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산타클로스와 벌거벗은 임금님
예술(인)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보조금은 마치 성탄절 선물과 같다. 산타클로스의 선물은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아니라 오직 착한 아이들만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예술지원금은 아무에게나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탁월한” 예술인을 선별하여 제공한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산타는 모든 것을 이미 다 꿰뚫어 알고 있기 때문에 누가 진짜 착한 아이인지 바로 가려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가는 누가 진짜 훌륭한 예술인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적격자(지원금을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춘 예술인)를 선별하기 위한 심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적격자를 가려내려는 통상적인 방법은 소수의 전문가들이 주어진 기준과 원칙에 의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집단심의 방식이다. 그런데 불확실성과 불규칙성으로 가득한 예술세계에서는 이러한 심의방식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객관적으로 누가 진정 탁월한 예술인인지 선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한계를 무시하는 것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이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우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차를 보며 (있지도 않은) 그 옷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헛수고에 불과하다. 이 민망한 상황을 바로잡는 첫 걸음은 임금님이 벌거벗었음을 다 같이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예술지원에 관한 한 국가는 산타클로스보다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더 가까운 존재이다. 이 논문은, 마치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치는 아이와도 같이, 예술지원사업에 있어서 기존의 심의방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차라리 제비뽑기로 대상자를 선발하는 게 낫다고 제안한다. 단 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의 정당성 여부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이 논문은 예술(인) 지원금 자체는 주어진 상황으로 간주하고 그 수혜자를 선정하는 심의제도의 타당성에 대해 논의한다.
II. 판단오류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다수의 신청자들 중에서 일정한 수의 적격자들을 선별해내려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면에서 심의절차는 마치 선다형 문제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수험생이 보기들 중에서 고른 답이 정답이 아니라면 판단오류(judgement error)가 발생한 것이다. 어떤 반 학생들이 동일한 문제를 푼다고 할 때, 이들 간에 항상 완벽한 의견의 일치가 일어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동일한 문제라고 해도 각자의 판단은 다르기 마련이다. 카너먼 등(2022)은 인간의 판단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오류의 원천으로 편향(bias)과 잡음(noise)을 지적한다. 편향은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정답에서 체계적으로 이탈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반면 잡음은 답을 고르는 과정에서 임의적으로 나타나는 변산성을 뜻한다. 잡음은 다시 두 종류로 나눠진다. 먼저 수준잡음(level noise)은 동일한 문제에서 수험생 개개인에 따른 편차 혹은 변산성을 말한다. 그리고 패턴잡음(pattern noise)이란 동일한 수험생이 동일한 문제를 반복해서 풀 때 관측되는 변산성을 의미한다.
시험문제에서 정답을 고르는 작업은 예측적 판단(predictive judgement)이다. 예측적 판단의 정확도는 사후적인 평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입사 지원자들 중에서 훌륭한 인재를 선발해 내려는 면접담당관의 결정은 채용된 직원들의 추후 실제 업무실적과 비교해 보면 그 정확도를 계산할 수 있다. 사전 예측과 사후 평가가 얼마나 근접하게 공변(co-vary)하는지를 알려주는 척도로는 일치백분율(percent concordant)과 상관계수(correlation coefficient)가 있다. 그런데 인재 채용에 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대단히 흥미롭게도, 면접 판단과 사후 결과의 상관계수는 불과 0.28(일치백분율 59%)에 불과하다(Kuncel et al., 2013).
예측적 판단에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불확실성과 무지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완전한 정보로 인해 완벽한 예측이란 불가능해진다. Tetlock(2005)의 연구에 의하면 정치적 사건에 대한 소위 전문가들의 예측 정확도는 “대략 다트판에 다트를 던져 예측하는 침팬지의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카너먼, 2022: 206). 하지만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그 전문가들은 자신의 예측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사를 설명하는 명료한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자신만만하게 예측했지만 결국은 가장 정확하지 않은 예측을 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실상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을 예측 가능하다고 믿는 것을 카너먼(2022: 211)은 “무지의 부정”이라고 불렀다.
객관적인 정확도가 그토록 낮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카너먼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감정적 보상’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래를 예측할 때 직감에 귀 기울이면서 좋은 판단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 때 결정을 내린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알고 있다’는 확신은 판단의 내재적 신호가 된다. 이러한 직관적인 확신이 주는 감정적 보상은 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객관적 무지가 클수록 주관적 확신이 주는 감정적 보상의 힘은 커지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어려운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읽지도 않을 참고서들만 잔뜩 사오는 학생과도 비슷하다. 참고서를 많이 사놨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한 감정을 북돋우고 시험에 완벽히 대비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잘 볼 것이라는 주관적 확신이 곧 객관적으로도 높은 점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Ⅲ. 산타 마을의 ‘착한 아이 선정’ 시스템
예술 보조금을 지원해줄 훌륭한 적격자를 선정하는 것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착한’ 아이를 선별하는 작업과 같다. 산타 마을에서 ‘착한’ 아이를 선정하려 할 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산타클로스가 모든 선정작업을 직접 담당하는 시스템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 둘 중 하나로 확실하게 구분된다. 둘째, 산타는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전지적 존재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판단의 오류는 발생하지 않는다. 즉 착한 아이들은 누구나 빠짐없이 선물을 받고, 나쁜 아이들은 아무도 선물을 받지 못한다. 이것이 완벽한 판정이 이루어지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산타가 자신의 업무를 요정들에게 위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시스템에서는 두 번째 전제가 달라진다; 요정들은 산타와 달리 전지적 존재가 아니다. 즉, 무지한 요정들은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미리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 중 똑똑해 보이는 몇몇 요정들로 ‘착한 아이 선정’ 심의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기도문(신청서)을 받아 미리 준비된 기준에 의거하여 채점하고 누구에게 선물을 줄 지 결정한다. 여기서 세 번째 전제 혹은 믿음이 필요해진다; 요정들은 무지하지만 충분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정확한 판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요정들(전부 혹은 일부)이 이 정보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선정결과를 왜곡한다면 진짜 착한 아이가 선물을 못 받거나 반대로 나쁜 아이가 선물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이 대리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요정들은 사심 없이 산타의 대의를 충실하게 받드는 존재들이다.
심의 요정들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다음 해 그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평가함으로써 확인하게 된다. 여기서 다섯 번째 전제가 등장한다; 착한 아이로 선정된 아이들이 진짜로 착한지 여부는 사후평가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선물 받은 모든 아이들이 그 후 실제로 착하게 살았다고 판명되면 요정들의 사전 예측은 정확했다고 판명된다. 반면 만약에 선물 받은 아이들 중에 일부(혹은 전부)가 나쁜 짓을 했다든가 혹은 선물을 못 받은 아이들 중 일부(혹은 전부)가 실제로는 매우 착하게 살았다면 요정들은 판단오류를 범한 것이 된다.
요정 심의위원회의 판단에 오류가 발생한다면 그 원천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심의에 사용한 기준 혹은 준거체계가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 있다. 잘못 되거나 편향된 심의기준은 수정, 폐지 혹은 교체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심사를 담당한 요정들의 불완전성(전문적 식견 부족, 사적 친분관계 등) 때문일 수도 있다. 판단오류를 자주 많이 범하는 요정은 퇴출시키고 더 나은 요정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착한 아이 심의결정의 오류를 줄이려면 이처럼 기준체계 그리고/혹은 심의위원의 불완전성을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산타와 달리 근본적으로 무지한 존재인 요정들이 심의를 담당하는 한, 어떤 식으로 제도를 개선하건 판단오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Ⅳ. 예술지원 심의제도
통상적으로 심의제도라 하면 ‘지원(Apply)-심의(Review)-선정(Select)’ 방식의 결정 시스템을 의미한다. ‘지원’은 보조금을 희망하는 예술인들이 신청서 및 관련 자료들을 제출하는 단계이다. 그리고 ‘심의’는 보통 대상사업별로 소수의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심의위원회에서 각 신청자에 대한 서류심사, 인터뷰, 실연심사 등을 진행하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선정’은 심의위원들의 평가와 논의를 거쳐 최종 지원대상자를 선별하는 단계이다. 물론 실제로 예술지원 프로그램들은 매우 다양하며 구체적인 정책목표 및 선정절차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지원 대상자를 선발하는 심의제도의 근본적인 구조는 대부분 A-R-S 방식으로 동일하다.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산타클로스가 직접 착한 아이들을 판정하는 시스템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아무리 전문가라 해도 결코 산타와 같은 전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심의위원들은 마치 산타 마을 요정들처럼 불확실성 속에서 정답을 찾아 헤매는 무지한 존재이다. 따라서 통상적인 심의제도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요정들의 대리 시스템처럼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A-R-S 방식의 메커니즘이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신청자들 중에 진정한 적격자들은 지원대상자로 선정되고 부실한 부적격자들은 탈락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심의위원들의 판단이 정확하고 아무런 오류가 발생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심의과정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제해결 과정에서 정답이 아닌 오답을 택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잘 몰라서인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경우이다. 예술지원 심의제도의 설계 및 운영에서 위의 다섯 가지 전제들 중 특히 3번(정보)과 4번(공정성)에 각별한 주의가 기울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먼저, 무지를 극복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정확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다. 정보는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필수 요건이다. 신청자 개개인에 대해 잘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심사위원들은 누가 적격자인지 정확히 판정할 수 있다. 또한 의도적인 오답을 방지하는 길은 심의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요컨대 심의위원들이 비록 전지적 존재는 아니지만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공정하게 심사한다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원 신청자들에게 각종 서류를 제출하게 하고 인터뷰 혹은 실연심사를 하는 것은 결국 신청자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는 것이다. 심의위원 선발, 심의위원회 구성, 심의 기준 및 절차 등에 관한 각종 까다로운 규정들은 결국 심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Ⅴ. 심의제도의 제약된 합리성
현실의 A-R-S 심의제도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판단오류의 발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예술지원사업의 경우, 과연 누가 장차 그 사업의 목적에 부합되는 훌륭한 성과를 거둘 것인지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적격자를 고르는 판단이 잘못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답을 알기 어려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편향과 잡음이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제약할 여지가 많아진다. 즉, 심의과정에서 적격자와 부적격자를 구분해내는 판단에는 항상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제 3번은 유지하기 어렵다.
판단오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예컨대 O/X 문제를 푸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판단오류란 정답이라 생각하고 선택한 답이 실상은 오답인 경우를 말한다. O/X 문제풀이에서 정답을 맞히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답이 O인 문제에 대해 O라고 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답이 X인 문제에 대해 X라고 답하는 것이다. 전자를 참긍정, 후자를 참부정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판단오류가 발생하는 경우 역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답이 O인 문제에 대해 X라고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답이 O인 문제에 대해 X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전자를 거짓부정, 후자를 거짓긍정이라 한다. <표 1>은 판단오류의 이러한 쌍대성을 나타낸 것이다(심준섭, 2004: 135).
판정치 | True | False |
---|---|---|
진실치 | ||
True |
참긍정 (합리적 판정) |
거짓부정 (판단오류) |
False |
거짓긍정 (판단오류) |
참부정 (합리적 판정) |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다수의 신청자들 중에서 일부를 적격자로 지정한다는 점에서 O/X 문제와 같은 이분법적 의사결정에 해당한다. 그래서 거짓긍정과 거짓부정이라는 두 종류의 판단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심의에 있어서 불확실성이란 기금지원을 받아 사업목적(예를 들면 예술진흥)에 기여할 진정한 적격자가 누구인지 미리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의과정에서 적격자로 판단되어 수혜자로 선정된 자가 사업수행 후 알고 보니 실은 부적격자로 판명될 수도 있다. 이는 부적격자를 선정한 거짓긍정의 오류이다. 반대로 심의과정에서 부적격자로 판단되어 탈락된 자가 나중에 보니 훌륭한 성과를 거둔, 진정한 적격자였을 수도 있다. 이는 적격자를 탈락시킨 거짓부정의 오류이다. 예술지원 심의제도처럼 다수의 후보군에서 소수의 적격자를 선정하는 경우 거짓긍정 오류에 대해서만 신경 쓰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거짓긍정은 사후평가를 통해 적발될 수 있는 반면 거짓부정의 경우는 판단오류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드러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심의제도의 특성상,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원천이 하나 더 있다. 지원신청자의 적격성에 대한 판단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제출한 정보를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때 포장역량이라는 변수가 심사위원들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하게 된다. 포장역량이란 ‘자신의 역량을 타인이 인정하도록 보여주는 능력’을 의미한다.1) 심의과정에서 채점되는 점수는 각 신청자의 예술역량에 대한 평가가 100% 반영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류나 인터뷰가 어떻게 포장되어 있느냐 역시 채점점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포장역량이 많은 후보는 자신의 실제 예술역량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반대로 포장역량이 부족한 신청자는 자기의 실제 수준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건 100% 정확한 채점이 아니기 때문에 적격자 선정과정에서 판단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심의결정의 오류를 야기시키는 불확실성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김정수, 2007). 첫째, ‘미지(未知)의 불확실성’은 확실한 정답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다만 의사결정자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이다. 이는 미래가 확정되어 있지만 지금은 감춰져 있기 때문에 정답을 맞히기 어려운 상황이다. 둘째, ‘미완(未完)의 불확실성’은 정답 자체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지금은 정답을 알 수 없는 경우이다. 이 경우 무엇이 정답인지는 미래에 가서야 확정되기 때문에 지금 어떤 판단을 내리든 결국은 틀린 선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지의 불확실성 하에서는 의사결정자의 선택과 무관하게 정답은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미완의 불확실성 하에서는 현재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미래에 무엇이 정답이 되느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2)
예술지원 보조사업의 경우, 심의결정의 정오(正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있는 결과물(예술적 성과)은 미래에 가서야 창출된다. 따라서 예술지원 심의제도의 합리성을 제약하는 것은 미완의 불확실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판단오류의 쌍대성이 한층 더 복잡하게 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신청자 중 실상은 자격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잘못 선정된 사람은 적격 판정을 받았다는 그 사실로 인해 사기가 올라 열심히 노력하게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본래의 사업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말하자면 진짜 자격이 있어서 적격판정을 받았다기보다는 적격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판정 자체만 보면 거짓긍정의 오류이다. 하지만 그 잘못된 판정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옳은 결정이 된 것이다. 이를 ‘간택-회심 효과’라 부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낙선-분발 효과’도 있을 수 있다. 즉, 실제로 자질이 부족하여 탈락했는데 이에 자극받아 더욱 분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이룰 수도 있다. 사실 공모전에서는 낙방했지만 그 후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은 사례는 예술사에 허다하다.
물론 각각의 경우에 반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즉, 적격판정을 받고 안주하다가 결국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간택-안주 효과’). 또는 부적격판정에 낙심하여 자포자기함으로써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다(‘낙선-낙심 효과’). 전자의 경우는 원래 옳은 판단(참긍정)이었으나 오히려 그 판정으로 인해 거짓긍정의 오류가 발생한 셈이다.3) 후자의 경우, 거짓부정의 오류가 발생했었다가 그 잘못된 판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옳은 결정(참부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 미래가 정해지지 않은, 정답이 미리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더 엄격하고 까다롭게 따져본다고 해서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어떤 효과가 나타날 것인지 미리 알 수가 없다. 미완의 불확실성 하에서는, 미완의 불확실성과는 달리, 예측과 통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정비용을 높인다고 해서 결정의 합리성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 3번의 타당성은 더 이상 인정될 수 없다.
예술지원 심의제도의 합리성을 제약하는 보다 근본적인 난제는 한마디로 정답의 부재(혹은 불투명성)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산타 마을의 착한 아이 선정시스템이나 예술지원 심의시스템 모두 공통적으로 소위 ‘정답’의 존재를 당연시한다(전제 1번). 그리고 심의결정의 오류 여부는 사후평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다(전제 5번). 사실 판단오류라는 것도 ‘정답’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다. 만약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판단오류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설령 정답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한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판단의 오류가 발생했는지 여부를 판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술지원 심의제도의 이러한 한계는 예술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구분하는가? 좋은 예술(인)이란 무엇인가? 훌륭한 예술(인)과 그렇지 못한 예술(인)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예술적 수월성(artistic excellence) 판정에 필요한 전문성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예술적 성취 혹은 성과(performance)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4) 과연 예술의 세계에 모든 사람이 승복하는 ‘정답’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과연 누가 완벽하고 권위 있는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미국의 유명한 포크락 가수 Bob Dylan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을 때의 뜨거운 논쟁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예술계에서 어떤 예술인 혹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5)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당초의 평가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비디오 아트의 대부 백남준은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예술 거장으로 존경받지만 처음에는 반쯤 미친 기인(奇人) 정도로 취급받았었다(서울경제. 2019).
심의제도가 당초 취지대로 잘 작동하는지 알아보려면 지원대상자로 선정된 예술인들이 과연 진정한 적격자였는지 따져보는 사후평가가 필요하다. 즉 보조금을 지원받은 예술인이 과연 사업목적에 완전히 부합되는 훌륭한 성과를 실제로 거두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적격자를 골라내는 심의결정이 사전의 예측적 판단이라면, 선정된 예술인들의 실제 성과를 측정/채점하는 것은 평가적 판단(evaluative judgement)이다. 예술지원사업을 수행하는 공공기관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후평가를 시행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후평가제도는 “사업계획 대비 실제 수행 내용의 일치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친다. 많은 현장 예술인들은 현재의 사후평가가 “행정적 절차 충족이나 지원금 관리 차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9: 85).
사실 예술적 성취 혹은 성과에 대한 완벽한 평가판정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6)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공공예술기관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후평가든 혹은 각 기관 내부적으로 실시하는 개별 사업들에 대한 사후평가든 그 현실은 결코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한국문화정책개발원, 200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2). 기껏해야 행정적 절차와 규정을 잘 준수했는지 감사하거나 혹은 몇몇 기초적인 통계수치를 제시하는 것이 고작이다. 예술지원금 사업의 성과에 대한 충실한 질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심의결과가 과연 정확한 판정이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것은 기관 담당자의 고의적인 업무태만이나 실수가 아니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설령 사후평가 결과가 신뢰할만한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방법론 차원에서 볼 때, 현실적인 난제가 하나 더 있다. 판단오류의 전모를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선정된 예술인들 뿐 아니라 탈락자들에 대한 사후평가도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보조금 지원받은 예술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후평가는 참긍정/거짓긍정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자료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참부정/거짓부정 여부까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당초 지원했던 모든 후보들에 대한 사후평가가 전부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선정자와 탈락자 두 그룹 간 비교가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정확한 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선정결과 발표 후에 모든 탈락자들까지 일일이 추적해서 그 성취에 대한 사후평가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탈락자 그룹의 사후평가에 소요될 비용을 감당하기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예술적 성취에 관한 판단에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정답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다. 설령 정답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명백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 즉 가장 근본적인 가정인 전제 1번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선정자들에 대한 사후평가가 과연 정확한지 아니면 오류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이는 곧 전제 5번 역시 타당하지 않음을 뜻한다. 사후평가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면 예측적 판단의 정확성 정도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사실 예술지원사업에서 심의위원들의 판정이 실제로 정확했었는지에 대한 사후평가는 찾아볼 수도 없다. 과연 진정한 적격자들이 지원금을 받았었는지 혹은 반대로 실상은 부적격자인데 수혜자로 잘못 선정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거나 확인 불가능하다면 애당초 판단오류 여부를 확인하려는 시도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즉 심의과정에서의 판단이 과연 합리적이었는지 아니면 오류였는지 그조차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Ⅵ. 벌거벗은 임금님의 무(모)한도전
이처럼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본질적으로 의사결정의 합리성이 심각하게 제약된 시스템이다. 성공적인 작동을 위한 핵심 전제들이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심의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들이 수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제도적 변화 노력도 헛수고에 그칠 뿐이다.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리라 믿고 덤비는 무모한 도전일 뿐이다.
예술지원 심의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은 대부분 정보수집과 공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이 두 가지가 정확한 의사결정을 위한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정보수집은 무지로 인한 판단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대응책이다. 충실한 정보는 불확실성을 감소시켜서 의사결정의 합리성 제고에 도움이 된다. 양질의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보다 엄정한 계산과 치밀한 추리가 가능해진다. 그 결과 미래 예측의 정확도는 높아지고 판단의 오류 가능성은 줄어들 수 있다. 많은 지원자들 중에서 적격자를 가려내야 할 때, 흔히 각종 다양한 증빙자료를 제출하도록 한다. 또한 인터뷰를 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과 항목들로 구성된 채점표를 놓고 꼼꼼하게 점수를 매기도록 한다. 이는 결국 지원자에 관한 보다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입수ㆍ처리함으로써 심의과정에서 판정의 정확성을 높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공정성 제고는 심의위원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의도적인 판단오류를 제어하기 위한 대책이다. 심의과정에서 개인적인 친분을 우선시하거나 부당한 청탁 혹은 압력이 용인된다면 적격자가 탈락되고 부적격자가 선정될 우려가 있다. 정확한 판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오직 전문적인 식견에 의해 공정한 심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심의위원들을 선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까지 조금이라도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쓰게 된다. 사실 심의제도 개선에 관한 모든 연구와 현장토론에서 항상 제1번으로 강조되는 것이 바로 공정성 제고이다(임학순, 2001;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3; 한국문화예술진흥원, 200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 9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2: 99).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뭔가를 얻기 위한 노력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심의판정의 합리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개선노력 역시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정보를 많이 수집하려 할수록, 그리고 결정과정을 더욱 공정하게 만들려 할수록 그에 소요되는 비용 또한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결정이 이루어지는 데 소요되는 제반 비용 및 불편함을 ‘결정비용(decision cost)’이라 하는데, 이는 직접비용과 간접비용으로 구분된다(김정수, 2007). 직접비용은 정책을 결정하는 주체가 지불하는 비용이고, 간접비용은 정책대상자가 부담하는 비용이다. 지원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적격성을 입증하기 위해 준비ㆍ제출해야 하는 각종 증빙자료가 많을수록 비용과 불편함은 커지게 된다. 지원기관 입장에서는 수많은 서류 검토, 번거로운 절차 관리, 심의위원 풀 구성 및 선정 등 제반 행정비용이 많아지게 된다. 심의위원 입장에서는 엄격하게 검토해야 할 참고자료가 많을수록 그리고 채점체계가 복잡할수록 더 많이 수고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의제도 개선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엄격하고 까다로운 자격요건 및 심사기준의 강화”를 주문한다. 그 기저에는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대외적으로 신호ㆍ과시하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최종원, 1999: 268). 심사기준을 강화함으로써 결정절차의 공정성을 과시한다고 해서 판정의 합리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택과정에서의 불공정성 시비”로부터 지원기관과 심의위원들을 보호하는 좋은 방어막은 될 수 있다. 사실 예술지원사업의 최종 선정결과가 발표되면 거의 언제나 심의결과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빚어지곤 한다(홍경한·정대웅, 2005; 사혜정, 2006). 하지만 심의과정의 공정성이란 어디까지나 진정한 적격자를 잘 가려 뽑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지고지선의 목표가 아니다. 그런데 진정한 적격자 여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선정 결과를 비판하는 이들을 보면, 그것이 과연 정답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심의의 공정성·투명성 결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훨씬 더 드세다.7) 그러다보니 심의결과를 발표할 때 최적의 후보자들이 선정되었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심의가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졌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예술지원기관 입장에서는 판정의 합리성보다 비난 회피(blame avoidance)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Weaver, 1986).
그렇다면 과연 정보수집과 공정성 제고를 위해 많은 공을 들이면 심의판정의 합리성도 높아지는가? 보통의 경우라면 결정비용과 결정의 질(decision quality)은 어느 정도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큼 시험문제를 잘 맞출 것이다. 따라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즉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높이려면 그만큼 결정비용을 높이는 것이 현명한 대책이다. 그러나 난이도 최상급의 소위 킬러문항들만 출제된다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도 정답을 맞힐 가능성이 그에 비례해서 높아지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행동경제학의 선구자 Kahneman(2003: 1469)이 지적하듯이, “집중적인 노력 그 자체가 반드시 합리적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나 빈둥빈둥 놀았던 학생이나 성적 차이가 그다지 많이 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따져봐야 할 것이 바로 ‘계산의 효율성(computational efficiency)’이다(Simon, 1976). 이것은 투입되는 계산비용과 산출되는 결정의 질의 비율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즉, 결정과정의 개선을 위해 투입되는 비용과 그로 인해 결정의 질이 향상됨으로써 얻어지는 편익을 함께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김영평, 1991: 32). 예를 들어, 10만큼의 계산비용을 투입했는데 결정의 질이 50만큼 좋아진다면 이때 계산의 효율성은 5(50÷10)가 된다. 만약 계산비용 100에도 불구하고 결정의 질이 1에 불과하다면 이때 계산의 효율성은 0.01(1÷100)밖에 되지 않는다. 심의제도 개선방안에 관한 논의에서 이 개념은 어떤 함의가 있을까?
예술지원사업의 심의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이 대단히 높고 정답이 부재(혹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이다. 마치 난이도 최상급 킬러문항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심의판단의 품질(합리성)을 높이는 데 필연적인 한계가 있다. 말하자면 계산비용이 100에서 1,000 혹은 10,000으로 높아진다고 해도 결정의 질은 1 정도로 거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 계산 효율성을 고려한다면 계산비용을 1,000이나 10,000 투입하는 것보다는 100만 투입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사가 된다.
그런데 만약 결정의 질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바꿔 말해서 심의판정의 결과적 합리성 정도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거나 혹은 측정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산출의 정확한 수준이 불확실하거나 무시되는 경우, 투입 수준이 시스템의 성능을 가늠하는 잣대로 대치되기 쉽다. 특히 ‘투입이 많으면 당연히 산출도 많아질 것’이라는 어리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투입을 곧 산출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즉 계산비용을 많이 높이는 것이 곧 판단의 질도 자동으로 높이는 길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의절차와 규정을 더욱 더 까다롭고 정교하게 다듬으려고만 한다. 하지만 정작 그러한 소위 제도개선으로 인해 심의판정의 질이 실제로 얼마나 더 나아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확인할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다. 이는 마치 시험 볼 때마다 정작 점수 확인은 안 하고 (실은 못 하고) 그저 시험 잘 치르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떠드느라 헛수고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판정의 질 및 계산 효율성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결여된 심의제도 개선노력은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공산이 크다. 심의판정의 합리성이 진실로 제고된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많은 결정비용을 쏟아 붓는 데만 몰두한다. 그런데 앞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예술지원 심의제도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제약이 있다. 말하자면 아무리 결정비용을 높이고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심의제도의 정상 작동을 위한 핵심 전제들이 무너진 마당에 공정성(전제 4번) 하나만으로 판단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의절차의 공정성이 강화되면 완전무결한 판정이 도출되리라는 것은, 고도의 불확실성 하에서는, 그저 ‘환상’(fantasy)이나 ‘신화’(myth)에 불과하다(김정수, 2007: 67). 열심히 노력하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합리적 의사결정에 대한 비합리적 기대’가 아닐 수 있다.
현재와 같은 A-R-S 방식의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벌거벗은 몸으로 시가지를 행진하는 임금님에 비유할 수 있다. 실상은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임금님을 보고 옷의 색깔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느니, 디자인을 저렇게 바꿔야 한다느니 하는 조언은 공허한 소음에 불과하다. 만약 임금님의 옷을 더 멋있게 바꾸려고 돈을 더 쓴다면 사기꾼 재단사의 지갑만 채워줄 뿐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한들 벌거벗은 임금님이 실제로 더 멋있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욱 처량하고 청승맞게 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Ⅶ. 제비뽑기를 허(許)하라!
예술의 세계는 과학이나 기업경영의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술적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기준 같은 것은 없다. 훌륭한 예술(인)에 대한 통일된 정의도 없다. 어떻게 하면 탁월한 대가 혹은 불후의 명작이 나오게 되는지 알려주는 명확한 인과관계나 법칙도 알 수 없다(Throsby, 2001). 불확실성과 불규칙성으로 가득한 예술의 세계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킨다. 이런 요지경 세상에서 과연 심의제도의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한다고 해서 정말로 오류 없는 정확한 판정이 나올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은 마치 부모님 말을 잘 들으면 정말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러 올 것이라 기다리는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기대와 같다. 누가 착한 아이인지 누가 나쁜 아이인지 전지적으로 알고 있는 산타클로스는, 사실 모든 어른들은 다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구원하는 첫 걸음은 그가 실상은 벌거벗었다는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에 관한 한 정부나 공공기관은 <백설공주> 동화 속의 세련된 ‘백마 탄 왕자’가 아니고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야수’처럼 투박한 존재이다(김정수, 2002). 한계와 약점은 무시하거나 감춘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슈퍼맨처럼 망토를 두르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비행기라는 좋은 대안을 생각할 수 없다. 허황된 슈퍼맨 신화를 버리고 인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비로소 진정 의미 있는 대책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지원 심의제도의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했을 때의 대안은 무엇일까?
극도의 불확실성 하에서는 합리성을 추구하려 노력할수록 오히려 비합리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만약 열심히 공부를 하건 안하건 어차피 시험성적이 비슷하게 나온다면 애써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노력 낭비가 된다.8) 정답을 찾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상황에서는 결정비용을 늘리는 것은 곧 제한된 자원을 낭비해 버리는 것이다. 산출되는 편익은 그대로인데 계속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한다면 대단히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자원배분이 아닐 수 없다. ‘예술지원사업은 공금으로 시행되므로 심의판정의 합리성을 제고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정치적으로 멋있게 들리는 구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고 계속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무의미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결정비용을 아무리 높여도 결정의 질은 그다지 높아질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투입되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현명한 대안이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문제상황에서는 “보다 단순한 정책결정기준의 도입이 바람직”(최종원, 1999: 273)할 수 있다. 결정비용으로 쓰일 자원을 차라리 다른 용처에 투입해서 효과를 거둔다면 그것이 더 합리적인 자원배분이 된다. 예컨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문제가 너무 어려워 어차피 정답을 맞힐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그 시험은 차라리 그냥 찍는 편이 더 낫다. 그 시간과 정성으로 차라리 다른 과목을 공부해서 그 성적을 올리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한 길이다. 마찬가지로, 주식시장은 미래의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연구하고 궁리해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펀드매니저보다 오히려 그냥 다트를 던져서 투자종목을 고르는 원숭이가 더 나은 실적을 올릴 수 있다.9)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은 상황에서는 제비뽑기 혹은 추첨(lottery)이 가장 현명한 결정방식이 될 수 있다(김정수, 2007). 제비뽑기의 핵심은 무작위성(randomness)이다. 무작위적으로 수혜자를 선정한다는 것은 지원자들의 자질과 가능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숙고가 없음을 뜻한다. 심의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점에서 제비뽑기는 결정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제비뽑기는 대단히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결정방식이 아닐까?
예술지원 심의제도를 제비뽑기 방식으로 바꾸게 되면 결정비용이 어떻게 줄어들게 될까? 우선 직접비용인 경제적 비용, 심의의원들의 지적 노동과 시간 소비, 사무처의 행정지원 노력은 거의 무시할만한 수준으로 최소화될 것이다. 또한 간접비용의 경우, 지원자들의 신청서 준비를 위한 노고, 결과발표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공정성 시비와 탈락자의 불만(이은주, 2006) 역시 크게 줄어들 것이다. 번거롭게 까다로운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없고, 복잡한 심의절차도 거칠 필요 없다. 단순한 추첨으로 즉각적인 선정작업이 이루어지므로 업무처리에 소요되는 시간도 크게 줄어든다. 또한 선정과 탈락이 ‘운’에 의해 좌우되므로 판정에 대한 공정성 시비와 불만 자체가 생길 여지가 없다. 탈락했다고 해서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막상 무작위 추첨으로 보조금 지급 대상자를 선정한다고 하면 예술지원사업의 취지가 훼손될 것 같은 막연한 우려가 생길 수 있다. 실력 없고 수준 낮은 지원자가 뽑힐 수 있는데 그리 되면 아까운 공금만 날려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예술을 지원할 때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 막연하기는 하지만 훌륭한 예술의 발전과 확산 그리고 나아가 국민의 문화생활 향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목표는 훌륭한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통해 달성될 수 있고, 예술지원금은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다. 그런데 진정으로 훌륭한 예술인이라면 설령 운이 없어 지원사업에서 탈락되었다고 해서 엉터리같은 작품을 대충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보조금 수혜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예술활동을 해나갈 것이다. 반대로 실력이 떨어지는 예술인이 어쩌다 운 좋게 선정된다면 보조금 지원 덕분에 좀 더 여유있는 창작활동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보조금 대상자를 제비뽑기로 선정한다고 해서 예술지원사업이 실패할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10)
사실 예술세계의 근본적인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고려하면 예술발전이라는 정책목표가 얼마나 성취/훼손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판정하기도 어렵다. 제비뽑기 방식으로 수혜자를 선정한다면 예술지원사업의 효과가 감소하리라 단언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성과를 거두리라 확신할 수도 없다. 근본적으로 심의판정의 오류 자체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으며 그로 인한 손실 역시 완전히 없앤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심의절차를 까다롭게 강화하고 결정비용을 높인다고 해서 판정의 오류가 획기적으로 감소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예술적 성패의 사전예측 및 사후평가 자체가 사실상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작정 결정비용을 높이려 하기보다는 반대로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 더 현명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일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제비뽑기 방식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심의방식인 것이다.
Ⅷ. 맺는 말
현행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성공적으로 작동해 왔는가? 기존의 A-R-S 방식을 통해 과연 진정한 적격자들이 잘 선정되어 예술지원사업의 목적이 십분 달성되었는가? 심의과정에서 공정성이 충실히 확보되면 정확한 선정이 이루어지고, 반대로 공정성이 결여되면 판정오류(거짓긍정이든 거짓부정이든)가 초래되는가? 심의과정의 공정성이 심하게 훼손된 대표적인 사례로 박근혜 정부 당시의 소위 ‘블랙리스트 사태’를 꼽을 수 있다. 정권을 비판하는 예술인들을 공적 지원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문화행정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불공정한 심의가 정말 대상자 선정에 있어서 심각한 판단오류를 초래했는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우리나라 예술계는 심각한 퇴보를 경험했어야 한다. 심의판정의 오류란 진정한 적격자들은 탈락되고 부적격자들은 선정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더 나아졌는지 혹은 악화되었는지 객관적으로 타당하고 신뢰할만한 평가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말하자면 기존 심의제도가 예술지원사업의 목적달성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뚜렷한 근거조차 없다는 것이다.
오래된 고정관념은, 특히 그것이 상식적으로 합당하다고 느껴질 때는,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예술지원사업에는 막대한 공금이 투입되는 만큼 마땅히 충실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선정되어야 한다. 사업별로 배분된 보조금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것을 바라는 이들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지원자들 중에서 옥석을 잘 가려내야만 한다. 각 예술 장르의 전문가들은 서류 검토, 인터뷰, 시연 심사 등을 통해 진정한 적격자들을 선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선별판정의 합리성을 위해서는 심의절차의 공정성 강화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해 제도개선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은 지극히 타당하고 올바른 말처럼 들린다. 합리적 의사결정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문제는 정답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결정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쏟아 붓는다고 해도 그로 인해 더 합리적인 결정이 나온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결정비용과 결정의 질 사이에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제비뽑기처럼 차라리 결정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결정방식이 될 수 있다. 사실 초중고교 신입생 배정이나 신축 아파트 분양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서 실제로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학생을 어느 학교로 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 누구에게 어떤 아파트 입주권을 주는 것이 최적의 배정인지 판단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모두 수집하고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실로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결국 어떤 결정방식이 최선인가 하는 것은 획일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 문제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김영평, 1991: 20).
불확실성과 결정비용이란 관점에서 볼 때, 현행 A-R-S 방식의 예술지원 심의제도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실은 상당히 비합리적인 결정방식이다. 엄격하고 공정한 심의에 집착해서 결정비용을 아무리 높여본다고 해도 판정의 합리성은 근본적으로 심하게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분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문제라면 억지로 분석하려고 애쓰는 것은 쓸데없는 헛수고일 따름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동전던지기(coin-tossing)로 대책을 정하는 게 더 낫다(Lindblom, 1979).
예술지원사업과 같이 극도로 불확실한 문제상황에서는 제비뽑기와 같이 결정비용을 가장 적게 들이는 것이 오히려 가장 현명한 결정방식이 된다.11) 그러려면 먼저 심의과정에서의 합리성 제약 및 판단오류의 불가피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산타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신다는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한 믿음은 철이 들고 어른이 되면서 내려놓는 것이 정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보는 사람들이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없던 옷이 저절로 입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고 우긴다고 해서 그 벌거벗음이 가려지는 것도 아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그가 실상 벌거벗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선동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난처한 상황을 타개할 합리적 해결의 출발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비뽑기 방식이 만병통치약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좋은 심사점수를 받기 위한 선의의 경쟁은 예술적 성장을 촉진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지원금 수혜를 단지 운과 요행에 맡긴다면 도덕적 해이가 유발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예술지원정책의 예산은 국민 부담으로 조성되는 재원이다. 따라서 사업 전과정에서 관리자, 심의위원, 수혜 예술인들의 공적 책임이 무겁게 요청되는데 제비뽑기는 자칫 이를 면제시켜줄 우려가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논문에서 지적한 기존 심의제도의 필연적 한계에 눈을 감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최소한 심의방식을 좀 더 다양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예술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제비뽑기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바꿀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