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존 러스킨(John Ruskin)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그리고 ‘고대건축물보호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cient Buildings)’와 ‘기념물과 유적지의 보존 및 복원을 위한 국제헌장: 베니스헌장(International Charter for the Conservation and Restoration of Monuments and Sites: the Venice charter, 이하 베니스헌장)’을 언급하지 않고서 근대유산개념의 탄생과 보존원칙을 이야기 할 수 없듯이 버라헌장을 이야기하지 않고 유산보존의 발전 특히 가치중심 보존에 관해 설명할 수 없다. ‘버라헌장: 문화적 중요성이 있는 장소를 위한 호주이코모스헌장(Burra Charter: The Australia ICOMOS Charter for Places of Cultural Significance, 이하 버라헌장)’은 호주의 유산보존관리를 위해 1979년 호주 남부의 역사적인 탄광도시 버라에서 채택되었다. 채택되자마자 빠른 속도로 호주의 유산 실무에 적용되며, 문화적 중요성이 있는 장소의 보존관리를 위한 원칙 및 실무지침이자 유산법의 근거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재 호주에서 버라헌장은 ‘유산의 성경’으로 일컬어지며 각종 유산관련 보고서에서 칭송의 대상이자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Hanna, 2016: 4).
잘 알려져 있듯이 버라헌장의 영향력은 호주 국내로 한정되지 않는다. 호주의 특수성이 반영된 국내 헌장이지만 유산 헌장과 협약 중에서도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꼽히며 유산 보존관리의 국제적인 기준으로 인용되고 있다(Vileikis, 2016: 507). 버라헌장은 베니스헌장을 호주의 유산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이지만 베니스헌장이 대표하는 전통적인 유산보존 접근법인 물질중심 보존에서 가치중심 보존으로의 보존 패러다임을 바꾸는 개념적 토대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하며 이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버라헌장을 유산실천에 적용하는 과정 자체가 가치중심보존1) 의 모델로 기능하며, 이는 버라헌장 과정도에 잘 요약되어 있다(Australia ICOMOSa, 2013: 13). 현재 가치중심 보존은 국제적으로 가장 선호되는 접근법으로 정착하였으며, 확실히 전통적인(물질 중심) 접근법보다 진화한, 유산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상을 반영할 수 있는 더욱 민주적인 접근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버라헌장이 도입한 장소 개념과 사회적 가치 역시 버라헌장의 경계를 넘어 지속적으로 유산의 이론연구와 실무를 위한 중요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호주는 버라헌장을 탄생시킴으로써 20세기 국제 유산보존 더 나아가 국제 유산 분야의 역사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는다(Lesh, 2019a). 1970년대까지 변방에 머물러 있던 호주는 버라헌장을 통해 일약 국제유산분야에서 중요한 국가 중 하나로 부상했으며, 이후 호주는 유산에 관한 이론과 실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정상철 외, 2023: 212).
버라헌장은 베니스헌장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지만 동시에 유럽식 유산과 대비되는 호주의 원주민 유산을 포함하여 호주의 상황에 맞는 유산을 적절히 다루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 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많은 나라들에게 자국을 위한 유산헌장이나 지침을 더욱 발전적으로 마련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세계화 시대 특히 유산의 세계화 현상이 강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개별국가의 특수성과 맥락이 반영된 헌장이나 지침이 국제적인 유산 담론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며, 유산 분야가 직면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인식의 확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유산에 대한 변화된 환경과 인식이 반영된, 국제 유산보존 원칙과 부합하면서도 한국의 특수성과 맥락이 온전히 반영된 헌장이나 지침 마련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에 따라 2022년 문화재청과 이코모스한국위원회는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원칙(이하 한국원칙)’을 수립하여 발표했다.2)
본 논문은 버라헌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국제 유산보존관리에 있어서 버라헌장이 기여한 점과 그 한계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버라헌장은 호주라는 한 국가의 유산헌장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유산보존을 주도하는 국제헌장으로서 지위를 누리고 있다. 국제헌장은 현재사회에서 중요성이 더해가는 유산에 대한 보존실천과 유산연구를 통해 비판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범적인 보존실천에 대한 규범을 제공한다(정상철 외, 2023: 194).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 국제수준에서 유산보존 분야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국내 유산보존을 점검하고,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데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원칙과 비교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버라헌장의 구성 및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3장에서는 국제 유산보존관리에 있어서 버라헌장의 기여와 한계를 정리할 것이다. 끝으로 결론에서는 내용을 요약하고 향후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Ⅱ. 버라헌장의 구성과 주요 내용
버라헌장은 1979년 최초로 채택된 이후 변화하는 환경과 유산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며, 1981, 1988, 1999, 2013년 총 네 차례 개정되었다. 본 논문은 2013년 개정판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버라헌장은 단독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완결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질적인 유산 실천에서 헌장을 어떻게 사용, 적용할 것인가를 안내하는 실무 노트(practice note), 문화적 중요성 및 공존하는 가치에 대한 윤리 강령 등에 대한 지침(Guidelines to the Burra Charter), 그리고 각 조항에 대한 해설과 함께 사례를 담고 있는 해설서(Illustrated Burra Charter) 등의 동반문서를 포함하고 있어 이들 모든 문서가 버라헌장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버라헌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버라헌장 외에 언급된 동반 문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논문 지면의 한계상 본 논문에서는 헌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 필요한 동반문서를 선택적으로 활용하였다.
버라헌장(2013년)은 총 34조 90항으로 서문, 정의, 보존원칙, 보존과정, 보존실천, 버라헌장의 과정도, 즉 헌장을 적용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표 1>).
자료: Australia ICOMOS(2013a)을 정리하여 작성함.
서문에서는 헌장이 채택된 맥락과 연혁, 작성 주체 및 헌장의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정의 부문(1조)에서는 유산 보존관리와 관련이 있는 이해 당사자간 의사소통을 명확하게 하고, 문서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총 17개 용어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다. 용어 및 이의 정의는 <표 2>에 정리하였다.
용어 | 정의 |
---|---|
장소 | 지정학적으로 규정된 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구성요소(elements), 유물, 공간과 전망을 포함하며, 장소에는 유형과 무형의 차원이 있음. |
문화적 중요성 | 과거, 현재 또는 미래 세대를 위한 미학적, 역사적, 학술적, 사회적 또는 정신적 가치를 의미함. |
패브릭(fabric)3) | 구성요소, 고정물, 내용물, 유물을 포함하여 장소의 모든 물리적인 물질을 의미. 패브릭은 발굴된 물질뿐 아니라, 건축물 내부와 지하의 잔존물을 포함함. |
보존 (conservation) |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장소를 보살피는 모든 과정을 의미함. |
유지관리 (maintenance) | 장소와 장소의 주변환경을 지속적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돌보는 것을 의미함. |
현상보존 (preservation) | 현상보존은 장소를 기존의 상태로 관리하고 악화를 지연시키는 것을 의미함. |
복원(restoration) | 부착물을 제거함으로써 또는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기존의 요소들을 재조립함으로써 장소를 알려진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함. |
재건 (reconstruction) | 장소를 알려진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지만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복원과 다름. |
전용(adaptation) | 기존의 사용 또는 제안된 사용에 적합하도록 장소에 변화를 주는 것을 의미함. |
사용(use) | 장소에서 발생하거나 장소에 의존하는 활동과 전통적이며 관습적인 실천을 포함하는 장소의 기능을 의미함. |
양립가능한 사용(compatible use) |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을 존중하는 사용으로 문화적 중요성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주는 것을 의미함. |
주변환경(setting) |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과 장소의 구별되는 특징의 일부이거나 또는 그것에 기여하는 인근의 환경과 그보다 넓은 환경을 의미함. |
관련 장소(related lace) | 관련 장소는 다른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에 기여하는 장소를 의미함. |
관련 유물(related object) | 한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에 기여하지만 그 장소에 있지 않는 것을 의미함. |
연상(associations) | 사람과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감을 의미함. |
의미(meanings) | 의미는 장소가 사람에게 의미하는 것, 보여주는 것, 환기시키거나 또는 표현하는 것을 의미함. |
해석(interpretation) |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을 표출하는 모든 방법을 의미함. |
자료: Australia ICOMOS(2013a, pp2-3)을 정리하여 작성함.
보존원칙 부분(2조~13조)은 총 12개의 보존에 관한 일반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뒷부분인 보존과정이나 보존실천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보존원칙은 이후에 보존과정과 보존실천에서 다시 언급되는 두, 세 개의 조항을 함께 읽을 때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4) 이는 헌장의 내용이 전체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많은 조항이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이다(서문). 이외에도 보존원칙 부분에서는 보존의 목적을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명시하고(2조2항), 보존과 관리의 관계에 관해서 보존이 ‘좋은 관리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다(2조3항). 이는 버라헌장에서 관리는 보존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장소를 위한 관리계획(안)에는 헌장이 정의하는 다양한 보존조치가 ‘정책’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세 번째 부분인 보존과정은 보존조치와 동일한 용어로 이해될 수 있다. 버라헌장에서 보존은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장소를 보살피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보존조치 대신 보존과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현상보존(preservation), 재건(reconstruction) 등의 물리적 조치 외에 다른 보존원칙 문서와 다르게 연상, 의미, 사용, 해석을 보존과정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버라헌장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보존실천 부분은 보존원칙을 적용하여 보존과정을 실천하는 원칙 또는 지침을 담고 있다. 마지막의 버라헌장 과정도는 헌장을 적용하는 세 단계, 즉 중요성 이해, 정책개발, 정책에 부합하는 관리의 이행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후술될 가치중심 접근법, 혹은 가치중심 보존으로 요약된다(Mackay, 2019: 111-112).
버라헌장에서는 보존(conservation)을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장소를 보살피는 모든 과정으로 정의한다(1조 4항). 베니스헌장의 역사적 기념물을 호주의 유산 맥락에 부합하는 개념으로 대체한 장소는 ‘지정학적으로 규정된 구역으로 대체로 구성요소, 유물, 공간과 전망을 포함하며 유형과 무형의 차원이 있다(1조 1항). 더욱 구체적으로 장소는 자연 및 문화적인 특징을 포괄하는 매우 넓은 범위를 가지며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념물, 나무, 개별 건축물이나 건축물군,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장소, 도심지역이나 타운, 문화경관, 정원, 산업공장, 난파선, 잔존물이 있는 부지, 배치된 돌, 도로 또는 여행 루트, 공동체의 만남의 장소, 정신 또는 종교와 관련된 장소를 포함한다(1조 1항 주석). 정의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문화적 중요성이 있는 장소는 문화유산장소(cultural heritage place)(서문)와 동의어로 주로 부동산유산을 의미한다.5) 보다 포괄적으로 버라헌장의 장소 개념은 일반적으로 부동산 유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3장의 장소부문 참고).
문화적 중요성 개념은 호주의 유산 실천과 법에서 장소에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포괄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문화적 중요성은 ‘과거, 현재 또는 미래 세대를 위한 다섯 종류의 가치 – 미학적, 역사적, 학술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 –를 의미하거나(1조 2항) 이들을 포함하여 장소가 갖는 자질(qualities) 또는 가치의 합이다(Australia ICOMOS, 2013b: 1). <표 3>에 다섯 가지 가치의 구체적인 정의를 정리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중요성은 장소 그 자체, 장소의 패브릭, 주변환경, 사용, 연상(associations), 의미, 기록, 관련 장소 그리고 관련 유물(object)에 체화되어 있다(1조 2항). 패브릭은 장소의 구성요소, 내용물, 유물을 비롯하여 장소에 존재하는 일체의 물리적인 물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버라헌장에서 패브릭은 전통적인 보존접근법에서 강조하는 물질을 대표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패브릭이 물질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비물질 또는 무형적 요소로 대표되는 것은 사용(장소의 기능), 연상(사람과 장소 사이의 유대감), 의미(장소가 의미하거나 보여주거나 표현하는 것)이다.
자료: Australia ICOMOS(2013b, pp3-4)을 정리하여 작성함.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소의 중요성을 구현하는 요소들이 기존의 문서들에서 물질적 요소로 한정되었던 것과 달리, 사용, 연상, 의미로 확대됨으로써 유산의 비물질적 측면 또는 무형적 측면을 물질적인 측면과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6) 따라서 장소를 물리적으로 보존하는 것 외에도 장소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거나 다시 사용하는 것, 장소의 연상과 의미를 유지하는 활동 역시 보존과정으로, 이러한 보존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합당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버라헌장의 두 번째 부분인 보존원칙(2조-14조)은 구체적으로 문화적 중요성을 구현하고 있는 장소의 패브릭, 주변환경, 사용, 연상, 의미, 기록물, 관련 장소와 관련 유물의 중요성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제시한다. 버라헌장을 관통하는 핵심 보존원칙은 베니스헌장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개입을 원칙으로 하는 신중한 접근법이다. 따라서 유산의 물질적인 측면을 보존하는 데 있어서 버라헌장은 베니스 헌장과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버라헌장에서 말하는 신중한 접근법은 ‘장소를 보살피고, 사용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 최소한으로 변화를 주는 것’(서문)으로 더 구체적으로 ‘보존이 기존의 패브릭, 사용, 연상, 의미를 토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추측을 기반으로 변화를 주어서는 안 된다’(3조 1항과 2항)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신중한 접근법의 원칙 아래, 중요한 패브릭의 보존은 전통 기술과 재료를 사용해야 하고(4조 1항), 주변환경(setting)이 문화적 중요성에 기여하는 경우, 이 역시 보존해야 하므로 주변환경에서 발생하는 변화 역시 적절하지 않으며(8조), 장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제 자리에 있어야 한다(9조). 장소의 중요성에 기여하는 내용물 역시 제 자리에 있어야 하며, 불가피하게 원 위치와 떨어져야 하는 경우, 그러한 불가피한 상황이 제거되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보내져야 한다(10조).
하지만 버라헌장은 주로 물질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신중한 접근법을 토대로 하는 원칙 외에도 장소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장소가 가진 여러 가치가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특정한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가치가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5조). 또한 한 장소에 서로 갈등하는 가치가 있을 수 있으며, 이 경우 공존하는 다양한 가치가 인식되고, 존중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상황을 절대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되어야 하는(13조)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 장소에 존재하는 다양하며 때로 공존하는, 갈등하는 가치를 모두 인식, 존중, 판별하여, 한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을 정확히 평가하고,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해당 장소와 관련이 있는 여러 이해당사자가 해당 장소의 보존, 해석, 관리에 참여해야 한다(12조)는 참여 접근법을 권장하고 있다. 이해당사자는 해당 장소에 중요한 연상과 의미가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외의 문화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12조). 그리고 장소의 중요성이 장소를 사용함으로써 드러나는 경우라면 계속해서, 적합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7조)는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유산의 중요성과 무형적 측면을 연결했는데, 이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장소의 가치가 구현된 대상물에 사용, 연상, 의미 등의 무형적인 요소를 포함한 것에서 당연히 예고된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보존은 장소를 잘 관리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2조 3항)으로 관리와 동떨어져서 수행되어서는 안 되며 관리과정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Walker 외, 2004: 16). 이러한 관점에서 헌장은 장소의 관리를 위해서는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을 이해한 다음, 이를 토대로 (보존을 포함하는) 정책이 개발되어야 하며, 개발된 정책에 부합하는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버라헌장의 과정(6조 1항)을 통해 핵심 메시지로 강조하고 있다. 이 원칙은 ‘버라헌장 과정도(過程圖)’이자 ‘중요성이 있는 장소의 관리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단계’라 명명되어 헌장의 맨 마지막에도 제시되어 있다. 이 원칙을 통해 버라헌장은 보존원칙을 위한 헌장이자 가치중심보존관리의 모범 사례를 제시하는 실천기준이자 이의 모델로 기능한다.
통상 보존과정은 유산의 물리적 요소에 개입하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에 버라헌장에서 사용과 재사용, 연상과 의미의 유지, 그리고 해석을 보존과정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버라헌장의 차별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버라헌장이 이들을 보존과정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문화적 중요성을 구현하고 있는 요소에 무형적 요소를 포함한 것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신중한 접근법이 보존과정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 장소의 변화는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적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변화는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다(15조). 하지만 장소를 일시적으로 사용한다거나, 장소의 문화적 의미나 관습의 변화를 반영하기 위하여 장소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15조의 주석). 하지만 이 경우 반드시 적절한 해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15조 1항). 따라서 해석은 다양한 보존과정에서 함께 행해져야 할 핵심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에서든 발생한 변화는 되돌려질 수 있어야 한다는 소위 가역성의 원칙(15조 2항)은 버라헌장에서도 중요한 원칙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패브릭에 대한 변화 개입은 무형적 요소의 중요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경우에만 고려되는 것으로, 이런 이유로 해석이 매우 중요한 보존과정의 일부를 구성한다.
모든 보존과정은 문화적 중요성을 더욱 드러내거나, 유지하거나, 최소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져야 하며, 패브릭에 대한 개입(변화) 정도는 유지관리(maintenance), 현상보존(preservation), 복원(restoration), 재건(reconstruction), 전용(adaptation), 새로운 작업(new works) 순으로 증가한다. 복원과 재건을 구분하고, 재건을 보존과정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 역시 버라헌장의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복원과 재건은 고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특정한 시기로 되돌린다는 점에서 동일하다(19조와 20조). 하지만 복원은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부착물을 제거하고, 기존의 요소를 재조립해서 장소를 알려진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인 반면, 재건은 ‘새로운 재료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복원과 다르다(1조 7항과 1조 8항). 복원과 재건은 또한 문화적 중요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필요치 않은 것이며, 오직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실행되어야 한다(19조와 20조). 하지만 재건은 장소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성을 유지하는 경우에는 적절한 접근법이 될 수 있다(20조 1항). 이는 사용을 위해서는 변화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물론 이 경우라 하더라도 ‘변화는 추가적인 해석을 통하여 식별될 수 있어야 한다(20조 2항).
버라헌장의 보존실천 부분은 버라헌장을 구체적으로 보존과 관리에 적용하는 과정들(Burra Charter Process)에서 필요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보존원칙과 보존과정을 반영한 관리계획안을 만드는 지침이자, 관리계획안의 이행 및 모니터링과 검토를 위한 지침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보존조치는 다양한 정보원을 통하여 장소를 완벽하게 이해한 뒤에 문화적 중요성을 평가하고, 이 문화적 중요성을 토대로 개발되어야 한다. 장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증거와 문서 증거 그리고 구술 및 그 외의 증거의 분석을 포함하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러한 연구는 다학제적 접근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26조 1항). 장소를 이해한 다음에는 장소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고 평가를 바탕으로 문화적 중요성 기술문(Statement of Significance)을 작성하고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문화적 중요성 기술문과 정책은 해당 장소를 위한 관리계획에 통합되어야 한다(26조 2항). 해당 장소를 위한 문화적 중요성 기술문과 정책은 정기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보존 조치와 조치의 결과가 지속적으로 적절하고 효과가 있도록 하기 위하여 모니티링해야 한다(26조 4항).
변화에 대한 용인과 변화 관리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유산영향평가가 도입된 것은 버라헌장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관련 내용은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에 영향을 주는 변화는 장소의 관리를 위한 중요성 기술문과 정책을 참고하여 평가되어야 한다(27조 1항)’고 명시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기록의 원칙’(31조)에 따라 ‘기존의 패브릭, 사용, 연상 그리고 의미는 해당 장소에 변화를 주기 전과 후에 충분하게 기록되어야 한다(27조 2항).
Ⅲ. 버라헌장의 기여와 한계
버라헌장은 베니스헌장의 물질에 내재하는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최소한의 변화와 물리적 개입이 최고의 보존실천이라고 상정하는 보존철학을 그대로 승계했지만 미학적, 역사적 가치로 평가되는 기념물과 건축물 대신 ‘문화적 중요성이 있는 장소’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위대한 기념물과 건축물만을 유산으로 보지 않는 현실을 반영하는 혁신성을 보여주었다. ‘유적지, 구역, 건축물 또는 다른 작품… 등으로’ 정의되는 장소는 도시구역에서부터 산업 건축물 및 토속 건축물, 지역의 타운들, 원주민 유산, 식민지 시대 건축물과 난파선과 같은 유물에 이르기까지 훨씬 넓은 범위의 유산을 포괄한다(Lesh, 2017: 123). 이렇게 유산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장소 개념은 다양하고 폭넓은 형태의 장소나 유물들을 유산화하려는 현실적 욕구와 잘 부합되어 버라헌장 발표 이후 국제적으로도 장소 개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장소 개념이 버라헌장에 도입된 이유는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 유산이 건축가, 공학자, 고고학자, 역사가 등의 개별 학문 분야에서 정의되는 것을 피하고 다학제적 접근법을 택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기념물, 건축물, 유적지 등 베니스헌장과 초기 세계유산협약이 정의한 유산개념이 주로 고고학자와 건축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둘째, 버라헌장이 최초로 작성되던 1970년대 유산 보존 실무자들은 구조물과 건축물 등 문화유산은 일반적으로 인접한 주변환경에 의해 가치가 높아지며, 그 주변환경 자체가 문화유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였다.7) 이와 같이 유산 주변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당시의 유산 보존 실무자들의 인식에 영감을 받은 결과였다. 셋째, 유산 측면에서 호주가 직면한 독특한 상황을 반영하고자 한 결과였다. 호주의 자연적 경관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통합적으로 보려는 관점에서 장소 개념이 적절하게 보였던 것이다. 즉 한 장소에 문화적 가치와 자연적 가치가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8). 또한 원주민 유산은 물질보다 전통적 가치와 무형적 측면이 더욱 중요한 경우가 있었으며 이를 포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장소 개념이 탄생되었다(Logan, 2004: 4).
이렇듯 버라헌장에서의 장소 개념은 단순히 유산의 개념을 확대한 것을 넘어 유산이 다양한 학문과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버라헌장은 보존을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는 것’(1조 4항)으로 정의함으로써 보존 실천의 목적을 물질의 완전성과 진정성 대신 문화적 중요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9). 이는 다시 말해서 보존관리의 핵심에 가치의 합인 중요성을 두는 것으로 물질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복원이냐 수리냐를 결정하는 물질중심 보존 또는 물질중심 접근법에서 벗어나 보존관리에 관한 어떠한 결정이라도 내려지기 전에 장소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버라헌장은 보존관리에서 가치의 역할과 중요성을 최초로 명시적으로 언급했으며, 중요성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개발한 다음 이에 부합하는 관리를 이행해야 한다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세 단계 보존계획과정을 개념화하고, 이에 대한 실무 지침을 제공했다. 가치중심 보존관리 또는 가치중심 접근법을 개념화하고 이를 실천하는 체계적인 지침을 제공한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버라헌장에서 문화적 중요성은 미학적, 역사적, 과학적, 사회적, 또는 정신적 가치로 구성된다. 버라헌장은 현재적, 무형적, 비전문가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정신적 가치를 문화적 중요성에 포함시킨 혁신성 외에도 전통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가치중심 접근법을 통해 이들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평가되어 보존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치에 대한 인식을 실용적으로 전환시킨 공로 역시 인정받았다(Hanna 2015; Sullivan 1993).
버라헌장이 채택되고 난 후 1980년대부터 중요성 평가가 유산보존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문화적 중요성을 평가하여 문화적 중요성 기술문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관리계획을 수립하며, 유산영향평가를 실시할 때에도 이를 기준점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버라헌장 과정도 <표 4>는 그 자체로 가치중심 접근법 모델로 기능한다.
중요성 이해하기 | → | 정책 개발하기 | → | 관리하기 |
장소에 대해 이해하기 | 모든 요소들과 이슈를 식별하기 | 관리계획 실행하기 | ||
문화적 중요성이해하기 | 정책 마련하기 | 모니터링 및 계획 리뷰하기 | ||
관리계획 준비하기 |
자료: Austraila ICOMOS(2013a: 10)을 정리하여 작성함.
이후 버라헌장은 지속적인 개정을 통해 가치중심 접근법을 더욱 정교화시킨다. 유형적 가치 외에도 사용, 연상, 의미, 정신적 가치 등 무형적 가치를 폭넓게 수용하고 반복적인 재고를 촉진하면서10) ‘해당 장소에 중요한 연상과 의미가 있는 사람들 또는 그 장소에 대한 사회적, 정신적, 또는 다른 문화적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장소의 보존, 해석, 관리에 대한 참여를 제공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비전문가를 유산보존관리의 과정에 포함시킴으로써11) 의사결정과정에서 참여한 사람들 간 ‘건설적인 긴장을 포용한다’ (Avrami 외, 2019: 18).
버라헌장이 가치의 속성이 변할 수 있다고 인식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버라헌장은 장소가 갖는 가치는 시간에 따라 변화할 뿐만 아니라, 개인별, 그룹별로 각기 다른 다양한 가치를 가지며(1조 2항), 이에 따라 한 장소에는 서로 갈등하는 가치가 공존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이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였다(13조). 동시에 하나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가치가 없어야 한다고 단언함으로써 특정한 가치에 우선순위가 주어지는 상황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버라헌장은 실제로 윤리 강령으로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며, 문화적으로 다른 경쟁하는 가치가 공존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가치중심 접근법은 갈등하는 가치를 다룰 수 있는 관리수단으로서도 기능하게 된다.
더 나아가 버라헌장이 정의한 문화적 중요성은 세대 간 공평을 선언하며 과거, 현재, 미래를 연속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유산과 현대 사회와의 긴밀성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어 사회적 및 정신적 가치는 해당 장소와 관련이 있는 이해당사자가 장소에서 인식하는 현대적 가치를 강조한다(정상철 외, 2023: 523).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의 유산 만들기, 즉 유산화가 활발히 일어나며, 유산이 현재와 관계 맺는 연결망은 강해진다.12) 물질중심 접근법이 유산을 과거에 묶어두는 것이었다면 가치중심 접근법에서 유산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현재의 필요에 의해서 탄생되는 것이다.
버라헌장은 15조를 통해서 ‘문화적 중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변화가 필수적일 수 있다’13)라고 명시하고, 보존과 변화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Emerick, 2014: 258). 변화에 대한 신중한 접근법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버라헌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원칙 중 하나이다. 하지만 버라헌장은 패브릭이 변화하는 것이 여전히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해도 더 이상 물질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존의 최고 실천이라는 관점을 지향하지 않으며 사용, 연상, 의미와 같은 무형적 가치를 위해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이러한 유연한 태도는 제임스 커(James Kerr)의 보존계획에도 명시되어 있다.14) 커의 핵심적인 주장은 개발(변화)과 보존이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보존계획 프레임 안에 녹아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호주이코모스가 ‘유산의 보존은 변화를 막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관리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이제는 유명해진 케치프레이즈를 선언한 것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 선언은 헌장의 본문에는 담겨있지 않지만, 유튜브의 호주이코모스 채널에 올린 버라헌장 소개 영상의 내레이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15)
버라헌장은 유산이 속한 문화적, 사회적 맥락 그리고 유산과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유산보존접근법을 발전시킴으로서 ‘권위적이고 서구가 지배하는 보존 운동 구조의 심장에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라는 가치를 쏘아올리고, 진보라는 계몽주의 서사로서의 보존 개념의 기반을 뒤흔들었다’(Glendinning, 2013: 403; Lesh, 2019a)는 찬사를 받았다. 동시에 독일의 역사가이자 전통주의적 유산 실무자인 마이클 펫젯(Michael Petzet)은 문화 및 유산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면서 유산보존에 대한 지역의 원칙이 환영받아야 한다면서 버라헌장을 지역원칙의 예로 거론했다(Petzet, 2004: 28). 하지만 버라헌장이 지역헌장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인 기준으로 자리한 것에 대해 ‘호주의 유산실천이 유적지와 기념물을 보존하기보다는 변화를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전통적인 보존 개념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이를 훼손한다’ 며 불편한 심기 역시 숨기지 않았다(Lesh, 2017: 2). 이들은 유산보존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각자의 신념에 근거하여 버라헌장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표현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에는 버라헌장에 대한 공통의 평가가 담겨 있다. 즉 버라헌장이 19세기 서구유럽의 맥락에서 탄생한, 전문가의 지식을 특권화하고 물질에 내재한 본질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유산보존을 탈맥락화하는 ‘공인된 유산담론’(Smith, 2006)으로서의 유산보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주장이다.
실제로 버라헌장, 특히 더욱 정교화된 가치중심 보존접근법을 도입한 1999년 개정안은 기존의 담론에 도전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Smith 2006: 102-103). 따라서 버라헌장의 한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버라헌장이 의도한 대로 혹은 이러한 평가에 부합하게 가치중심 접근법 모델로서 기존의 유산담론을 진정으로 벗어났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또한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다성성과 다원성 측면에서, 그리고 버라헌장이 호주 국내 유산에 대한 지침이라는 측면 모두에서 버라헌장이 호주유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원주민 유산 및 이들의 가치를 온전히 수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점검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가치중심 접근법 모델로서 버라헌장은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 – 미학적, 역사적, 학술적, 사회적 또는 정식적 가치의 합으로 요약되는 –을 식별, 평가, 유지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한다. 원칙적으로 기존의 물질 중심 접근법이 강조한 미학적, 역사적, 학술적 가치 외에 유산이 속한 맥락과 관련 사람들이 유산에서 인식, 식별하는 사회적 및 정신적 가치를 중요성에 포함시키고 이의 식별, 평가, 유지에 전문가 외에도 비전문가를 참여시키려고 시도한다. 미학적, 역사적, 학술적, 사회적 또는 정신적 가치의 나열은 알파벳 순서에 따른 것으로 가치의 서열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서 이들 가치는 모두 동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보존은 다른 가치들을 희생하여 특정한 하나의 가치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5조 1항은 이에 대한 명확한 진술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주로 비전문가에 의해 식별,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 이들의 참여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들의 가치가 전문가의 가치와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버라헌장은 문화적 중요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함(1조 2항 주석)으로서 역사적 또는 사회적 맥락을 넘어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되는 장소의 물질에 내재한 본질적 가치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장소의 중요성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버라헌장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은 버라헌장이 물질에 내재하는 본질적 가치의 식별과 평가를 강조하고 전문가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비전문가의 참여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또는 정신적 가치를 중요성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매우 어렵게 만들면서 그 자체의 중요한 혁신들을 스스로 약화시킨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버라헌장은 여전히 보존의 중심을 패브릭에 두고 이와 관련이 있는 전문가의 역할과 기술적 측면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이들과 관련된 진술에는 확정적 언어(be 동사)를 구사하고 있는16) 반면, 비전문가 공동체가 포함된 진술에는 추측의 언어(should나 may)를 사용하면서 이들을 전문가들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 수동적 존재로 묘사한다.17)(Smith, 2006; Waterton 외, 2006)
이렇듯 버라헌장의 공인된 유산담론에 도전하지 않는 담론의 구성은 사회적 구성물로서 장소와 가치의 개념, 그리고 비전문가 공동체와 이들의 가치를 수용하려는 혁신적인 의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게 하는 모순을 야기한다. 부연하면 전문가의 가치와 비전문가의 가치가 충돌할 때 비전문가의 가치는 매우 취약해질 수 있으며, 주로 전문가의 가치는 물질적인 가치와 그리고 비전문가의 가치는 비물질적인 가치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 가치에 비해 비물질적 가치가 덜 중요한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 즉 가치에 위계를 발생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의 유산보존에서 물질 및 전문가의 지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확실히 극복해야 할 낡은 개념 및 실천으로 여겨진다(Bandarin 외, 2012; Lesh, 2020: 434). 버라헌장이 이러한 낡은 개념 및 실천을 넘어서 진일보한 가치중심 접근법의 시대를 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적 특징, 불완전한 속성 때문에 버라헌장은 많은 경우 보존실천의 결과를 특정 장소의 보존에 참여하는 실무자나 이해당사자 및 지역 공동체의 능력에 맡겨버리는(Emerick, 2017: 258) 무책임함을 드러낸다. 물질과 전문가의 특권은 여전히 진행형이다(Lesh, 2020: 435). 이러한 측면에서 유산보존에서 ‘큰 변화가 있어 왔지만 이것은 혁명적이라기보다 진화적이었고 과거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엄밀한 의미로 패러다임은 변화하지 않았다’(Logan 외 2016: 18)는 윌리엄 로건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버라헌장의 이러한 한계는 당연하게 가치중심 접근법이 안고 있는 일반적인 한계와 맥을 같이 한다. 파울리우스(Ioannios Poulious)와 위제수리야(Wijesuriya)는 이렇듯 가치중심 접근법이 여전히 물질에 초점을 맞추고 이론상 모든 공동체를 등등하게 간주하기 때문에 유ㆍ무형을 통합적으로 보는 리빙헤리티지를 위한 보존관리를 위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리빙헤리티지 또는 사람중심 접근법을 제안한다. 이 접근법의 가장 큰 특징은 유산의 원래의 기능을 보존하는 것이 보존의 목적으로 이를 위해 큰 변화도 수용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유산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핵심공동체에게 강력한 의사결정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Poulious, 2014; Wijesuriya, 2015).
버라헌장은 호주의 유산 보존관리를 위한 원칙이자 지침이다. 따라서 호주이코모스를 비롯한 호주의 유산기관에게 원주민 공동체와 이들의 유산을 포용하려는 노력은 당연한 의무에 해당할 것이다. 버라헌장의 초기 버전들은 원주민 유산을 포함하고자 시도했지만, 명백하게 사회적 가치보다는 과학적, 미학적,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주로 유럽식 호주유산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Lesh, 2019b) 버라헌장의 적용이 서양전통과 관련이 있는 장소들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Sullivan, 2004: 37).
호주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와 더불어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한 대표적인 정착민 사회다. 이들이 원주민의 땅을 점령한다는 것은 원주민의 문화를 그들의 시각으로 다시 기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의 유산은 점령자의 관점으로 해석되고 보존되었다(Byrne, 2008; Harrison, 2013). 하지만 1980-90년대 원주민 유산에 대한 연구를 통해 원주민 장소들의 사회적 중요성과 전통적인 관리인들이 호주의 문화유산보존관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를 반영하여 1999년 버라헌장은 정신적 가치와 연상 및 의미, 즉 무형적 측면이 유형적 측면과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개정이 이루어졌다(Allen, 2004: 52).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라헌장과 버라헌장 과정이 원주민 장소의 중요성을 평가하고 보존관리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론인지는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다(Sullivan, 2004: 38). 이는 앞서도 설명했듯이 버라헌장이 중요성 평가의 일관성을 비롯하여 유산실천을 전문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비전문가를 소외시키는 단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원주민 공동체의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유산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유산보존관리에서 적법하고 심지어 존중받는 역할을 해온 원주민 공동체가 호주의 유산보존관리체계에서 작업하는 전문가와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될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유산 전문가와 원주민의 유산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은 유산분야에서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고고학자들은 원주민 유산을 고고학적 가치로 평가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지 않는 원주민 문화에서는 자신들의 유산을 고고학적 기준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1987년, 1990년에 각각 세계유산목록에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가 비판과 논쟁 끝에 1993년, 1994년 복합유산 및 문화경관으로 확장 등재된 뉴질랜드의 통가리로 국립공원과 호주의 울루루 카타 추타 국립공원역시 문화와 자연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유럽적 관점과 이를 구분하지 않는 원주민들의 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Harrison, 2013: 114-140)18).
원주민의 장소에 적용하기 위해 채택된 무형적 요소가 앞서 말한 대로 패브릭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문가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무형적 요소의 중요성이 간과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유산의 중요성이 왜곡되고 훼손되게 되는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특히 원주민 유산과 관련하여 헌장이 의도한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형과 무형의 관계가 더욱 명확히 설정될 필요가 있다(Allen, 2004: 51).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괄하기 위하여 버라헌장은 한 장소에 문화 및 자연적인 측면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고(5조) 있지만 버라헌장의 근간이 서구의 문화적 관점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빗대어 일부 원주민은 그들의 유산 장소에 버라헌장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 ‘문화제국주의의 한 형태, 또는 적어도 탈식민지 이후의 무례함이나 불감증의 한 형태이며 호주 국가 정체성 건설의 일환으로 원주민 유산을 공동채택하려는 시도’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Sullivan 2004: 37).19) 이들에게 버라헌장은 공인된 유산 담론의 재 문맥화 혹은 확장된 버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원주민 장소에 대한 버라헌장, 혹은 가치중심 접근법의 적용 역시 사례별로 다른 결과를 도출하는 상황을 연출한다(De la Torre 외, 2005).
Ⅳ. 결론
버라헌장은 호주의 자연, 원주민, 역사적 장소를 포함하여 모든 문화적 중요성이 있는 장소를 보존 관리하는 최고의 실천기준으로 호주이코모스에 의해 1979년 호주의 역사적인 탄광도시 버라에서 채택되었다. 채택되고 난 후 진화하는 유산 및 보존에 대한 개념 및 실천을 반영하며 1981, 1988. 1999, 2013년 총 네 차례 개정되었다. 버라헌장은 베니스헌장을 호주의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베니스헌장의 ‘재발명’(Lesh, 2019a)이라고도 불리지만, 미학적, 역사적, 학술적, 사회적 가치의 합을 의미하는 문화적 중요성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보존관리의 핵심에 둠으로써 유산분야에서 가치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고 물질 중심 접근법에서 벗어나 가치중심 접근법의 시대를 열었다. 현재 가치중심 접근법은 국제적으로 가장 선호되는 보편적인 접근법이다. 이런 이유로 버라헌장은 가치중심 접근법모델로 불리며 호주를 넘어 유산의 보존관리를 위한 국제적인 기준으로 인정받는다. 장소 개념 역시 기념물과 유적지를 비롯하여 더욱 다양한 유산을 포괄하기 위하여 버라헌장이 채택한 이후 유산분야에서 흔히 부동산 유산을 일컫는 용어로 정착했다.
버라헌장은 1999년 개정을 통해 문화적 중요성에 정신적 가치를 추가하고 패브릭 외에도 장소의 사용, 연상, 의미를 가치가 구현된 요소로 인정함으로써 장소가 가진 무형적 측면을 유형적 측면과 동등하게 인정하고 이의 식별, 평가, 관리의 과정에 비전문가의 참여를 촉진하는 혁신성을 보여주며 진화했다. 또한 가치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 같은 장소에 서로 갈등하는 가치가 공존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유산과 가치의 개념 역시 수용하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물질과 전문가의 지식을 특권화하는 기존 유산담론인 공인된 유산담론과 차별화하여 다성성과 다원주의를 포용하는 포스트모던 헌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버라헌장은 물질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폐기하지 않고 전문가 지식에 대한 특권 역시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비전문가를 참여시키며 다성성과 다원성을 수용하려는 원래의 의도를 약화시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원주민 유산의 경우 자칫 전문가보다 더 적법한 유산보존관리 당사자가 무시되거나 소외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적인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적인 보존관리, 즉 장소의 문화적 중요성이 완벽하게 이해되고 이에 따른 보존관리의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장소의 보존관리에 참여하는 실무자와 비전문 공동체의 의도와 의지에 크게 좌우될 소지가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버라헌장이 비전문가 및 이들의 가치를 그자체로 온전히 포괄하기 어려운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라헌장이 가진 이러한 한계는 가치중심 접근법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버라헌장은 여러 혁신성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진화된, 보편성을 획득한 유산보존의 한 단계를 개척하며 이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현재 국제유산보존을 이해하고 국내유산보존이 이를 반영하며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향후 버라헌장과 관련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2022년에 수립된 한국원칙이 국내 유산보존관리현장에서 적절하게 이용되며 확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호주의 유산법에서 버라헌장이 어떻게 근간이 되고 실무지침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한국원칙과 버라헌장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는 것도 한국원칙에 포함된 개념의 혁신성 여부와 실무에 적용될 때의 장, 단점을 살펴보기 위해 유용한 연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버라헌장이 네 번의 개정을 거치며 다른 주요국제문서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진화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국제유산분야의 진화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어 이에 대한 연구 역시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