는 중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우리나라만의 문화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소수서원의 경렴정과 탁영지, 제월교와 광풍정은 모두 중국 북송대의 주돈이와 관련한 것이다. 경렴정은 ╓태극도설╜을 통해 성리학의 철학 기초를 제공한 주돈이를 존경하기 위한 정자이고, 제월교와 광풍정은 주돈이의 인품을 표현한 이름이다. 그러나 탁영지에 연꽃을 심지 않고 수련을 심은 것은 주돈이의 사상을 훼손함과 동시에 소수서원의 세계적인 문화 가치를 폄하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소수서원의 생태적 분석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서원의 사료를 생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배경 중 하나는 서원 관련 기록이다. 그러나 아직 서원의 상징나무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예컨대 소수서원의 상징나무인 은행나무만 하더라도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서원 내의 은행나무, 소나무, 왕벚나무, 느티나무 등 각종 나무를 체계적으로 기록·보존해야 한다. 이는 소수서원의 기록문화에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지만, 아직 서원 당국은 물론 국가와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서원의 나무에 대한 기록과 보존은 우리나라 수목문화를 한 단계 높이는 데도 크기 기여할 뿐 아니라, 서원의 콘텐츠 개발에도 적잖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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