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최근 ESG가 전 세계적인 투자 및 경영의 핵심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으면서 국내외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문화산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할리우드의 주요 미디어 기업들인 넷플릭스(Netflix)와 월트 디즈니(Walt Disney) 등은 매년 ESG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으며, 해당 보고서들에는 노동 분야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글로벌 투자사와 공적 평가기관이 한국에서 생산된 문화 콘텐츠와 이를 제작하는 문화산업 기업들의 노동환경을 ESG 관점에서 평가할 경우, 과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까?
기존 연구들은 한국 문화산업의 성공적이고 눈부신 성장 이면에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존재함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Kim & Lee, 2023). 만약 이러한 문제가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와 같은 거대 플랫폼에 제공되는 콘텐츠에서 발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면, 한류 콘텐츠는 해외에서 어떤 이미지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 더 나아가 이러한 노동문제가 투자 리스크로 인식되어,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 기업들이 한국 문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보류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어떠할 것인가?
한국 문화산업은 한류의 성공 이후 대표적인 '수출 주도형' 산업으로 성장해 왔으며, 그 성장에 있어서 대외적인 평가와 투자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현재의 노동문제가 투자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며, 한류의 주요 소비층인 해외 MZ 세대는 이러한 윤리적 이슈에 매우 민감하다. 실제로 국내 기업들 중 노동 관련 인권 침해 사례로 인해 투자에서 제외된 다수의 기업들이 이미 존재하며1), 이러한 사례가 문화산업에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EU의 비재무정보보고지침은 기업 활동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비재무제표를 통해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미국 또한 ESG 공시 관련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김남근, 2022). 이러한 점에서 ESG는 단순히 한국 문화상품의 매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수단을 넘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줄이고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시급하고 불가피한 국제적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본 연구는 문화산업 내 다양한 노동 관련 이슈들을 ESG의 사회(Social) 영역으로 재정의하여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틀에서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문화산업 노동에 대한 윤리적 접근을 강조하는 연구들은 문화산업에서 창의노동자가 가치창출의 핵심임을 지적하고, 이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지속가능한 노동환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Banks, 2017). 이러한 맥락에서 ESG 관점을 도입하면, 기업으로 하여금 다양한 노동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새로운 차원의 당위성을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콘텐츠 생산이 점차 외주화되고 대형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는 산업적 상황에서, ESG 지표에서 사용되는 '공급망 사슬'과 같은 개념은 플랫폼 기업들이 콘텐츠 생산을 담당하는 제작사들에 대한 감독과 지원을 강화해야 할 논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첫째, ESG 개념과 이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회의적 시각을 고찰한다. 둘째, ESG 평가에서 노동의 영역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노동 관련 지표들을 분석한다. 셋째, 국내 문화산업 내 ESG 논의 및 주요 기업들의 ESG 경영 실천 현황을 관련 연구와 대표적인 미디어 기업의 ESG 보고서 분석을 통해 검토한다. 이어서, 문화산업 노동 의제와 ESG를 연계하기 위해 문화산업 노동환경의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정리하고, 실제 노동자들이 ESG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파악한다.
본 연구는 기존의 ESG 관련 연구들이 주로 경영자나 정부 정책 담당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본 것에서 벗어나, 노동문제의 주요 이해관계자인 노동자들이 현재 ESG 상황과 향후 ESG 실천에 대해 어떤 시각에서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ESG 개념이 부상하기 이전,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규정했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담론과 실천들이 실질적인 개선으로 귀결되지 못했던 이유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참여와 의견 청취의 부족, 하향식(top-down) 접근과 비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었다는 지적을 바탕으로 한다(윤호원, 2024). 따라서 기존 CSR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ESG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실질적 이해당사자인 노동자의 의견 반영과 참여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조가 ESG에 대해 어떤 인식과 의견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윤호원, 2024; 강충호, 2024).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문화산업 내 ESG에 직접 영향을 받는 플랫폼 기업, 대형 방송사, 미디어 제작사와 관련된 방송, 영화, 게임산업을 대상으로 방송스태프노동조합, 방송연기자노동조합, 영화산업노동조합, 방송작가노동조합,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게임기업노동조합 등의 노조 대표자들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였으며2), 이를 토대로 노동환경의 실질적 개선을 위한 ESG 활용 방안에 대한 전략 및 정책적 제언을 제시하였다.
Ⅱ. ESG 개념과 담론: 긍정론과 회의론을 넘어서
ESG 개념은 1987년 인도 보팔 유독가스 유출 사건 이후 UNEP(유엔환경계획)과 WCED(세계환경개발위원회)가 처음 정의한 지속가능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개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후 UN 기구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관심을 가지면서 ESG 개념이 발전했고, 'ESG'라는 용어는 2004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의 요청으로 발간된 보고서 <Who Cares Wins: Connecting Financial Markets to a Changing World>에서 처음 사용되었다(이은선ㆍ최유경, 2021). 이 개념은 2005년 8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최된 UNGC 컨퍼런스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06년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주도해 유엔책임투자원칙(PRI)이 출범했고,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을 포함한 약 1,750개의 글로벌 투자회사들이 이 원칙을 준수하기로 서명했다. 특히 2020년부터 PRI가 본격화되면서 ESG 투자는 급격하게 새로운 투자 기준으로 자리잡았다(이은선ㆍ최유경, 2021).
국내에서도 2016년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인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이 제정되고, 2025년부터 상장사의 ESG 공시가 의무화되면서, 기업이 장기적 관점에서 환경, 사회, 거버넌스와 같은 비재무적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투자자들 또한 이러한 요소들을 장기적 리스크 관리 전략의 필수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양한 ESG 투자기법들이 제안되고 있지만, ESG 투자의 기준이 되는 평가지표는 아직 표준화되지 않은 상황이다. 국제적으로 ESG 평가 표준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아직 통일된 기준은 없다. ESG 관련 주요 가이드라인으로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주관하는 글로벌 리포팅 이니셔티브(global, reporting initiative, 이하 GRI)가 환경(8개 주제), 사회(19개 주제), 경제(6개 주제)를 중심으로 ESG를 포괄하는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ESG 평가 점수를 직접 산출하는 기관들도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모건스탠리 캐피털 인터내셔널(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MSCI),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Dow Jones Sustainability Indices, DJSI), 블룸버그 ESG 공시점수(Bloomberg ESG Scores) 등이 대표적이며, 한국에서는 한국ESG기준원(KCGS), 한국ESG연구소, 국민연금, 지속가능발전소, 서스틴베스트(SUSTINVEST) 등이 각 기업별 ESG 평가를 하고 있다(송관철, 2021).
전 세계적으로 ESG가 새로운 투자 및 경영 패러다임으로 부상하면서, ESG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회의적인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ESG 투자에 긍정적인 입장은 주로 다음과 같은 논리에 기반한다. 첫째, 기업이 ESG를 중점적으로 고려하면 자본 비용 절감과 기업 가치 증대에 도움이 될 수 있다(Serafeim, 2020). ESG 성과가 우수한 기업은 더 많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아 더 큰 자본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ESG 관련 사안에서의 긍정적인 조치와 투명성은 글로벌 규제 기관과 정부가 ESG 공시를 의무화함에 따라 기업이 가치를 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Serafeim, 2020). 셋째, 지속 가능한 관행을 도입하려는 노력은 주주들이 이사회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와 만족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많은 자산을 운용하는 투자자들이 ESG 투자에 헌신할수록, 그들은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더 큰 의결권을 가지게 된다(Serafeim, 2020). 마지막으로, ESG 관행은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비전과 미래 계획을 지지하는 장기적인 투자자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SG 투자는 가치 중심의 장기 투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Serafeim, 2020).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ESG 투자의 효과를 검증하는 연구들이 진행되어 왔다. 클라크와 동료들(Clark, Feliner & Viehs, 2015)은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200편 이상의 기존 연구를 메타분석한 결과, 90% 이상의 논문에서 우수한 지속가능성 실천이 자본 조달 비용을 낮춘다고 분석했다. 또한, 88%의 논문은 ESG 실천이 기업의 영업 성과를 향상시키며, 80%의 연구는 우수한 지속가능성 실천이 주가 수익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프리데와 동료들(Friede, Busch, & Bassen, 2015) 역시 1970년대 이후 발표된 2,000여 편의 ESG 기준과 기업 재무 성과(CFP)에 관한 연구의 1차 및 2차 데이터를 메타분석한 결과, 약 90% 이상의 연구에서 ESG와 CFP 간에 부정적인 관계가 없음을 확인했으며, 대다수의 연구가 긍정적인 결과를 보고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베리모어와 샘슨(Barrymore & Sampson, 2021)의 연구는 ESG 실행이 재무적 성과 외에도 기업의 평판과 연관되어 있으며, 긍정적인 가치가 직원들의 몰입도와 만족도를 높여 이직률을 줄이고, 업무 노력을 증대시켜 노동 생산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시각과는 반대로, ESG 투자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회의론도 존재한다. ESG에 대한 비판은 주로 다음과 같은 논리에 기반한다. 첫째, ESG 투자는 규제되지 않은 ESG 평가에 의존하고 있어 신뢰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ESG 평가는 보편적인 기준이 아니라 산업 내 동종 기업 간 비교 순위에 따라 산정되기 때문에, 때로는 화석 연료 회사가 전기차 제조업체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우려가 있다(Pucker & King, 2022). 둘째, ESG 투자의 실제적 효과를 입증하려면 해당 투자가 없었을 경우 동일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가성(additionality)'을 입증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ESG 펀드는 2차 시장에서 거래되는 증권에 투자하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가 어렵다(Pucker & King, 2022). 셋째, ESG 투자가 더 나은 수익을 제공한다는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문제도 있다. ESG 자산관리사들은 ESG 투자가 높은 수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는 여전히 부족하며, 나아가 ESG 펀드는 전통적인 펀드보다 40% 이상 높은 수수료를 부과하는 경향이 있어, 월스트리트가 이를 과대홍보하는 이유가 수수료 수익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Pucker & King, 2022). 넷째, ESG 투자의 급증은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자금이 이미 시장 기반의 자발적 행동으로 마련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오해는 환경과 사회 복지를 위해 필수적인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Pucker & King, 2022).
이처럼 ESG에 대한 다양한 찬반의 움직임들에도 불구하고 현재 ESG가 투자 및 경영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존재하고 존속할 것이라는 점에는 특별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럽연합 및 각종 선진국들에서 ESG 관련 기업 정보공개, 지속가능금융 공시규제, ESG 공급망 실사법 등과 같은 다양한 ESG 관련 법과 제도를 점점 더 확대해 가려는 노력들은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이종오, 2024). 예컨대 EU의 비재무정보보고지침(EU Non-Financial Reporting Directive)은 EU 내에 있는 기업 중 500명 이상의 근로자를 가진 기업들에 대해 사회ㆍ환경 영향 관련 비재무제표 공개의무를 시행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환경ㆍ인권보호, 사회적 책임, 반부패, 이사진 다양성, 기업 활동의 잠재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의 선제적 식별, 방지 및 완화를 위한 공급망 실사의무 등을 부여하고 있다(김남근, 2022).
Ⅲ. ESG 범주에서 S(사회) 영역과 노동 관련 지표들
노동문제는 ESG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특히 ESG의 S(사회) 영역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여기서 “Social”은 국제적으로 기업을 비롯한 모든 조직의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을 의미하며, 이는 조직이 사회적으로 특정한 역할이나 행위를 수행할 때 요구되거나 준수해야 할 의무를 가리킨다. 또한 이러한 의무를 성실히 따르지 않을 경우, 일정한 불이익이 뒤따를 수 있다고 정의된다(강충호, 2024). 이러한 맥락에서 ESG의 사회적 책임 개념은, 과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사회적 공헌 활동”으로 해석되고, 의무보다는 시혜적이거나 부차적인 활동으로 여겨졌던 것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강충호, 2024: 77). 즉, CSR이 기업의 “선택(choice)”에 기반하여 경제적 유인이나 특정한 목적으로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주목했다면, ESG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risk)”에 초점을 맞춘다(윤효원, 2024: 225). 따라서 ESG는 기업이 경제적 유인에 의해 특정 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적 수단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리스크를 줄여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려는 개념이다. 따라서 ESG는 “제도적 준수(compliance)”와 이를 평가하는 “틀과 기준”, 그리고 “평가와 질문”이라는 수단지향적 특징을 지니며, “실사(due diligence)”가 강조된다(윤호원, 2024: 225). 이러한 관점에 기반해서, ESG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주에 “거버넌스”, “환경”, “소비자 이슈”, “공정 운영 관행”, “지역사회 참여 및 발전”과 더불어 노동과 관련된 “노동 관행”과 “인권”을 포함하고 있다(강충호, 2024).
ESG의 영역별 측정과 관련해서 단일한 평가기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S)영역의 노동과 관련된 관점과 기준들도 다양한데, 크게 다음의 네 가지 주체들로 평가기관을 나눌 수 있다 : 1) 글로벌표준기관(ISO, GRI 등), 2) 투자자 이니셔티브(GSIA, ICGN 등), 3) 자본시장 데이터 제공기관(S&P, MSCI 등), 4) 주요 영역별 권고안 제시기관(SBTI, TCFD 등). 이 중에서도 점수나 등급의 형태로 계량적으로 진단 결과를 제시하는 ‘자본시장 데이터 제공기관’이 ESG 경영 성과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다(송관철, 2024).
국내외 ESG 평가기관의 노동 평가지표를 정리한 송관철(2024)에 따르면, 해외의 대표적인 ESG 평가기관인 S&P Global에서 발표하는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지수(DJSI)와 CSA(Corporate Sustainability Assessment)를 비롯해, 모건스탠리 캐피털 인터내셔널(이하 MSCI)의 ESG Rating, 파이낸셜타임스 스톡 익스체인지 러셀(Financial Times Stock Exchange Russell, 이하 FTSE Russell), 리피니티브(REFINITIV), 이에프쥐 인터내셔널(EFG International)의 ESG Rating 등 주요 기관들의 ESG 평가는 노동 영역을 주로 “인권과 노동권 보장”, “비정규직 파견직을 포함한 산업 안전보건”, “다양성과 평등”, “양질의 고용여건”, “우수인재 유치 및 직원의 성장과 장기근속”, “공급망 내 ESG 노동" 영역을 중심으로 측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MSCI의 ESG Rating과 FTSE Russell의 경우 공급망 내의 노동환경에 대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MSCI의 경우 “공급업체의 노무관리(차별 금지, 아동노동금지, 강제노동 금지), 결사의 자유 보장, 최저임금 보장, 근로기준법 준수, 공급망 관리, 작업표준 준수 및 투명성” 등을 공급망 내 외부 사업장에서도 지켜지고 있는지 측정한다(송관철, 2024: 193-197). FTSE Russell도 유사하게 “사회 공급망” 영역에서 “노동시간 및 생활임금,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정책 등에 대하여 신규 및 기존 공급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위험평가, 모니터링 및 감사, 공급업체 역량 강화 노력, 공급망 이니셔티브 등”을 개별적으로 측정한다(송관철, 2024: 193-197).
국내에서는 한국ESG기준원, 서스틴베스트, 한국ESG연구소 등 평가기관이 발간하는 지표를 중심으로 ESG 측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ESG기준원의 경우, 노동 관련 지표는 "노동관행", "직장 내 안전보건", "인권", "공정운영 관행" 등 네 가지 영역에서 측정이 이루어진다. 서스틴베스트는 "근로조건", "고용평등 및 다양성", "노사관계 관리", "근로자 보건 및 안전"의 네 가지 영역을 평가하며, 한국ESG연구소는 "인권경험과 다양성", "인적자본 및 근무환경", "안전보건"의 세 가지 영역을 측정한다(<표 1> 참조).
자료 : 송관철(2024: 199-201)에서 재구성.
국내 평가기관들은 노동관행 영역에서 주로 고용, 근로조건 및 근무환경을 다루며, 여기에는 인권과 다양성, 산업 안전 및 보건과 관련된 지표들이 포함된다. 특히 한국ESG기준원과 서스틴베스트는 기업 내부뿐 아니라 공급망 내 연관 기업들의 노동관행, 보건안전, 인권 관련 사항을 평가하는 지표를 포함하고 있으나, 해외의 MSCI, FTSE Russell 등과 비교했을 때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세분화된 지표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국내 평가기관들은 대체로 평가지표를 공개하지 않거나 인용 및 활용을 제한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로 인해 ESG 평가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접근과 논의가 차단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불투명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2021년 K-ESG 가이드라인을 제정하였다(송관철, 2024: 202).
K-ESG 가이드라인은 국내외 주요 13개 평가 및 공시 기준들을 분석하여, 공통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공시 항목과 평가 기준을 정립하고, 각 평가지표별 구체적인 평가 산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된다(송관철, 2024). 특히 K-ESG 가이드라인 내 사회(S) 영역의 22개 지표 중 약 60%에 해당하는 13개의 지표가 노동과 관련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송관철, 2024: 203-204).3) 여기서 공급망 내 협력사들의 노동 관련 지표는 구체적으로 구별된 항목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동반성장” 영역에서 협력사 ESG 경영, 협력사 ESG 지원, 협력사 ESG 협약 사항 등의 형태로 발견되는데,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공급망 관점에서 노동 관련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포괄적이고 모호하게 접근하고 있어 한계가 있다.
자료 : 송관철(2024: 204).
K-ESG 가이드라인은 일반적인 가이드라인 외에도, 중소기업의 ESG 대응을 위한 별도의 공급망 K-ESG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중소ㆍ중견기업 현황 및 국내 관련 법규와의 정합성을 검토하여 구성되었으며, 기존 K-ESG 가이드라인의 노동지표 중 7개 지표를 선별하였다.4) 또한, K-ESG 가이드라인은 기업의 경영활동이 업종별로 상이할 때 ESG 평가지표 역시 업종별 특성을 반영할 필요성을 인식하여, 업종별 K-ESG 가이드라인 이니셔티브를 수립하고 업종별 특화 지표를 발간하고 있다. 이는 GRI의 40개 섹터 표준 개발 계획 및 지속가능성회계기준위원회(Sustainability Accounting Standards Board, SASB)의 업종별 지속가능성 지표 공개 등 글로벌 흐름에 부응한 조치로, 현재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의 주요 수출 산업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업종별 K-ESG 가이드라인 발간은 문화산업과 같이 산업 특성에 맞춘 개별 가이드라인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상으로 ESG의 사회(S) 영역 내 다양한 노동 관련 지표와 측정 항목들을 살펴보면, 노동, 다양성 및 양성평등, 산업 안전, 인권 등이 공통적으로 포함된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은 노동조합이 단체교섭과 단체협약, 그리고 노동법 준수를 감시하는 차원에서 전통적으로 다루어온 의제들이다(김남근, 2023). 또한, 공급망 실사와 관련된 항목들은 원하청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특수고용 및 플랫폼 노동자의 권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익숙한” 과제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노동조합은 ESG 평가 기준에 자신들이 추구해 온 노동 의제가 보다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송진철, 2024; 김남근, 2023).
Ⅳ. 문화산업계의 ESG 논의 및 실천 현황
문화산업 분야의 ESG 관련 연구논문은 여전히 드물고, 최근 발행된 정책기관의 연구보고서나 전문가 기고문, 짧은 리포트 정도의 형태로 주로 다루어졌다. 주요 논의를 살펴보면, 사회와 환경을 위한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고, ESG 관련 마케팅이 확대될 것이기 때문에 미디어ㆍ콘텐츠 기업도 이제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ESG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우형진ㆍ성용준ㆍ김용희, 2022; 박찬욱ㆍ채지영ㆍ양지훈ㆍ홍무궁, 2023). 기존 연구의 흐름을 보면, 기업 마케팅 관점에서 홍보나 메시지의 효과를 분석한 연구(정민화ㆍ정세훈, 2023), 기업 ESG 전략의 사례를 분석한 연구들(장유진ㆍ임성준, 2024)을 비롯해 콘텐츠 다양성 중심으로 접근하는 일부 연구들(김민준ㆍ유승호, 2023)이 있을 뿐, ESG가 문화산업 영역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사회(S), 거버넌스(G) 차원에 주목하여 체계적으로 접근한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문화산업 분야에서 노동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국내 문화산업계 전반의 ESG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어떨까? 우형진과 동료들(2022)의 연구에 따르면, 다수의 미디어 기업들은 ESG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만, ESG를 기업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보니 ESG 위원회를 만들고 홍보하면서도 각 분야에 적합한 기업 고유의 ESG 전략 방안을 수립하고 관리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ESG를 새로운 가치창출을 위한 ‘투자’라기보다는 ‘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조사한 ‘콘텐츠 사업체들의 ESG 경영 및 인식 현황’에 대한 결과를 보면, 출판, 만화, 음악, 영화, 방송 등 주요 콘텐츠 분야 사업체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ESG를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ESG에 대한 인식 수준 및 실천 수준은 기업 매출액ㆍ종사자 규모와 비례하여, 규모가 큰 회사들에서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김인애, 2023.2). 당장 생존에 급급한 (비상장사인) 중소 콘텐츠 업체들은 ESG에 대한 체감을 거의 하지 못하거나 그에 쏟을 여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현재 국내 문화산업계는 전반적으로 ESG의 취지나 중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당장 도입이나 시행이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적절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장에서 집단으로 제작되는 영화ㆍ드라마와 개인 창작자 중심의 웹툰ㆍ음악이 제작 규모와 방식, 산업생태계 구성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처럼, 문화산업의 특수성 및 장르별 차이를 고려한 현실적인 ESG 지표와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적용이 힘들다는 논리다(이혜미ㆍ노창희ㆍ이지은, 2023.8; 김인애, 2023.2). 둘째, 업계의 영세함으로 인해 비용부담은 큰 반면 인센티브나 규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특히 중소 콘텐츠기업들의 경우 ESG 이슈에 대응할 여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책적으로 ESG 도입을 지원해야 하고, 특히 중소 사업체들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들이 나오고 있다(김인애, 2023.2).
그렇다면 문화산업계의 ESG 추진 및 실천 방식은 어떠한가? 영상 미디어 플랫폼 및 콘텐츠 기업을 대표하는 넷플릭스와 CJ ENM에서 최근 발간한 ESG 리포트의 주요 내용을 중심으로, 그들의 경영전략 및 ESG 실천 양상을 살펴보자.
넷플릭스는 2019년부터 ESG 리포트를 매년 발간하면서 기후위기 대응 및 친환경 정책과 더불어 다양성ㆍ포용성을 강조해 왔다. 2023년 발간된 「Netflix Environment, Social & Governance Report」의 주요 내용을 검토해 보자.5) 먼저 환경(E) 부문에서는, ‘글로벌 넷 제로(Net Zero)’에 동참하여 2030년까지 탄소배출 46% 절감을 목표로, 제작 및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과정 전반에서 에너지 효율 제고와 탄소배출량 감소를 추진하고 있다. 사회(S) 부문에서는 제작진, 출연진 등의 인적 다양성을 강조한다. 가령 여성이나 유색인종 배우 캐스팅을 늘린다거나 사회적 소수자 집단인 여성, 아시아계,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출신 직원 구성원들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인종, 젠더, 장애, 성적 지향 등 22개 지표를 통해 자사 오리지널 콘텐츠의 다양성 수준을 분석하고, 향후 더욱 증진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강소현, 2023.2.28.). 그 밖에도 소외계층 교육 및 채용 확대, 직원들의 기부 참여, 임금 형평성 분석 및 임금 격차 줄이기, 복리후생 강화를 통한 소속감 제고를 추진해 왔다. 또한 상대적으로 소외된 전 세계 콘텐츠 창작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넷플릭스 창작발전기금(Netflix Fund for Creative Equity)을 조성하여, 2023년 기준 50개국 이상, 200개 이상의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13,000명 이상의 제작인력 육성 및 지원을 위해 4,100만 달러 이상 투자하기도 했다. 거버넌스(G)와 관련해서는 이사회 전문성, 윤리경영, 인권존중, 리스크 관리 및 이슈 대응, 이사회의 인종 및 젠더 다양성(전체 이사회 임원 31%가 여성) 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콘텐츠 지식재산(IP) 보호, 저작권 침해 방지, 유해 서비스로부터의 소비자 보호 등을 내세우고 있다. 요컨대, 전반적으로 환경 문제에 대한 체계적 접근과 대응을 추구하고 있으며, 구성원 및 콘텐츠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화하는 정책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CJ ENM은 2021년 국내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로 ESG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 문화산업에서 ESG를 주도해 온 기업 중 하나다. CJ ENM은 2022년 한국콘텐츠진흥원과 더불어 국내 방송ㆍ영화 분야를 망라하는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등 23개사와 함께 ECP 이니셔티브(Eco-Balanced Content Production Initiative)를 설립하여 ‘지속가능한 콘텐츠 산업 환경 구축’을 위해 12개 표준을 마련하고 가이드라인을 수립, 운영해 왔다. 「2023 ESG Report」6)에 명시된 분야별 ESG 추진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환경(E) 부문에서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온실가스 배출량 관리체계 구축. 버추얼 스튜디오, LED 월(wall) 등 친환경 기술 활용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S) 부문에서는 인권경영 실태조사 및 개선, 고충처리프로그램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지속가능한 콘텐츠 제작현장 실천 가이드’를 협력사에까지 배포하고 있다. CJ ENM은 특히 콘텐츠ㆍ상품ㆍ서비스의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콘텐츠의 선한 영향력(Good Impact of Content, G.I.C.)’ 지표를 개발하여 자사 콘텐츠가 시청자에 미친 긍정적 영향 또는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 개선 등에 미친 영향의 정도를 평가하고 있다. 예컨대 장애인이나 이민자들의 애환, 학대받는 아동을 다룬 콘텐츠를 비롯해, 장기기증 캠페인에 일조한 <슬기로운 의사 생활>, 여성 중심의 비주류 장르를 조명한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되었다. 또한 협력사에 대한 ESG 교육, 현장실사 및 컨설팅을 통한 공급망 사슬 관리 차원의 조치들도 시행하고 있다. 인적관리 차원에서는 소외계층 채용, 역량 강화 프로그램, 공정한 인사평가 및 합리적 보상, 패밀리 케어 등 워라밸 보장, 복리후생 등이 강조되었으며, 그 밖에도 문화콘텐츠 접근성 취약 계층들을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 서비스 제공을 비롯한 사회공헌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거버넌스 부문에서는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문화 강조, 이사회의 전문성과 투명성, 다양성, 반부패 공정거래 가치의 내재화 등이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앞서 검토한 ESG 리포트의 주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넷플릭스를 비롯한 해외 플랫폼ㆍ콘텐츠 기업들은 주로 환경 및 다양성ㆍ포용성(diversity & inclusion) 차원에서 체계적 데이터에 기반한 구체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추진해왔다. CJ ENM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 또한 유사한 틀을 수용하여 콘텐츠 다양성 등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그 흐름에 동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국내 문화산업계에서 ESG에 대응하는 방식은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우선, 환경(E) 차원에서는 친환경 콘텐츠 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등(이혜미 외, 2023.8) 다양한 형태로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사회(S) 차원에서는 해외의 포괄적인 다양성ㆍ포용성 전략을 ‘다양성 콘텐츠의 제작’이라는 측면에서 수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여성 수퍼히어로나 흑인 인어공주와 같이 젠더, 인종 등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콘텐츠 제작을 확대한 디즈니 사례처럼, 국내에서도 다양성의 척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선한 콘텐츠’의 요소들이 반영된 콘텐츠를 제작함으로써 ‘콘텐츠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것이 곧 ESG 성과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이혜미ㆍ노창희ㆍ이지은, 2022.12).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2021년 이후 방송된 ESG 관련 방송콘텐츠 내용을 분석한 김성근(2023)의 연구에 따르면, 미디어에서 주목한 ESG 관련 콘텐츠의 주제는 대부분 환경 부문에 집중되어 있고, 사회나 거버넌스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ESG의 대표 사례들로 제시된 것들은 국내 대기업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 ESG에 대한 전반적인 대응 수준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영역을 다루는 경우에도 소외된 계층에 대한 지원 등 기존의 CSR과 유사한 시각에서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라는 차원에 치중되어 있었고, 거버넌스의 경우 국내 기업들이 ESG 경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경영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그쳐, 소비자 및 투자자 입장에서 실제 기업 지배구조나 운영에 대해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와 유사한 문제점들은 대기업들이 발표하는 ESG 리포트에서도 발견된다. 실제로 여러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플랫폼 업계 등에서 발간하고 있는 ESG 리포트들은 공통적으로 기업의 비즈니스 경쟁력을 비롯한 일반적인 경영 성과들을 ESG 범주에 끼워맞추는 경향을 보인다. 하이브(HYBE)의 경우 글로벌 팬덤 소통 채널 확대, 위버스 앱 자동번역 서비스 등 팬들의 공연관람 및 서비스 이용경험 개선을 주요 성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엔씨소프트의 2023년 ESG 리포트에는 AI 기술개발 및 경쟁력 강화, 글로벌 파트너십 확대 등이 ESG 성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런 와중에 ESG의 구체적인 분류(범주화), 측정, 분석, 평가와 관련된 표준화되고 정형화된 틀이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으며, 결국 ESG 리포트가 기업의 경영성과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홍보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우형진 외, 2022).
결국, 현재 국내 문화산업계 전반의 ESG 대응은 당장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해외 사례들을 벤치마킹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사자 권익보호나 노동환경 개선 등을 포함한 사회(S) 분야, 그리고 기업 지배구조나 경영을 둘러싼 거버넌스(G) 차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매우 빈약하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대형 글로벌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산업 생태계의 위계적 구조, 구성원들의 이질적 지위 등 문화산업 분야의 특수성과 현실적 쟁점들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형태의 ESG 실천 전략이다. 따라서 산업구조의 복잡성, 다양한 거래관계, 사업체와 종사자 지위의 복합적 위계관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분쟁과 갈등이라는 리스크에 대해 어떤 원칙과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지가 ESG 전략 속에 좀 더 상세하게 녹아들어갈 필요가 있다(김용희, 2021).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는 ESG 패러다임에서는 기업의 성과를 포장하여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영방침이나 관행 자체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장기적으로는 기업들이 ESG에 참여할 수 있는 ‘정책적ㆍ경제적 유인’이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극복될 필요가 있다. 앞서 3장에서 논의했듯, ESG는 기업이 사회적 공헌활동과 같이 좋은 일을 했을 때 ‘인센티브’를 받는 개념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위한 책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에 가깝다. 즉, 이 최소한의 기준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지속가능성이라는 중요한 가치 측면에서 경쟁력 없음이 증명되는 것이고, 더 이상의 투자를 받지 못함으로써 시장에서 도태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Ⅴ. 문화산업 노동환경 의제와 ESG의 연계
미디어 콘텐츠를 포괄하는 문화산업 노동의 중요한 특성은 프로젝트 기반의, 프리랜서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유연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잦은 이직과 밤샘ㆍ초과근무, 저임금, 고용불안,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비롯해 경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 등이 문화산업 노동환경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이용관ㆍ김혜인, 2015; 이용관, 2016). 문화산업 생산자들의 취약성과 노동의 구조적 문제는 이론적 차원에서 불안정성(precarity) 개념을 통해 논의되어 왔다. 이는 ‘모든 형태의 불확실하고 보장되지 않은 유연한 착취’를 의미하며, 평생 고용에 기반한 안정적 직업 정체성이나 예측가능한 스케줄, 고정적 수입, 꾸준한 근무 패턴과 노동조합의 보호, 일과 여가의 분리, 사회적 안전망 등과 정반대되는, ‘불안전’, ‘취약함’, ‘불확실함’ 등을 지칭하는 개념이다(이상규, 2023). 다만 이 불안정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고, 차등화된 정치권력 및 경제적ㆍ사회적 자원의 불균등한 분배 등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위계관계에 따라 차별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일부 사회 구성원들은 안전하게 보호받는 특권을 누리는 반면, 상대적으로 약자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불안정한 구조 속에서 더욱 취약해지게 된다는 것이다(Lorey, 2015).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특히 한국 문화산업 노동의 불안정성은 산업구조 및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Kim & Lee, 2023). 허리가 사라지는 양극화 구조 속에서 다수의 영세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이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수많은 불공정 행위 또는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장에서 특히 비정규직ㆍ프리랜서들이 겪는 고용 및 커리어의 불안정성, 불공정거래와 열악한 처우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2024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실시한 전ㆍ현직 방송미디어 비정규직ㆍ프리랜서 노동실태 조사에 따르면, 79%의 응답자가 비자발적ㆍ예측불가한 방식으로 계약종료 경험을 한 적이 했으며, 지난 1년 중 약 3분의 1인 4.1개월을 실업 상태로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최근 영화나 방송 미디어 산업의 불황이 겹치면서 투자가 위축되고 제작편수가 줄어들다보니, 문화산업 노동자들이 다시 예전처럼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견뎌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김예리, 2024.7.24.).
특히 콘텐츠 제작 시스템의 외주화ㆍ분업화가 더욱 일반화된 최근 상황에서, 업계 불황에 따른 부담이 고스란히 비정규직ㆍ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공공부문 방송사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공공부문 방송사 인력 중 약 42%가 비정규직ㆍ프리랜서이며, 특히 프리랜서들 중 70% 이상이 작가, 아나운서, 리포터, 캐스터 등으로 활동하는 20~30대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김종진, 2020.12). 이러한 자료들은 문화산업 노동환경의 문제가 모든 종사자들에게 동일하게 경험되는 것이 아니며, 종사상 지위, 젠더, 직군 등에 따라 차등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정리하자면, 국내 문화산업 노동환경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문화산업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고용불안,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불안정성(precarity) 문제다. 둘째, 특히 비정규직ㆍ프리랜서 인력들이 차별받는 노동정책 및 노동시장 구조로 인한 불평등과 격차의 심화 문제다. 이들은 노동자로서의 기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조직화ㆍ세력화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셋째, 여기에 외주ㆍ하청제작 등 산업구조의 기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노동환경의 전반적인 악화 문제가 있다. 이는 표준계약, 최저임금, 노동시간 준수 등 종사자 인권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살펴봤듯이 대기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ESG 전략들은 여전히 이 문제들을 포괄하거나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어서 영화 및 방송 분야 작가, 스태프, 연기자 노조와 게임산업 노조 관계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현재와 같은 문화산업 노동환경 속에서 ESG의 흐름과 경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검토해 보았다. 인터뷰에 참여한 노조 관계자들은 ESG가 문화산업 노동의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했다. 특히 향후 ESG가 노동환경 개선과 관련해서 논의되고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으며, ESG의 주요 기준과 지표들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노동조합을 비롯한 종사자들이 참여해서 개선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바람직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영화산업노조).
그러나 전반적으로 ESG 관련 정보가 부족하거나 사회적으로 충분히 의제화되지 못했다는 점, 또는 그동안 환경 중심으로 프레이밍 된 경향이 강했다는 점에서 노동환경 시각에서 접근해 볼 기회가 없었다는 답변(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을 비롯해, 노동자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쟁취하는 것도 요원한 상황에서 ESG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등(방송작가노조) 노조 관계자들은 ESG의 실효성과 관련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SG를 가지고 요구한다고 뭐가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중략) 미국 등에서 ESG가 이슈가 되니까 다들 얘기하고 있는데, 정작 기업에서는 이걸 이용해서 기업 이미지 좋게 하려는 것, 실제적인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기보다는 그냥 홍보 수단으로 그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방송스태프노조)
즉, ESG가 기업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브랜드 홍보용으로 긍정적 이미지만 강조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도구화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노조에서 관심이 있더라도 ESG 자체가 강제성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노동문제와 관련된 의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입장도 있었다(게임기업노조).
최근 국내 미디어ㆍ콘텐츠 산업은 글로벌 플랫폼 중심의 시장재편과 투자위축 등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방송을 비롯한 영상 미디어 산업 분야의 경우 최근 이러한 환경변화 속에서 고용불안, 불공정 계약, 장시간 노동, 임금 체불 등 근본적인 노동문제들이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나마 국내 영화산업의 경우 2010년대 초반 노사정 대타협을 비롯해 노조를 중심으로 제작사 단체와의 교섭을 통해 보다 공정하고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구축해 왔다. 그러나 최근 OTT 시리즈 제작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영화와 방송 분야의 제작사 및 인력이 뒤섞이면서 방송 영역에 남아 있던 열악한 노동관행 등 악습들이 되풀이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기준을 초과한 장시간 노동, 저임금, 4대 보험 미가입, 안전예방조치나 법정의무교육 무시 등 기본적인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일자리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현장에서 부당한 행위들이 벌어져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과거 영화계에서는 잘 지켜지던 관행인데 OTT 제작이 증가하면서 그냥 넘어가고 있다.”(영화산업노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수한 인재들이 이 산업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사교양 방송의 경우 경력이 오래된 일부 시니어 인력들과 저연차의 저숙련 인력들이 지탱하는 구조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이는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밖에 없다. 결국 ESG는 이런 노동환경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ESG의 지표나 가이드라인, 그리고 구체적인 정책이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문화산업 내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작가, 연기자, 스태프 등 프리랜서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파업을 하더라도 언제든 대체 인력이 투입될 수 있기에 부당행위로부터 보호받거나 그에 대응할 수단이 적다. 종종 법원에서 실질적인 근로 내용을 근거로 근로자성을 인정받게 되더라도 매번 사례별로 대응해야 한다는 문제를 떠안고 있다.
“ESG의 사회 부문에서 노동인권 문제가 중요한데, 방송산업에서 노동시장 외주화, 파편화 경향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특히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 외주 제작 종사자들의 관점이나 입장이 ESG에 담길 수 있는가 의문스럽다. 너무 멀게 느껴진다.”(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들은 흩어져 있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결집을 통한 단체행동을 하기도 쉽지 않고, 조직화하더라도 교섭력이 약하다. 방송작가노조의 경우 고료 인상, 표준임금 단가표 마련 등 기본적인 처우개선 및 권리보장을 요구하고 있지만 소속된 협회에 따라 보상도 다르고, 협상력이 전반적으로 약한 상황이다. 이들은 비정규직 산별노조의 형태로 단체를 만들더라도 정규직과 기업이라는 2단계 허들을 넘어야 한다고 말한다(방송작가노조).
프리랜서가 갖는 불안정성의 또 다른 요인은 그들 내부의 격차와 불평등이 무한정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OTT 플랫폼이 시장을 주도하게 된 영상 콘텐츠 산업의 경우, 특히 배우들의 출연료에 있어서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넷플릭스 진출 이후) 제작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대부분 주인공들 출연료로 지급되는데, 나머지 조단역 배우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낮은 보수를 받게 된다. 전체 출연료 파이는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고 있다.”(방송연기자노조)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프리랜서들은, 종사상 지위의 한계와 낮은 교섭력으로 인해 ESG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으며, 공정상생 및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ESG의 틀 속에 참여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
노동환경 문제가 개선되지 못하는 데에는 글로벌 플랫폼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원하청 구조와 같은 복잡한 거래 및 계약관계가 확산된 영향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입장에서 기존에는 방송사나 제작사 등 교섭의 상대방이 분명했지만, 최근에는 플랫폼도 많아지고 유통채널이 유연해지면서 원청 또는 거래 상대방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렵거나 불분명해지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다.
“노동 관련 상담을 할 때, 원청이나 담당자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물어보면서 그쪽과 직접 컨택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직 방송사가 안 정해졌다’, ‘관계자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응답이 나온다. 굉장히 구조가 복잡해졌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본 적도 없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회사나 제작사 대표를 상대해야 하는 답답한 상황이다.”(방송작가노조)
이런 상황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글로벌 OTT에서 장시간노동, 계약서 미작성 등 각종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사단법인 영화인신문고와 고용노동부가 2023년 실시한 OTT 제작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 약 15%가 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12%가 법정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21%가 임금체불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한 하루 12시간을 초과하여 근무한다는 응답이 37%에 달했고, 연장ㆍ야간ㆍ휴일근로 수당 지급률도 12%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의 배경은 기존의 영화나 방송은 법적 규제를 받지만, OTT는 아직 법제도적 ‘진공상태’에 있다 보니 단체협약이나 표준계약, 노동환경 실태조사 등에 대한 법제화가 미비하기 때문이다(김예리, 2023.12.27.).
“넷플릭스는 이제 한국의 제작관행을 파악하고 그냥 묵인하고 있다. (중략) 현장에서 벌어지는 불공정행위들에 대해서는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방관하고 있다. 노조 입장에서는 계약 당사자가 넷플릭스가 아니기 때문에 따질 수 없다.”(영화산업노조)
“넷플릭스는 직접 제작하거나 고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연 배우들의 수익분배나 계약과 관련해서 노조나 어떤 단체와도 교섭을 하지 않고 있다.”(연기자노조)
위의 발언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원청 투자사에 해당하는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은 직접적인 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문화산업 특유의 고질적인 노동환경 문제들을 방치하면서, 노조의 대화나 협상 시도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 대기업들은 환경을 중심으로 포괄적인 ESG 경영 전략을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프리랜서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 근로기준법 미준수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산업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와 같은 복잡한 가치사슬 구조 속에서, ESG가 추구하는 혁신의 긍정적 가치들은 문화산업의 외주ㆍ하청 영역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ESG 경영성과에 대해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도 실제 현장 노동자의 권익 침해와 불공정 관행들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점은 오늘날 ESG 정책의 가장 큰 맹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ESG의 현실 적용 가능성을 높이고, 공급망 사슬 관리 차원의 기준을 강화하는 등 ESG 방법론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문제라 할 수 있다.
Ⅵ. 제언: 더 나은 노동을 위한 ESG 활용 및 현실화 전략
문화산업 노동환경의 구조적 문제들을 ESG의 틀로써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노동환경 의제와 ESG를 연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앞서 본 연구는 문화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로 불안정성의 심화, 비정규직 및 프리랜서 노동문제,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의 국내 진출로 인해 발생한 특수한 산업구조의 문제 등을 지적하였고, 현재 문화산업 기업들의 ESG 실천 현황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제대로 연계되어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ESG 경영이 실질적으로 문화산업의 노동문제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노동환경을 조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문화산업의 구조적 특수성을 반영한 ESG 가이드라인 및 지표를 마련하고 이를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 및 노동환경 개선과 연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현재의 K-ESG 가이드라인은 제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만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대기업 플랫폼과 외주ㆍ하청 제작사 등 복잡하고 위계적인 산업생태계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산업의 현실에 맞게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K-ESG 지표에 현재 존재하는 산업별 개별 지표들과 유사한 형태의 <문화산업 K-ESG 지표>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화산업의 특수성이 반영될 이 지표에는 공정한 보상, 다양성과 포용성, 존엄과 존중,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 해소, 노동조합의 교섭력 보장, 프리랜서 노동자의 보호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화산업 K-ESG 가이드라인 및 지표에는 원청 기업이 공급망 사슬 전체의 ESG 원칙 적용과 관리를 책임지도록 하는 항목들이 분명하게 명시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주요 대기업들의 ESG 리포트에 자주 등장하는 ‘지속가능한 공급망 선정 및 평가’, ‘협력사 동반성장 정책’, ‘공정거래’ 등의 원칙이 선언적 수준에서 제시되는 것을 넘어 강제성과 실효성을 갖도록 하는 보완책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표적인 해외 평가기관들의 경우 공급망 사슬 내 기업들의 노동관련 지표들이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표 3>에 제시된 것처럼 MSCI의 경우 “공급망 노동규범” 항목에서 공급업체의 노무관리, 근로기준법 준수 여부, 작업표준 준수 등을 포함해서 측정하며, FTSE Russell의 측정 항목에는 공급망 내의 기업의 노동시간,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모니터링, 감사 및 평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항목들은 현재의 K-ESG 가이드라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영역들로, 문화산업 K-ESG 가이드라인에는 반드시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자료 : 송관철(2024: 199-201)에서 재구성.
여러 문화산업 노조와의 인터뷰에서도 공급망 관리의 강화를 통해 원청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K-ESG 지표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방송스태프노조, 영화산업노조, 방송연기자노조 등은 원청이 마지막 단계의 스태프들, 특히 후반 작업 스태프들까지 포함해 근로계약서 작성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책임지고, 이를 관리ㆍ감독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원청이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개선 여지가 있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협력사 평가제도, 협력사 근로환경 관리, 현대자동차의 협력사 행동강령 가이드라인, LG솔루션의 공급망 관리방식 등을 모델로 삼아 문화산업에서도 원청의 책임을 높이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원청인 플랫폼, 대형 방송사 및 미디어 기업들이 공급망 내 하청 제작사들의 기본적인 노동환경 관리 방안을 가이드라인에 포함한다면, 앞서 지적된 불안정성 심화, 비정규직 및 프리랜서 보호, 그리고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의 국내 진출로 인한 산업구조 변화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ESG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계하여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제작 기업 및 벤처캐피털은 여전히 ESG 도입을 ‘규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박찬욱 외, 2023).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ESG는 "제도적 준수(compliance)"의 틀에서 접근되는 개념이지만, ESG에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재무 성과를 개선하고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등 기업이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이익 또한 존재한다(강충호, 2024). 따라서 ESG를 규제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보다, 이를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시각 역시 필요하다. 국내 콘텐츠 투자 환경은 모태펀드를 중심으로 중소기업 보호와 산업생태계 유지를 위해 다양한 규제를 도입해 왔다. 이 중 상호출자 제한, 표준계약서 사용 의무, 취약 분야 투자 의무 등의 규제는 ESG가 지향하는 사회(social)와 지배구조(governance) 측면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박찬욱 외, 2023). 따라서 투자사들은 ESG 펀드 조성을 확대하고 적절한 투자처를 찾기 위해 주력하고 있으며, 콘텐츠 산업에 적합한 ESG 투자 기준을 명확히 설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면 국내 콘텐츠 기업들은 투자 요건을 충족하는 주요 투자처로 부상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콘텐츠 산업의 특성을 반영한 ESG 투자 활성화를 위해서도 국내 문화산업의 실정에 맞는 특화된 ESG 기준의 설정이 시급하다.
문화산업의 특수성을 반영한 K-ESG 가이드라인 제정과 함께 ESG 준수를 위한 규제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노조들이 ESG에 대해 비관적 인식을 가지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ESG가 기업의 사회적 공헌 활동처럼 시혜적이고, 기업의 자발적인 선의에만 의존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유도되고 있다는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유럽의 공급망 실사 의무화 조치와 같이 ESG에 더 강력한 규제적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 제안되었다. 영화산업노조의 경우 영화산업에서 노사정 협의체가 결성되고 이를 통해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었던 사례를 언급하며, 정부와 정치권의 압력이 사측을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이끌었던 경험을 ESG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ESG 역시 정부와 정치권이 더 강한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 ESG가 기업이 전략적으로 신경 쓰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경영자 중심 논리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만약 노조가 ESG 평가에 참여하여 S(사회)나 G(지배구조) 부문에 대한 평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면 ESG 보고서의 공신력을 한층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거래소(KRX)가 2021년 제정하고 발간한 <ESG 정보공개 가이던스>에 따르면, ESG 보고서 작성 및 공개 절차 중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이 포함되어 있으며, 보고서의 범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기업은 이해관계자의 기대와 관심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이해관계자란 “회사의 영업 활동, 제품 또는 서비스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거나 기업의 전략 수행 및 목표 달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이에는 주주 및 근로자뿐만 아니라 기업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자가 포함된다”(24쪽)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ESG의 사회(S) 부문뿐만 아니라 거버넌스(G)와도 연계된 것으로서, ESG 정책의 수립과 시행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진단과 평가의 모든 과정에서 해당 산업의 종사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이와 더불어, 문화산업 분야의 현황에 맞는 ESG 가이드라인 제작과 운영, 평가에는 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프리랜서들의 협회나 단체가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제도적으로 확보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노동환경의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제도의 실효성과 강제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실정에 맞는 ESG 기준의 설정과 더불어, 문화산업 내 노조 역시 ESG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인터뷰에 응한 노조 관계자들은 현재 ESG 운영 상황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ESG가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문화산업의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유효한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였다. 예를 들어, 영화산업노조는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근로계약서 작성을 강제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통해, 그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노동환경 문제를 개선할 수 있으며, 이는 기업 이미지 제고 및 소비자 인식 개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노조에서도 이러한 좋은 관행이 자리 잡는 것을 지지하고, 이를 언론에 알릴 의향이 있다”고 언급했다(영화산업노조). 이처럼 노조의 적극적인 참여와 ESG 경영의 결합은 문화산업 내 노동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SG를 중심으로 한 노조의 노동운동이 소비자 운동과 연계될 수 있는 방안도 제안되었다. 한빛미디어인권노동센터 관계자는 “기업이 ESG 경영을 하지 않거나 비윤리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경우, 소비자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게 되고, 이는 기업의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실 ESG 경영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소비자 운동과의 연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2년 KBS 드라마 <미남당> 제작 과정에서 스태프들이 근로기준법 상의 휴게시간 준수를 요구하자 계약이 해지되어 논란이 일었던 사건 당시, 이 사실이 배우 팬덤 사이에서도 공론화가 되었고, KBS 역시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노동 관련 문제가 발생할 때, ESG 개념을 활용하여 팬덤을 대상으로 한 캠페인을 조직하고, 이를 소비자 운동과 연계하는 전략이 ESG 경영의 실효성을 높이며 기업의 책임을 촉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문화산업은 소수의 거대 방송사와 글로벌 플랫폼, 그리고 다수의 영세한 제작사 및 개인 창작자로 구성된 극단적인 피라미드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급망 사슬의 관점에서 ESG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원청 기업이 하청 기업들의 ESG 경영을 책임지고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원청은 단순히 하청 기업들의 ESG 경영에 대한 점검과 관여를 넘어서,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ESG 경영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상생협력기금 지원 등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22년부터 대기업은 정부의 동반성장위원회를 통해 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고, 자신들의 공급망 내 중소기업에게 ESG 표준 가이드라인에 따른 맞춤형 ESG 지표를 선정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은 ESG 교육, 진단, 현장실사(컨설팅),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 등의 종합적인 ESG 경영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동반성장위원회는 컨설팅 후 ESG 지표 준수율이 우수한 협력사에게 ‘ESG 우수 중소기업 확인서’를 발급한다. 이러한 확인서를 보유한 협력사는 은행의 금리 우대, KOTRA의 수출 지원 서비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환경ㆍ에너지 기술 지원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밖에 중소 콘텐츠 제작사들의 ESG 도입을 지원하는 방법들도 필요하다. 예컨대 각종 제작 지원사업시 ESG 평가결과를 반영하여 가산점을 부여하는 방안을 비롯해, ESG 인증 기업에 대한 저금리 융자 도입, 모태펀드 주목적 투자 대상 및 요건에 ESG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기업들에 대한 우대 조항들을 포함시키는 등의 방안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 디즈니, CJ, 네이버 등 주요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의 일환으로 기부 및 봉사활동 외에, 문화산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상생협력을 위한 기금 마련 및 확대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한, 노조는 이러한 상생협력기금에 원청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방송연기자노조는 방송사 및 대형 콘텐츠 제작사로부터 복리후생 기금을 지원받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연기자들의 건강검진, 자녀교육비 지원, 경조사 지원 등 다양한 복리후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처럼, 상생협력기금을 통해 중소 제작사들이 ESG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문화산업의 노동문제를 ESG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이를 어떻게 실질적인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지 탐색하였다. ESG와 노동문제를 연결하려는 기존 연구가 여전히 부족하며, 특히 그동안 문화산업의 노동의제와 ESG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경영자가 아닌 노동자들(노동조합)이 ESG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의 의의가 있다. 후속 연구에서는 노동조합의 의견뿐만 아니라, 문화산업 K-ESG 가이드라인 제정과 관련된 경영자들의 구체적인 의견과 노동조합의 ESG 참여에 대한 경영자들의 인식을 다룬 연구가 추가되어, ESG가 노사 간 충실한 정보 제공과 성실한 협의를 통한 진정한 ‘사회적 대화’의 기회로 자리잡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