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Cultural Policy
Korea Culture & Tourism Institute
Article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의 예술지원에 관한 분석적 고찰: 박정희 정부를 중심으로

김진각1
Jin Gak Kim1
1성신여자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1Professor, Dept. of Culture and Arts Managements, SungShin Women’s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 Professor, Dept. of Culture and Arts Managements, SungShin Women's University, E-mail: kimjg2003@hanmail.net

© Copyright 2022 Korea Culture & Tourism Institute .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Received: Jun 09, 2022; Revised: Jul 21, 2022; Accepted: Aug 16, 2022

Published Online: Aug 31, 2022

국문초록

본고는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 태동을 상징하는 제도적 장치이기도 한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50주년을 맞아 이 법령의 최초 제정 시기의 예술지원 양태와 특성, 한계를 살펴보았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정권의 업적에 대한 공과(功過)가 뚜렷한 박정희 정부 시절이었으며, 따라서 박정희 정부 당시 문화예술정책을 재해석하고 재평가하고자 했다. 본고의 분석 결과,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은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으로 제도(법령)와 운영 조직(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재원(문화예술진흥기금) 등 문화예술지원 시스템이 갖춰진 박정희 정부 때 본격적으로 태동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총론적으로는 문화예술진흥법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예술 관련 주요 법률이, 각론적으로는 제1차 문예중흥계획에 입각하여 다양한 문화예술정책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책 시행의 목적 및 수단 등 방법론과 성과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논란을 초래했다. 문화예술진흥법에 대중예술 진흥 규정이 있지만, 순수예술 중심의 지원이 이루어진 반면, 대중예술은 다른 법령을 통해 상대적으로 규제와 통제 위주의 정책이 시행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의 논의에서 확인한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의 한계는 작금의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에 부여된 과제이기도 하다. 향후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협력적 발전 도모를 위한 정책 방안 강구에 시사점을 던진다고 할 것이다.

Abstract

In celebrat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enactment of the Culture and Arts Promotion Act (the Act), an institutional device that symbolizes the birth of Korea’s culture and arts policy, this study examines the aspects,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s of art support when it was first enacted. Coincidentally, this period was the era of the Park Chung-hee government, when the achievements of the government were clearly marked, and it was intended to reinterpret and re-evaluate the culture and arts policies of the government.

The analysis revealed that culture and arts policy in Korea began in earnest during the Park Jeong-hee administration, which was equipped with a culture and arts support system such as system (laws), operating organization (Korea Culture and Arts Promotion Agency), and financial resources (culture and arts promotion fund) through the enactment of the Act. In general, various culture and arts policies were implemented based on the main culture and arts related laws centered on the Act, and in terms of the 1st Literary and Arts Promotion Plan. However, it has caused considerable controversy in terms of methodology and performance, such as the purpose and means of policy implementation. Although the Act has regulations for promoting popular arts, it was confirmed that while support was provided centered on fine arts, regulations and controls were applied to popular arts through other laws.

The limitations of the early stage of culture and arts policy identified herein are also the tasks assigned to Korea’s culture and arts policy. In the future, implications for devising policy measures to promote the cooperative development of fine art and popular art will be derived.

Keywords: 문화예술진흥법; 문예중흥; 순수예술; 대중예술; 역사적 신제도주의
Keywords: Culture and Arts Promotion Act; culture and arts revival; fine arts; popular art; historical new institutionalism

Ⅰ. 서론

2022년은 우리나라 문화예술 진흥의 토대가 된 법령인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1) 문화예술 분야의 ‘모법’으로 불리는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은 문화예술정책의 태동(胎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중요성에 대한 논의는 간과된 측면이 있다.

정부 수립 이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문화예술 관련 법ㆍ제도는 존재했으나, 특정 문화예술 영역을 규정하는 산발적인 입법이 두드러지면서 문화예술정책 전반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화된 법령으로서의 역할은 한계를 드러냈다.2) 즉,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이전의 다수의 문화예술 관련 법령은 특정 영역의 진흥과 규제에 국한된 성격을 노정한 반면, 문화예술 전반을 통할하는 시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와 달리 문화예술진흥법은 ‘문화예술’에 대한 최초의 개념적 정의3)를 비롯하여 문화예술진흥기금 및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설치 조항 등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문화예술정책의 태동이라는 관점에서 살필 수 있다.

문화예술정책의 태동은 궁극적으로 문화예술지원 시스템 구축을 뜻한다. 부연하자면, 문화예술정책이 정책적 형태를 갖추려면 제도와 재원, 운영 조직 등이 체계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은 정책 수립 및 시행을 위한 명징한 제도일 뿐만 아니라, 법령의 주요한 내용은 재원(문화예술진흥기금)과 운영 조직(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확고한 구축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문화예술정책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예술정책 태동의 양상들이 본격화한 시기가 박정희 정부 시절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일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적 성공이라는 공(功)과 냉전-분단 상황을 국민동원과 정권 유지에 적극 활용한 준전시 개발독재라는 과(過)가 공존한다. 문화예술 분야의 논의와 관련하여 박광무(2013)는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정치적 동원 체제에 따른 수단으로서 다루어졌다고 파악한다.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진흥정책은 유사 파시즘적 권력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김규원·지금종·염신규·양혜원, 2018: 13).

이처럼 정권의 정당성을 둘러싼 근본적 논란 속에서 문화예술적 토양이 미비했던 박정희 정부에서 문화예술정책이 태동했다는 사실은 탐색적 고찰을 요구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예술정책 태동기 예술지원의 양태와 특성을 살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한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을 민족문화를 포함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등 크게 2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 시기 문화예술의 성격과 특징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당시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을 중심으로 문화예술 관련 기초 법률인 문화재보호법, 그리고 대통령 시정연설을 포함하여 주요 연설문을 분석하였다.

또한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문예중흥계획’도 분석 범위에 포함시켰다. 주된 분석방법으로는 문헌분석을 활용했다.

본고는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문화예술 발전 측면에서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차별성을 띤다고 할 것이다. 본고는 김규원 외(2018)의 논의처럼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대부분 국가, 특히 중앙정부의 관점에서 발표된 혹은 실행된 정책들을 연대기 순으로 충실히 기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과 비교할 때 독창성을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 기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의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새로운 평가 도출 역시 가능할 것이다.

Ⅱ. 이론적 논의

1.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의 대조적 평가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인 박정희 정부 시절 문화예술은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박정희 정부가 지배했던 1960∼1970년대는 우리 사회의 다른 영역 못지않게 문화예술 분야도 일대 격변을 경험해야 했던 시기였다. 전통문화예술을 중심으로 문화재학, 국학 등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진흥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문화예술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문화 관련 부처의 국정홍보가 우선시됨으로써 문화예술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될 상황이 아니었으며, 문화예술은 국정 홍보의 수단으로 다루어진 측면도 있었다(박광무, 2013: 116). 하지만 이와 같은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 진흥을 제도적으로 이끌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 등 문화예술 관련 초기 법률의 제정은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문화예술진흥 정책으로 전통문화예술, 국학, 문화재관련학 분야들이 대학의 연구소와 학과 설립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것은 문화예술 분야의 학문적 토대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특수한 장(場)으로 기록되면서, ‘산업화의 시대’, ‘군사 및 개발독재 시대’, ‘대중4)의 시대’로 소환되고 있으며,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평가도 대조된다(송은영, 2011: 187-226).

첫 번째는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문화예술정책 체계 구축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거나 문화예술정책의 체계와 방향이 정립되는 획기적 전환의 시기, 또는 정책 태동기 및 민족문화 중흥기 등의 시각이 그것이다(임학순, 2012: 160; 오명석, 1993: 122; 박광무, 2013). 이와 같은 논의는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이 전술한 문화 관련 초창기 법률 제정 같은 적지 않은 업적을 이뤄냈다는 진단이자,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체계화 및 제도화가 이뤄진 시기라는 평가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을 대중정치의 수단으로 파악하면서, 비판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송지호(2018: 196)는 “불법적 방법으로 획득한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강력한 경제발전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한 국민적 단합을 위해 전통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시기”라고 규정했다. 김현화(2016: 131)는 “정부 체제 유지와 강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전술”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염신규(2015)는 박정희 정부 시절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으로 출범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5)을 분석하면서 국가 문화예술정책의 표면에서는 완강하게 감시·통제와 국가주의가 관철되고 있었지만, 그 심층에서는 다양한 요소가 함께 성장하던 시기였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기존 연구를 분석하면,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두 가지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현상을 보인다. 즉, 문화예술정책적 관점을 우선시 할 경우 문화관련 주요 법령 제정의 가치가 부각되면서 정책의 근간으로 인식되며, 이는 긍정적 평가로 적시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집권 배경과 맞물린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면 문화예술정책의 시동은 하나의 정치적 전술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더욱 크게 반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 평가는 양분되는 흐름이 분명하여 논의의 확장이 필요하지만, 역대 최장기 정권이기도 했던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에 관한 연구는 201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활발하지 않다. 미술 등 특정 장르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부 당시 문화예술정책을 조명하는 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2. 기존연구 검토와 신제도주의적 접근
1) 기존연구의 내용과 한계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과 관련한 기존연구로는 박종국(1988), 조혜정(1994), 김문조·박수호(1998), 정홍익(1992), 오양열(1995), 정갑영(1995), 임학순(1998) 등을 들 수 있다.

박종국과 김문조·박수호는 행정적인 관점에서 문화예술정책을 비판하는 단순한 논의에 머물고 있으며, 조혜정은 1970년대와 1990년대 전통문화 관련 대통령 담화문 분석을 통해 정책 담론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하효숙은 새마을 운동을 문예중흥 5개년 계획과 함께 박정희 정부의 주요 문화예술정책으로 다루고 있다. 즉,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경제적인 목표를 두면서 문화예술 관련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자연보호와 연결된 문화재 보호 운동 등으로 확대됐다는 관점이다(하효숙, 2001:3). 김현화(2016)는 박정희 정부의 문화정책을 ‘미술로 재편집된 전통’으로 규정하면서, 군인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국전과 문화예술중흥 사업을 강조하는 방향이 독려되었다고 진단했다. 김수정(2019)은 1960∼1970년대 세계의 문화 흐름 속에서 한국의 문화예술정책이 갖는 의미를 분석한 경우다. 김수정은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주요 키워드가 ‘문화’와 ‘대중’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두 키워드가 박정희 정부 시절 어떻게 규정되고 이해되었는지를 같은 시기 학문 영역에서의 문화이론과 프랑스 문화정책, 유네스크 국제규범에서의 문화 및 대중에 대한 관점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김수정, 2019:325).

이와 달리 정홍익(1992: 229-245)의 논의는 보다 통시적이고 구체적이다. 정홍익은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 시기를 전기(1960년대)와 후기(1970년대)로 각각 구분한 뒤, 전기는 제도준비기, 규제행정, 후기는 주체성에 초점을 둔 문화예술행정 시기로 진단하고 있다. 오양열(1995: 29-74)도 박정희 정부 문화행정체계를 제3공화국의 문화행정체계(1961.5-1972.10)와 제4공화국 문화행정체계(1972.10-1981.3)로 설정했다. 제3공화국 문화행정체계는 ‘문화행정의 기본적인 법체계 확립’과 ‘규제 위주의 문화행정’, 제4공화국 문화행정은 ‘민족문화창달’과 ‘민족주체성 확립의 강조’가 특징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임학순(1998: 95-119)은 문화예술 발전의 종잣돈 역할을 하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분석하여 1970년대 예술지원정책이 ‘주체적 민족문화 창달’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고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임학순, 2012: 161).

이러한 논의들은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 관련 사업과 법령, 제도 등을 연구 방법으로 활용하면서 문화예술정책의 특성을 시기별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을 문화예술정책의 태동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문화예술진흥법 제정과 연결 지어 분석한 논의는 부재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특히 문화예술진흥법을 중심으로 문화예술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관련 법령 등의 사례를 통해 맥락적으로 분석하면서, 동시에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환경과의 연결성을 살피는 시도는 찾기 어렵다.

2) 역사적 신제도주의 관점의 접근

본고의 주된 논의 대상의 하나이자 문화예술정책 태동기 주요 정책인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은 제도 변화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계획은 인간의 행위와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신제도주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의 제도란 몇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제도란 사회의 구조화된 어떤 측면을 의미하며,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는 이런 구조화된 측면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둘째, 제도는 개인 행위를 제약하며, 제도적 맥락 아래에서 이뤄지는 개인 행위는 규칙성을 띠게 되기 때문에 신제도주의는 원자화된 혹은 과소 사회화된 개인이 아니라 제도라는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개인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셋째, 제도가 개인 행위를 제약하지만 개인 간 상호작용의 결과로 제도가 변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제도는 독립변수인 동시에 종속변수로서의 속성을 지닌다. 넷째, 제도는 규칙, 법률 등 공식적인 측면을 지닐 수도 있고 규범, 관습 등의 비공식적 측면을 지닐 수도 있다. 다섯째, 제도는 안정성을 지니는데, 일단 형성된 제도는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목적에 따라 쉽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Viven, 1996: 181-198).

역사적 제도주의에서 ‘국가’란 단순히 중립적인 중재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도구도 아니라고 본다. 국가를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하나의 행위자로서 이해할 뿐 아니라 국가-사회관계, 즉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제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렇게 ‘국가’와 ‘국가-사회관계’에 대한 논쟁을 통해 역사적 제도주의가 발전해 왔기 때문에 역사적 제도주의는 정치 제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특징이다(Andre, 2000: 499-522).

역사적 제도주의는 역사적 접근을 통해 제도변화를 파악하기 때문에, 종속변수인 제도나 정책의 설명을 위해 역사적 유산이나 전통문화 등이 주된 설명변수로 채택된다. 또한 역사적 제도주의에서는 국가마다 서로 다른 제도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이유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므로, 역사가 중요한 분석요인이 된다. 그런데 역사적 제도주의에서 강조하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특정 시점에 나타난 원인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역사적 인과관계’, 특정 시점의 선택이 미래의 선택을 지속해서 제약한다는 ‘경로의존’, 사건의 발생 시점과 순서가 사회적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는 것이다(하연섭, 2016: 160).

역사적 신제도주의 관점에서 제도변화를 가져오는 요인들은 제도적 맥락, 외부 환경적 요인, 행위자 요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책 설명에 있어 유용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제도적 맥락은 정책 패러다임과 정치 및 행정 구조 등을 들 수 있는데, 정책 패러다임은 정당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서서히 제도화되지만 일단 제도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정책이나 제도 선택에 영향력을 발휘한다(Goldstein & Keohane, 1993: 35-45). 정치 및 행정 구조도 정책이나 제도의 선택, 변화에 영향을 준다. 즉 국회와 행정부의 관계, 행정부 내에서의 정책 결정 및 집행구조는 제도변화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외부 환경적 요인으로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경제적 위기 등 외부적 충격으로 인한 위기 상황이 제도변화에 영향을 준다(하연섭, 2016: 160). 위기에 직면할 때 제도는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도입하여 외부 환경과의 불일치를 시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둘째, 국가 간의 권력관계, 국제기구의 정치적 압력, 신자유주의와 같은 외부적 압력이 제도변화에 영향을 준다. 셋째, 정권 교체로 인한 최고 정책 결정자의 변화는 제도변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선거라는 합법적 제도를 통해 정권을 획득한 최고 정책 결정자는 제도와 정책의 변경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념에 부합하는 변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양승일, 2006: 57).

행위자 요인은 제도를 둘러싼 이해 관계자들의 상호 작용을 의미한다. 문화정책에 대한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행위자는 정부(공무원), 예술위원회 등 산하기관(준공무원), 공급자(예술단체 및 기관, 예술가 등), 소비자(관객 등 일반 국민) 등이 있다. 이들은 행위 주체 간 정책자원의 교환이라는 상호 작용을 통해 정책 및 제도변화 의지 및 관계의 수준 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김덕호, 2018: 42).

역사적 신제도주의 관점에서 볼 때, 후술할 제1차 문예중흥계획을 핵심으로 하는 박정희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획기적인 제도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제도 변경에 대한 당위성이 주어졌다는 인식에 따라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 변화를 문화정책의 틀 속에서 시행한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제도변화와 형성에 필요한 이해 관계자들, 즉 정부와 문화예술 관련 기관, 예술단체 및 예술가, 문화예술 소비자들과의 상호 작용이 미비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정책의 수립과 실행을 위해 수반되어야 할 정부-문화예술기관 및 단체-수용자 간 네트워크 거버넌스가 보이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측면이 있으며, 이 같은 소통 체계가 구축되었더라도 군사 정부가 주도하는 현실적 여건에서는 다양한 이해 관계자의 참여와 조정, 합의는 난항을 겪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결국 최고 정책 결정자의 제도변화 추구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협의와 설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 수립 과정에서는 이러한 논의들이 부재했다.

III. 문화예술정책 태동 상징으로서의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1. 문화예술 관련 두 법령의 맥락성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장치는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으로, 두 법령은 각각 1972년 8월 14일, 1962년 1월 10일 제정되었다.6) 두 법령은 문화예술에 대한 구체적 정의를 비롯하여 문화예술 보호와 보존, 진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처음 법률로 제정하여 법제화했다는 점에서 그 정책적 의미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문화예술진흥법은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문화의 중흥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를 보존하여 이를 활용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두 법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문화예술’(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문화재보호법)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화예술’과 ‘문화재’의 실질적 범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진흥법은 제2조에 ‘문화예술이라 함은 문학ㆍ미술ㆍ음악ㆍ연예 및 출판에 관한 사항을 말한다’로 규정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2조 1항은 ‘건조물, 전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기타의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 자료’, 2항은 ‘연극, 음악, 무용, 공예 기술, 기타의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것’을 문화재로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두 법률을 통해 문화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정책의 주요 주체이자 행위자인 국가가 무엇을 문화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라고 할 수 있다(김수정, 2019: 313).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의 ‘문화예술’과 ‘문화재’에 대한 정의를 감안할 때,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모두 국가의 공식적인 문화예술 분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7)

표 1.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의 주요 제정 법령과 정책
구분 내용 시기(연도)
주요 법령 공연법 1961
영화법 1962
지방문화사업조성법 1965
음반에 관한 법률 1967
문화예술진흥법 1972
주요 정책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설립 1972
문예진흥기금 모금 1972
영화진흥공사 설립 1973
제1차 문예중흥5개년계획(1974∼1978) 수립 1974
공연윤리위원회(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전신) 설립 1976

자료: 필자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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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문화예술진흥법은 전술한 법령 제정 목적에서 알 수 있듯 전통문화의 보호와 유지를 넘어 새로운 문화예술 창조를 통해 민족문화 중흥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화재보호법의 경우, 문화재가 갖는 ‘역사상 가치, 예술상 가치’를 반복적으로 강조8)하고 있어 이 시기 ‘문화’의 가치가 민족 정체성과 우수성을 드러내 주는 역사성과 심미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수정, 2019: 314).

이러한 논의를 정리하자면, 박정희 정부 초반의 문화예술정책은 문예중흥을 위해 두 가지 전략의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문화예술진흥법은 문화예술의 범주에 ‘연예’를 산입함으로써 대중예술 분야를 처음으로 문화예술정책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를 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문화예술진흥법 제정과 함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지금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을 설립하여 문학, 미술, 음악 등 순수예술 부문은 물론이고 연예 부문에 대해서도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김수정, 2019: 315).

둘째, 문화재보호법을 통해서는 문화재 보존과 활용을 통해 ‘민족문화’의 문화적 가치를 지키고,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추진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두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이를 위해 문화재위원회와 분과위원회를 각각 설치 운영하도록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문화예술진흥법과 대중예술 지원의 미스매치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보여왔던 대중예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도 있다.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이전에 한국적 상황의 대중예술은 경제발전의 필수요소로 간주된 대중동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통제의 대상이나 마찬가지였다(김수정, 2019: 315).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문화재와 순수예술이 공적인 보조와 지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대중예술은 지원의 사각지대였다. 대중예술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인식도 ‘문화’가 아닌 ‘대중오락’에 머물러 있었음은 아래와 같은 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서는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의 새 역사 창조를 선도하는 국민정신의 계발과 민족문화예술의 진흥 및 건전한 대중오락의 발전에 시책의 중점을 두겠습니다. (중략) 대중오락의 자율적 정화를 통해 국민 정서의 순화를 촉성할 방침입니다.

(1969년 11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의 1970년도 예산안 제출 시정 연설 중에서)

당시 박정희 정부의 대중예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대중예술이 문화예술정책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음은 물론이고, 고급예술과 구분되는 저급문화로 간주하면서 규제와 통제가 동반되었으며, 문화예술에 대한 관점 역시 엘리트주의적 시각에 기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통한 정부의 지원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순수예술과 달리 수익을 추구하는 상업적 성격이 강한 대중예술은 자생력을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예술 진흥의 범주에 ‘연예’를 포함한 것은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획기적 변화이자 대중예술 관련 정책의 진일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60∼1970년대 서구 문화의 흐름이 ‘문화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엘리트주의에서 다양한 문화 형식들을 수용하는 ‘문화의 상대성’으로 급선회하는 현상과 맞물리면서 우리나라도 대중예술 보급에 대한 기대를 높이기에 충분한 측면이 있다. 당시 서구 사회는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의 구별을 거부하는 움직임이기도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화 담론을 지배했고,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은 서로 동등한 문화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연예’라는 용어를 통해 대중예술을 정책 지원의 영역으로 분류한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으로 대중예술 진흥은 수면으로 올라오게 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대중예술 진흥 관련 내용이 포함된 법령이 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계 현장을 중심으로 대중예술에 대한 지원과 후원보다는 오히려 규제와 통제가 지속됐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다. 예컨대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사전허가제가 적용되고 이를 어기면 연행, 구금, 법적 처벌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중예술에 대한 정부 정책은 ‘대중예술 자체에 대한 규제’와 이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대중매체 탄압’의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를 담당할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와 공연윤리위원회 등이 설립되었다(김수정, 2019: 316). 1976년 설립된 공연윤리위원회는 건전한 공연풍토를 정립한다는 목적 아래 대중가요 심의와 대대적인 금지곡 지정 등의 조처를 했으며, 언론과 출판의 자율성 및 표현의 자유도 훼손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문화예술진흥법은 기본적으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지원을 전제로 하고 있고 대중예술인 ‘연예’ 영역이 여기에 포함된 사실을 고려한다면, 전술한 대중예술에 대한 규제와 통제는 법과 현실의 엇박자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박정희 정부 초기인 1961년 제정된 공연법과 이로부터 11년 후에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의 충돌에서 살필 수 있다. 공연법 제1조 총칙을 보면 ‘제반 공연에 있어서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을 육성하기 위하여 공연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세부 규정들은 대부분 규제와 통제로 이루어져 있다. 사전허가제를 비롯하여 공안, 풍속, 위생상 현저한 지장이 있다고 인정될 때 공연을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반면, 문화예술진흥법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에 대한 지원이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박정희 정부의 대중예술이 비판을 산 이유는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른 지원보다 공연법을 통한 규제와 통제 위주의 정책에 기인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가 1960∼1970년대 서구 사회에 유행하던 문화의 다양성 정책을 문화예술진흥법을 통해 최대한 구현하고, 대신 공연법을 통해선 규제와 통제를 최소화했어야 했으나, 정반대 정책이 실행됨으로써 대중예술 전반에 대한 불신을 자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박정희 정부 이후에도 이어져 1980년대 전두환 정부 때도 서구 사회의 대중예술 반향을 이해하지 못한 규제 중심의 정책이 지속됨으로써 청년 세대의 반감을 샀다.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 중 대중예술 관련 정책이 특히 논란이 되는 것은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이전인 1968년 발족한 문화공보부 출범과 연관 지을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발족 치사에서 “공보와 문화 양부에 걸쳐 이원화되었던 비능률성을 탈피해 새로운 민족문화의 가치 체계를 바로잡는 동시에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수정(2019)은 이러한 언급과 관련하여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해 대중예술을 활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을 수 있으며, 동시에 이 시기 문화예술정책이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문화적 위계질서의 해체로 특징지어지는 당시 초국적 맥락에서의 상황과 대비된다고 볼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표 2.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 제정 당시 주요 내용
구분 문화예술진흥법 문화재보호법
목적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 지원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문화의 중흥에 기여 문화재 보존과 활용으로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
정의 문화예술: 문학ㆍ미술ㆍ음악ㆍ연예 및 출판에 관한 사항 문화재:
  • 건조물, 전적, 고문서, 회화, 조각, 공예품 기타의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

  • ‘연극, 음악, 무용, 공예 기술 기타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

관련 조직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재위원회

자료: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2022) 홈페이지를 참조하여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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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각론으로서의 제1차 문예중흥계획(1974∼1978년) 분석

1. 특정 분야에 대한 정책 집중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이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 입안 및 시행의 주요 근거가 되면서 정책의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총론 성격이었다면, 문예중흥계획은 이러한 법령을 기반으로 문화예술정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각론에 해당한다. 즉, 문화예술정책 태동의 서막을 <문화예술진흥법>이 열어줬다면, 문예중흥계획은 세부적인 내용을 통해 시행을 본격화했다.

제1차 문예중흥계획은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사가 촉발했다고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한국 중흥에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다 할 것”이라고 언급했었고, 이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과 함께 문화예술진흥기금 제도 도입을 담은 문화예술진흥정책을 마련하면서 문예중흥계획이 발표되었다.

문예중흥계획은 ‘새로운 민족예술 창조’, ‘예술의 생활화’, ‘문화예술의 국제교류’ 등 세 가지 목표가 제시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예술, 현대미술, 음악, 영화, 출판, 문학 등 예술뿐만 아니라 국학에 관련된 분야들이 육성, 보호 대상으로 포함되었다.

문예중흥계획의 이 같은 비전은 몇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문화예술의 생활화는 문화예술 향유 정책을 의미하는데, 문화 관련 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순수예술을 모든 국민이 경험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의 문화예술 참여와 향유를 기조로 하는 문화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새로운 민족예술 창조는 한국 고유의 문화를 개발하여 재해석 후 소개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국악 등 전통 문화의 발전을 독려하는 것으로, 향후 국립국악원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셋째, 문화예술의 국제교류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으로 우리의 우수한 문화예술이 해외에 소개되어 결과적으로 문예중흥으로 이끄는 시도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 미술진흥사업이었는데, 이 사업에 재정 지원이 가능해짐으로써 미술가들의 국제전 참가와 국제교류 및 활동 후원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운영 측면에서 한국미술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치는 이러한 국제교류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문예중흥계획을 통해 확인된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문화유산의 전승과 계발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재를 잘 가꾸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신문화 국민정신을 계발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라며 문화유산의 전승과 계발을 독려했다(오명석, 1998: 127). 이에 따라 1차 문예중흥계획에서는 민족사관의 정립이 중요시되면서 문화재와 문화유적 발굴과 보호, 국학, 전통예술 등에 투자된 예산이 총예산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문화재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63.1%로서 전체 사업의 절반을 훨씬 넘었다(조현수, 1987: 63).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문화재 부문 강화 방안은 이후에도 계속돼 1977년에는 문화재 보수 3개년 사업(1977-1979)의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전국문화유적종합조사가 학술적으로 진행되어 국보와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 모두 172점의 문화재 보수를 시행하였다(장지정·한동수, 2013: 225).

문화재 분야 지원을 확대한 박정희 정부 문예중흥정책 지향점은 민족문화와 민족주체성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이 생활 속에서 문화유적을 접하게 했으며, 일간 신문에서는 전통예술 현황에 대한 연재물이 게재되었고, 전통에 대한 존경심과 취미의 개발 및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의 창조성을 강조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조현수, 1987: 2). 이와 함께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 민족이 겪은 과거의 경험과 지혜, 슬기를 한데 총 집약한 결정체가 민족문화라고 규정하면서, 민족문화가 전 국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임학순, 2012: 166).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문예중흥계획 논의에서 놓쳐선 안 되는 지점은 새마을운동과의 연관성이다. 문예중흥계획이 새마을운동과 함께 추진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문화예술을 국력 신장의 정신적 지주로 인식한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즉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관계를 수레의 두 바퀴로 규정하고, 경제건설과 산업화가 정신문화의 토대 위에서 조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임학순, 2012: 165).

2. 전통의 선택과 제거

박정희 정부는 특히 ‘선택해야 할 전통’9)과 ‘제거해야 할 전통’을 뚜렷하게 분리했는데, 집권 초기에는 조국 근대화에 전념하면서 ‘제거해야 할 전통’을 강조한 것이 두드러진다. 사대주의, 당쟁, 부정부패 등과 봉건적이고 비합리적 생활 습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문예중흥계획을 새마을 운동과 함께 추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예술을 국가 발전 견인에 필요한 정신적 지렛대로 인식하면서, 정신적인 뿌리이기도 한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내재하고 있는 문예중흥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동일선상에 놓고 관련 정책들을 추진한 것이다.

박정희 정부 문예중흥정책에서 가장 독보적인 것은 민족기록화사업이라는 평가도 있다. 민족기록화사업은 일본 전쟁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박정희 정부의 통치이념과 합치되는 전통과 역사의 재창조의 전형적인 실례로 분류된다(박혜성, 2003: 10). 민족기록화의 주제는 박정희 정부의 국시인 반공과 최대 업적인 경제발전과 산업화, 근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김현화, 2016: 146).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다면 박정희 정부 제1차 문예중흥계획은 단순한 문화예술 활동 지원 및 후원 정책이 아니라 근대화 담론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과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정부의 정책이자 정신혁명을 상징하는 사업으로 규정할 수 있다(김현화, 2016: 147).

1978년에 수립된 제2차 문예진흥계획은 1차 계획과 비교해 3배 이상의 예산이 편성되었는데, 1차 때처럼 지속적인 문화예술활동을 위한 여건 조성과 민족문화의 개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계기로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계획 자체가 불가피하게 수정되어야만 했다(장지정·진동수, 2016: 226).

V. 연설문과 담화문에 나타난 대통령의 문화예술 인식

1. 정신문화와 민족문화의 강조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 특성과 내용을 규명하기 위해선 관련 법령과 문예중흥계획 등 문헌분석 외에도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문화예술 인식에 관한 고찰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박정희 체제에서 대통령의 인식이 모든 분야의 국가 정책에 깊숙하고 구체적으로 반영됐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인식 체계 분석은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이해와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임학순, 2012: 163).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와 연두교서, 신년사, 각종 예술제와 문화제, 문학인대회 등 각종 예술행사 치사와 문화센터, 박물관 건립 등 문화시설 건립, 문화공보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 문화예술 관련 조직 설립 기념 치사, 정부 예산안 제출 관련 시정 연설문 등을 통해 문화예술과 관련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각종 예술행사와 정부 예산안 제출 연설 때 문화예술정책을 자주 언급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예산안 제출 시정 연설문에는 문화예술정책 관련 내용이 매년 포함되어 있었다(임학순, 2012: 163-164).

표 3. 문화예술정책 언급 대통령 연설문 유형
구분 1963∼70년 1971∼79년 관련 행사
예술행사 10 0 충북예술제, 백제문화제, 개천예술제, 한라문화제, 전주개천예술제, 남도문화제, 전국문학인대회
문화시설 및 조직 건립 3 1 금산문화센터, 종합박물관, 문화공보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회 예산안 제출 5 9
연두교서 4 0
기자회견 1 4
대통령 취임사 1 2 7∼9대
신년사 0 3
기타 2 3 학술원 및 예술원상 시상식, 제2경제운동실천국민궐기대회. 국민교육헌장선포 10주년 기념식, 제10대 국회 개원식

자료: 임학순(2012: 164)을 참고하여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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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예술정책 인식의 핵심 키워드는 정신문화와 민족문화로 압축할 수 있다. 이는 ‘경제 건설과 정신계발의 병행’(1971년 7월 30일 지방 장관회의), ‘1979년 연두 기자회견’(1979년 1월 19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제10주년 기념식 치사’(1978년 12월 5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치사’(1978년 6월 30일) 등에서 행한 연설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은 이 같은 정신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연설문에 등장하는 ‘민족문화’, ‘전통문화’, ‘건전한 문화예술’의 개념들이 정신문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용어로 파악할 수 있다(임학순, 2012 : 166).

정신문화가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의 지렛대라고 한다면, 민족문화는 문화예술정책의 핵심 영역이자 정신문화의 뿌리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1978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통문화는 우리의 정신적인 뿌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의 나무에 비한다면 우리 민족이 커나가는 뿌리는 우리의 전통문화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대통령비서실, 1978: 50-51). 이러한 민족문화를 창달하기 위하여 민족문화예술의 진흥이 필요하다는 언급도 연설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10)

또한 정신문화와 민족문화 등 박정희 체제의 이념적 측면이 우선시되면서 경제발전과 맞닿아있는 개념적 용어와 달리 ‘문화예술’이란 표현을 직접 사용하면서 문화예술의 역할을 강조한 사례도 목도할 수 있다.

1972년 9월 2일에 있었던 1973년 정부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문에서 박 대통령은 “문화예술은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 총화를 구현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여야 할 것”이라고 언급했고, 다음 해 10월 열렸던 1974년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문에서는 “이제 우리의 문화예술도 민족적 대아와 자주성에 근거해서 국민정신을 계발하고 민족의식을 제고하여 국민총화와 민족번영의 향도적 역할을 담당할 시기에 이르렀다”라고 설명했다(대통령비서실, 1973: 233-234). 이는 문화예술의 교육적, 사회적, 정치적 역할 등 다각적 기능을 주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설문과 담화문 등에서 확인된 박정희 대통령의 이와 같은 인식은 정신문화를 이끄는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문화예술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2. 청년문화 확산과 규제 정책

하지만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으로 발전과 확산의 기틀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대중예술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인식은 민족문화와 순수예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확연하게 달랐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해외에서 유입된 대중예술에 대해선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박 대통령은 1975년 10월에 있었던 1976년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에서 “외래 문화예술의 맹목적인 모방에서 탈피하여 이를 우리의 것으로 소화 흡수하는 한편, 저속하고 퇴폐적인 일부 대중예술은 정화해서 건전한 국민 기풍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다”라고 언급하였다(대통령비서실, 1975: 216). 다음 해 열린 1977년도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에서도 “사회기강을 해치고 국민정신을 좀먹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일부 대중예술을 과감히 정화해 나가겠습니다”라고 강조하였다(대통령비서실, 1976: 178).

박정희 대통령이 연설문 등에서 밝힌 대중예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정책에 상당 부분 반영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976년 공연법이 개정되면서 영화와 무대예술, 음악, 음반 등에 대해 포괄적인 심의를 맡았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가 폐지되고 한국공연윤리위원회(공윤)11)가 발족하였다. 공윤은 무대공연물, 영화, 가요 및 음반, 비디오, 광고물 등 5개 분야에 전문심의위원회를 운영했으며, 특히 무대공연물인 연극 대본의 사전심사가 악명이 높았다. 당시에는 정치적인 이유의 검열뿐 아니라 왜색, 외설, 퇴폐, 폭력적인 표현을 걸러낸다는 명분으로 검열이 진행되었지만, 정부의 이러한 조치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자의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대중예술은 물론 연극 대본에 대한 사실상의 검열 등으로 순수예술에 던진 파문도 적지 않았다.

1975년 6월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가 ‘공연 활동의 정화대책’으로 진행된 대중가요 심의 기준과 금지곡 목록 역시 대표적인 대중문화 검열 사례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러한 대책은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적ㆍ자학적ㆍ비탄적 작품, 선정적ㆍ퇴폐적 작품을 금지하는 내용인데, 그 결과 1차 130곡, 2차 44곡, 3차 48곡이 금지곡이 되었다(김창남, 2018: 198). 또한 해외 음악들도 가사의 저속성과 퇴폐성을 기준으로 방송과 음반 발매가 금지됐으며, 클래식 음악도 소련이나 동구권 작곡가와 연주가의 음악은 어떤 경우에도 공연과 음반 판매가 불가능했다(김창남, 2018: 198-199).

박정희 대통령이 시정연설 등에서 언급한 대중예술에 대한 인식이 문화예술정책으로 적확하게 투영되면서 대두된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역설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을 통해 대중예술 진흥의 토대가 마련됐음에도 실제 대중예술 분야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측면에서다. 이는 문화예술진흥법에 명시된 ‘연예’ 장르, 즉 대중예술의 진흥 정책이 실천적 선언이라기보다는 명목적 선언에 머물렀다는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이 줄곧 ‘건전’하고, ‘민족문화의 창조’와 ‘문화적 자주성 확립’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문화예술을 강조했음을 고려한다면 당시 포크음악과 힙합, 동구권 음악 등 해외 유입 문화가 주종을 이뤘던 대중예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전하지 않은 외래 예술’로 인식됐으며, 이와 같은 인식이 대중예술을 진흥하는 것이 아닌, 규제와 통제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잡게 한 것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문에 나타난 문화예술정책 이념이 주로 민족문화예술 진흥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박정희 정부가 대중예술에 대해 비판적 정책을 쏟아낸 것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산한 청년문화에 대한 거부감의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1970년대 청년문화가 형성되는 사회적 맥락에는 근대화와 동시에 진행된 매스미디어의 확대, 국가권력의 생활세계 식민화, 소비 주체로서의 대학생 증가, 미국과 서구의 60년대 청년문화의 영향력 등이 존재한다는 관점이 있다(주창윤, 2006 : 73-105).

청년문화의 태동은 각각 맥락은 달랐지만,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반문화적 성격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으로 진행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김창남, 2018: 154). 록과 포크 음악, 저항가요, 통기타, 생맥주, 미니스커트 등으로 대변되던 청년문화는 문화 담론을 일거에 흡수하면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였으나, 1974년 박정희 정부의 긴급조치가 발효되면서 위기를 맞이하였다. 청년문화가 중심이 된 대중문화를 압박한 박정희 정부는 미니스커트와 장발 단속에 이어 대마초 사건으로 젊은 포크 음악가들과 영화감독, 배우들을 구속하고, 방송 출연과 창작 활동을 금지시켰다(김창남, 2018: 156).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청년문화를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며, 포크와 록 음악에 대해선 정치적 메시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체제전복적이라는 판단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이 같은 대중예술 정책은 1970년대 청년문화의 확산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반사회적이고 반문화적 시각에 매몰되는 바람에 문화 담론 흐름이 청년문화로 이동하는 현상을 놓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부 당시의 청년문화가 정권의 거듭된 규제와 통제를 뒤로하고 오히려 확산세를 이어가 1980년대 운동권 문화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맥락성을 띤다. 즉, 정부가 주도하던 1970년대 대중예술 정책은 청년문화의 유입과 확산에 따른 문화적 헤게모니의 이전으로 이미 실효성을 상실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간파했다면 정책 궤도 수정이 이루어져야 함이 타당하지만, 오히려 규제와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것이다.

규제와 통제 중심의 청년문화와 달리 순수예술이 바탕을 이루는 전통 민족문화에 관한 관심과 지원은 각별한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부가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면서 내세웠던 주요 지원 원칙의 하나는 ‘예술의 대중화’와 ‘문화의 생활화’였다. 이것은 전통 문화유산 중에서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에 활용될 수 있는 민족문화예술이 선별적으로 지원영역에 포함되어야 하는 선별성 원칙과, 선별성의 원칙을 충족한 건전한 문화예술만이 지원영역으로 설정된다는 건전성 원칙을 갖춘 문화예술의 확산을 의미한다.

박정희 정부는 이처럼 선별성 원칙과 건전성 원칙에 기반한 문화예술이 국민의 문화생활로 전환되어 국민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방침을 수립하였다(임학순, 2012: 174). 이러한 문화예술정책의 지원 원칙은 결국 대중예술이 아닌 순수예술의 진흥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국민의 문화예술 활동 중요성을 민족문화가 바탕이 된 순수예술에서 찾으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10월 열렸던 제7회 충북예술제 치사에서 “문화 활동에 참여하고 예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몇 사람의 예술인이나 문화인이 아니라, 바로 전체 국민이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대통령비서실, 1965: 301).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술의 대중화’와 ‘문화의 생활화’는 문화예술정책의 본격적 실천이자, 동시에 현재의 문화예술 향유 정책의 시발점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 박정희 정부 문화예술정책이 1960년대부터 예술가를 지원하는 것에서 벗어나, 국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돕는 방향으로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표 4.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에서 언급된 문화예술정책의 목적
일시 연설문 주요 내용
1966년 1월 대통령 연두교서 민족 고유의 우수한 문화와 전통 재확인, 새로운 문화창조
1967년 10월 정부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 민족문화의 앙양과 발굴, 고유 전통문화의 보존과 창달
1971년 9월 정부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 민족문화의 전통 계승발전, 민족문화의 전통과 민족사상을 체계 있게 정립. 민족예술의 전승 보급
1973년 10월 정부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 예술의 생활화, 무대예술 진흥
1974년 10월 정부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 문예중흥5개년 계획 본격 추진, 빛나는 문화예술의 계승 및 창의적 계발

자료: 임학순(2012: 173)을 참고하여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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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결론 및 논의

문화예술정책의 태동은 제도와 조직, 재정 시스템의 구비를 의미한다. 한국적 상황의 문화예술정책은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으로 제도(법령)와 조직(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재정(문화예술진흥기금)이 갖춰진 박정희 정부 때 태동했음을 본고는 확인하였다. 본고는 박정희 정부 시절이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정책 시행의 목적 및 수단 등 방법론과 성과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논란을 유발했음을 또한 확인하였다.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에 오늘날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근간을 제공하고 있는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됨으로써 ‘한국 문화정책의 원형’ 형성이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문화예술 관련 모법의 제정으로 체계성이 떨어지고, 지원 근거가 약했던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본격 지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 법령이 토대가 되어 훗날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 문화예술후원 활성화법과 같은 다른 문화예술 지원 법령의 제정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 정부 당시 문화예술정책의 주요한 방향과 세부적인 사업 내용이 집약된 제1차 문예중흥계획의 시행도 문화예술진흥법 제정에 기인하였다. 결국 총론적으로는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 등의 문화예술 관련 주요 법률이, 각론적으로는 제1차 문예중흥계획에 입각하여 문화예술정책 태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문화와 순수예술을 중심으로 한 ‘진정하고 건전한 문화’ 기조가 문화예술정책 전반을 규정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 잡으면서 정권 탄생의 정당성 확보와 정권 유지를 위한 세부 사업 추진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이 정부의 문화예술정책 입안에도 상당 부분 반영되었음을 시정 연설 등 연설문과 담화문 분석을 통해 확인하였다. 박 대통령은 매해 시정연설에서 문화예술 진흥의 목적이 국민정신의 순화와 민족문화의 창달임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정신을 계발하기 위해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를 규제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내었다. 즉, 민족문화를 토대로 하는 순수예술은 육성하고 대중예술은 통제하려는 발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문화예술정책으로 그대로 접목되어 민족문화 계승과 발전을 위해선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외래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예술은 공연법을 적용하면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와 공연윤리위원회를 통해 철저히 규제하였다. 이것은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이중적 접근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대중예술에 대한 진흥 규정이 있는 문화예술진흥법을 통해 청년문화를 육성하기보다는 공연법 등을 통해 통제와 규제에 치중함으로써 1970년대 우리나라 대중예술 발전의 발목을 잡게 한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본고는 아래와 같이 논의를 마무리하며 정책적 제안을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박정희 정부는 문화예술정책 태동기로 문화예술진흥법 제정과 제1차 문예중흥계획 등을 통해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의 기반을 닦았다는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전통문화를 포함한 순수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두드러진 반면, 순수예술과 동반자 관계로 볼 수 있는 대중예술은 오히려 지원에서 소외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문화예술진흥법에 대중예술을 진흥의 영역에 산입했는데도 이를 정책 추진에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고, 대신 공연법을 활용하여 저속성ㆍ퇴폐성 등을 이유로 예술작품에 대한 사전심의와 검열 등 규제와 통제 강화를 지속함으로써 문화예술정책의 일관성을 훼손하였다. 박정희 정부 당시 순수예술에 대해서도 심의와 검열 등이 적지 않았지만, 자유분방함의 특성을 내재한 대중예술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규제와 통제 속에 놓여야 했다.

이와 같은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의 공과와 시행 착오는 현재의 정책에 시사점을 던진다. 박정희 정부 이후의 여러 정부가 문화예술의 예술적·경제적 가치를 반영하고, 순수예술의 산업화와 대중예술의 대세적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순수예술의 산업화와 함께 K팝과 K무비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예술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은 정권의 교체 여부와 상관없이 추진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진화적인 추세의 문화예술정책에도 불구하고 무용 등 순수예술 장르의 향유와 소비는 문화예술정책 태동기때와 비교하여 크게 변화가 없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것은 21세기 한국 문화예술정책에 부여된 과제로, 다음 연구 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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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문화예술진흥법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2년 8월 14일 제정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 제정된 대표적인 문화예술 관련 입법은 국립극장설치법(1950년 5월 8일 제정), 문화재보호법(1962년 1월 10일), 공연법(1961년 12월 30일), 영화법(1962년 1월 20일), 음반에 관한 법률(1967년 3월 30일) 등이다.

문화예술진흥법 제2조는 문화예술의 범주와 관련하여 “문화예술이라 함은 문학ㆍ미술ㆍ음악ㆍ연예 및 출판에 관한 사항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범주는 이후 수차례 법령 개정을 통해 개념적 정의가 확대되었다. 1987년 11월 28일 법령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문화예술의 범주에 무용, 연극, 영화가 추가되었고, 1995년 1월 15일 개정에는 미술(응용미술 포함)과 국악, 사진, 건축, 어문이 포함되었으며, 2013년 7월 16일 개정에는 만화가 편입되었다.

‘대중’은 문화정책이 국가 정책의 공식적 구성 요소로 자리 잡게 된 1970년대부터 탄생한 개념이다. 국가주도형 산업화가 본격화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중’이 형성된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이란 계층이 형성된 서구와 달리 우리는 빠른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단기간 내에 형성된 특징이 있다.

문화예술진흥법에 설립 근거를 둔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관련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문화예술진흥기금 모금이 시작되고, 제1차 문예중흥5개년 계획 수립의 긍정적 관점이 있지만, 유신체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전략으로 조성되었다는 부정적 시각이 대립한다.

문화예술정책 태동기인 1960∼1970년대는 문화예술 관련 입법이 두드러졌다. 문화예술진흥법과 문화재보호법 외에도 공연법(1961년 12월 30일), 지방문화사업조성법(1965년 7월 1일), 영화법(1962년 1월 20일), 음반에 관한 법률(1967년 3월 30일) 등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문화예술정책을 위한 일정한 법체계 확립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 당시 순수예술의 주요 장르인 연극과 무용은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예술 범주에 들어있지 않았다. 연극과 무용이 법적으로 문화예술에 편입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7년 11월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을 통해서다.

<문화재보호법=의 문화재 정의 조항인 제2조 2항은 ‘연극, 음악, 무용, 공예 기술, 기타의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으로, 3항은 ‘패총, 고분, 성지, 궁지, 요지, 유물포함층 기타 사적지와 경승지, 동물, 식물, 광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예술상, 학술상 또는 관상상 가치가 큰 것’이라고 각각 서술하고 있다.

국난극복의 역사, 무인들의 구국 영웅들, 신라의 통일업적,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 장려, 문화정책 등을 의미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11월 10일 열린 진주개천예술제 치사에서 “우리는 지난달 고유한 민족문화를 찬연히 개최시킨 선조들의 그 예지와 창의력을 이어받아 주체 의식과 자립정신의 토대 위에 새로운 민족문화예술을 개발해 나가는 데 힘써야 하겠다”라고 언급했다.

1976년 5월 발족한 한국공연윤리위원회는 1996년 10월 위헌 판결로 공연예술진흥협의회라는 과도 체제를 거쳐 1998년 6월 해체되면서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새로 발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