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무형유산 보호 제도가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해 왔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가 긍정적 효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며, 다양한 한계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유자 인정과정에서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전승과정에서의 구조적 문제 또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강정원, 2002: 140). 2000년대 이후만 보더라도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폭행ㆍ금품수수ㆍ성추문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갈등이 양산되고 있다(동아일보, 2018; 손가영·김예리, 2019; 이다비, 2018; 주강현, 2007). 전승구조 내부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 원인들을 두고, 선학들은 대개 보유자의 문화권력화,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구속적 전승체계의 문제 등으로 해석하며 향후 개선책은 보유자 중심의 구속적인 전승구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송준, 2012; 이장열, 2005; 이재필, 2011; 임재해, 2007). 필자는 선학들이 지적한 보유자 중심의 구속적 전승구조 문제 및 개선책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만 선학들의 연구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선에서만 머물러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재해는 적극적인 문화창조 방향으로 문화정책을 혁신하려면, 국제적인 문화 경향성과 무형문화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007: 241). 이는 문화정책이 국제적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는지, 정책의 배경이 되는 ‘무형문화’에 대한 철학과 학술적 논의가 타당한지 재고해 봐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무형유산 정책에 내포된 전승구조는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인지, 무형문화를 본질로 하는 전승구조가 그 본질에 부합하는지 등 고민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또 이를 바탕으로 한 개선책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해 학술적 차원에서는 다소 아쉬운 면들이 있었다. 필자는 선학들의 문제 분석에서 나아가 국가(공공)가 지정하고 지원하는 ‘무형’의 유산을 특정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가? 이러한 현상은 타당하고 공정한가? 이상 두 질문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책의 근간이 되는 학술적·철학적 논의가 빈곤하다는 것은 곧 정책 내용의 부실로 이어져 의도치 않은 폐해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무형유산의 주요 전승자인 ‘보유자’가 국가가 관리하는 무형유산을 ‘보유’한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사고로 비롯된 ‘보유자’ 명칭이 보편적인 현상인 것인지 다른 국가들과 비교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현행법 목적에 부합한 명칭을 제안함으로써 미래세대를 위한 전승 가치를 재고하고자 한다.
이 글의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법으로, 주요 자료는 2003년 채택된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이하 2003년 협약) 당사국이 정부간위원회에 제출하는 정기보고서이다. 왜 당사국의 정기보고서인가? 동아시아 3국만 보더라도 각 국가들은 2003년 협약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은 유네스코 체제에 부합하도록 2015년 「무형문화재법」을 제정한 바 있었고, 유네스코 표준에 맞도록 2023년 ‘문화재’에서 ‘문화유산’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또 「국가유산기본법」을 통해 신설한 ‘국가유산의 날’은 처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하 유네스코 무형유산)을 등재한 날 12월 9일이다(김예나, 2023).1) 자국 내에서 무형유산을 지정하지 않았었던 중국은 2011년 「비물질문화유산법」을, 북한은 2012년 「문화유산보호법」을 채택해 이른바 속도전을 통한 자국의 무형유산 등재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는 2003년 협약의 기본지침에서, 자국에 등록된 무형유산을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UNESCO, 2024: 7). 더불어, 2003년 협약에서 유네스코가 권고한 내용은 자국에서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유산 목록을 정리하는 것 등이었는데 이러한 내용 때문에 당사국들은 유네스코 기준을 의식하면서 자국의 유산 관련 실무를 후에 재정비하거나 신설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모든 국가의 모국어를 관습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가정했을 때, 단일 언어(영문)를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각국의 자료로는 각국이 유네스코에 제출하는 무형유산 정기보고서(이하 정기보고서)가 유일하며, 이는 각국의 무형유산체제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전략이라 생각하여 해당 자료를 주 연구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정기보고서의 질문은 A~C 대분류로 나눠진다. A는 Cover Sheet로, 각 국가의 기본정보와 보고서 요약에 대해 다룬다. B는 Measures Taken to Implement the Convention으로 각 국가가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최신 정보를 답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각 국가는 마지막 정기보고서 제출 이후 변화된 제도, 책임기관과 교육·기록기관, 유산목록 등을 작성한다. 마지막 질문 C는 States of Elements Inscribed on the Representative List로 대표목록에 등재된 개별 무형유산 종목들의 상황을 다룬다. 등재된 종목의 성격과 기능, 최근 당면한 위험성, 홍보 노력, 공동체 참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A~C까지의 질문 중 각국의 법률, 전승체계 등을 파악할 만한 단서는 제도를 서술한 질문 B에 있다(B에서 제시하는 하위 질문은 다음 각주를 참고).2) B에 해당하는 질문들은 각국의 무형유산 보호 노력을 다루기 때문에 제도·기관 등을 총체적으로 논한다. 특히 무형유산을 보호하는 질서 원칙(ordering principle)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각국의 전승체계를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이를 보유자(holder)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정기보고서의 공통질문 중 각국의 제도나 전승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질문 B 항목들을 중심으로 분석을 수행하고자 한다.
이 글의 연구범위는 유네스코 분류에 따른 아시아 국가 중 유네스코에 무형유산을 등재한 국가 총 31개국이다. 유네스코의 지구촌 분류는 ▲Group I[Western Europe and Others] ▲Group II[Eastern Europe] ▲Group III[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 ▲Group IV[Asia and the Pacific] ▲Group Va[Africa] ▲Group Ⅴb[Arab States]로 나뉘는데 이 중 아시아는 그룹 IV의 태평양 연안을 제외한 일부 권역이다. 아랍국가 일부도 서아시아에 해당하나 이 글에서는 유네스코 분류를 따르기로 한다.
이 글의 제II장은 이론적 배경으로 명칭(언어)에 내재된 특성을 파악한다. 제III장에서는 2003년 협약 아시아 당사국의 주요 전승자 명칭을, 정기보고서를 통해 분석한다. 또 당사국들이 규정한 명칭의 차이를 어원 및 용례를 통해 분석한다. 제IV장에서는 연구 결과를 요약하고 다른 명칭을 제안하며 연구 시사점을 도출한다.
II. 이론적 배경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따르면, 언어의 사회적 성격은 언어의 내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며, 개인들의 사회적 불균일성은 언어로부터 비롯된다(1991: 22). 이러한 맥락에서 누군가에게 ‘특정한 칭호’를 부여하는 일은 개인을 귀족화 하는 긍정적 차원이든, 개인에 오명을 찍는 부정적 차원이든 신분을 가르는 특수한 방식 중 하나로 작용한다(1979: 56). 이는 임명된 집단 / 감추어진 집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임명된 행위자는 나머지 사람들에 의해 임명된 자로 분명하게 인지되고, 그것은 사회적 차이로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서임(敍任)은 그것을 받은 사람을 실제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완전히 현실적인 상징적 효력을 발휘한다. 우선 그것은 서임을 받은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그리고 대개는 행동까지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변화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이 그를 경칭으로 부르고, 그에 걸맞은 존경을 표시한다는 점이다. -그들 성과의 진위 여부, 진실성 등은 모른 채 ‘특정한 칭호’만을 통해서 말이다.-부르디외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언어를 통한 사회적 의미와 위상은 사회 전체 및 개인에게 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가 가진 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상징권력으로 분류되는 귀족의 작위나 학위 같은 직위(상징)는, 그것의 가치에 대한 믿음의 폭과 깊이를 증가시킴으로써, 그 소지자의 가치를 영구히 증가시킨다. 즉 임명은 무(無)에서 차이를 창조하는 사회적 주술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임명의례가 만들어내는 진정한 기적은 아마도 그것이 인정받은 개인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정당하다는, 그들의 실존이 무언가에 쓸모 있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종의 저주와도 같이, 차별화하는, 차이를 만드는, 변별적인 상징권력의 본성은 탁월한 계급이 대문자로 시작되는 ‘존재’에 접근함에 따라, 나머지 계급을 불가피하게 무(無) 속으로 혹은 최소한의 존재 속으로 떨어뜨린다는 데 있다(1991: 22, 157-159, 170).
언어의 내적 특성에 따라 곧 사회적 지위에 구별이 생긴다는 부르디외의 주장은 선학들이 지적한 한국의 보유자 문제를 연상케 한다. 예컨대, 임재해는 무형문화를 공동의 문화로 보지 않고 보유자 등 특정인의 독점물로 보는 것이 ‘인간문화재병’을 유행시킬 뿐 아니라,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라 비판한 바 있었다(2007: 270). 이는 보유자가 가진 막강한 사회경제적 동기(전승지원금 등)가 이들을 곧 문화권력화 한다는 시각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이장열은 보유자가 보유하고 있는 기예능 종목은 보유자 개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창작품이고, 이는 역사와 더불어 전승되었다는 점에서 무형유산은 공적(公的) 차원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2005: 240). 송준은 한국과 같이 문화유산 보존에 있어 국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를 사례로 제시했는데, 전수교육을 강조하는 프랑스에서는 보유자가 기예능의 ‘보유자’라는 관점보다는 ‘전수자’라는 관점이 중요시된다고 한다. 따라서 보유자 인정 기준에도 ‘교육자적 능력’이 경력·재능과 함께 중요한 평가요인으로 작용된다고 한다. 송준 또한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무형유산체제보다는 무형유산 ‘전승’에 중점을 둔 보존을 피력한 바 있었다. 우선 무형유산의 보존과 전승에 있어 중요한 것은 기예능을 보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유한 ‘기예능’의 보존과 전수과정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일부 보유자들은 이러한 현실(혹은 세계 사정)은 외면한 채 자신들을 ‘인간문화재’라 불러줄 것을 요구해 왔다. 살아있는 사람 자체가 ‘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마도 이웃나라 일본에서 사용하는 명칭(인간국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도 한국의 문화유산 정책 시각이나 제도가 그러한 착각을 용인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2012: 123). 송준의 지적처럼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일임하는 정책의 문제(전수교육권/전수장학생 추천/이수자 시험 추천/우수 이수자 추천/전승교육사 추천 등), ‘보유자’나 ‘인간문화재’처럼 마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명칭의 문제 등 사실상 보유자를 위시한 문제들은 복합적 요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2010년대 초반에는 「무형문화재법」 제정을 앞두고 전승자 대토론회, 학술회의 등 다각도의 법률 검토과정이 진행된 바 있었다. 이때 보유자로 대표되는 전승자 집단, 국가유산청 간 의견 충돌이 많았다. 우선 전승자 집단은 청이 제시한 개정안을 모두 반대했다. 원형유지원칙에서 전형유지원칙으로의 이행을 반대했고, 보유자 임기의 정년제 도입도 반대했으며, 이수심사를 국가가 주관하는 것도 반대했고, 전수자가 이수자가 된 뒤에도 보유자에게 교육받을 것을 요구했다(국가유산청, 2014: 63-65, 83-84). 즉 보유자가 이전에 가졌던 권한을 단 한 개도 양보할 수 없고 권한 강화만을 요구한 것이었다. <표 1>은 보유자로 대표되는 전승자 집단의 요구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자료: 국가유산청(2013.10.31.), 「무형문화유산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제정 추진(05_무형문화유산법 제정 관련 전승자 초청 토론회 결과 보고), 7-13, Available: https://url.kr/d5riwu
당시 국가유산청은 「무형문화재법」 제정 과정을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추진하며, 무형유산 분야의 가장 큰 논란은 보유자 관련한 일들이라 언급한 바 있었다. 여기에는 보유자 인정과정에서 벌어진 후보 간 알력 다툼, 보유자와 비보유자 간 갈등 등이 포함된다. 국가의 인정과 지원을 통해 사회적 후광과 경제적 지위가 보장되는 보유자 입장에서, 공공을 먼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의문스러운 대목이다. 또 청에 대놓고 ‘차별화’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것도 의문이다. 일부 학자들이 상술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은, ‘보유자’라는 위상의 파급력과 그에 따른 부정적 사건들에 기인한다. 대표적으로, 보유자 인정을 두고 금품수수가 있었다는 전례(신형준, 1996a; 1996b), 전승지원금을 수혜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유자들이 공적 차원의 무형유산을 고액으로 전승하고 있다는 전례(신형준, 1999), 전수생들의 이수심사를 빌미로 보유자들이 금품을 요구한다는 전례(박영석, 1996), 보유자들이 전승지원금을 사적 용도로 사용하거나 횡령해 왔다는 전례(감사원, 2015: 26-28, 32-33) 등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의 일부 보유자들이 자신이 인정된 무형유산 종목을 대표하기보다 ‘소유’한다는 차원으로 인식해 왔음을 방증한다. 가령 일부 보유자들은 해당 종목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배타적 관계를 맺는 데 있어 해당 종목을 통해 우월한 지위를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선학들이 지적한 것처럼, 만약 보유자에게 다양한 동기가 없었다면 이들의 우월한 지위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정다은, 2024: 41-42).
‘보유자’라는 명칭은 제도에서 규정된 용어이고 제도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와 지원을 보장받는 법령 언어이다. 우리가 신중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점은, 법령에 쓰이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공공언어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고, 지위에 대한 차별을 상기할 만한 차별언어의 사용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는 점이다. 법령의 언어는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점에서 차별언어의 쓰임 자체가 원천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점이 법령의 차별언어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적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본질적 의미의 차별언어로 인식되지는 않지만 법 적용과 운용에 있어서 실질적 차별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법률상 차별언어로 개선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령, 언어의 표현 자체가 차별적이라는 발상을 넘어 사회적 판단에 기초해서 불평등·불공정이 내재되어 있다면 이는 차별적 표현 또는 차별언어로 인정되는 대목이다(강현철, 2021: 24). 무엇보다 공공과 국가의 영역은 국민보다 높은 지위가 아니라 국민의 ‘봉사인’으로서 지위를 가진다는 점에서, 쓰는 용어 역시 봉사인으로서의 용어로 적극적인 변화가 필요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또 전문직종이나 직책은 직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이지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문직을 수행하는 사람의 지칭은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로 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강현철, 2021: 135-136). 언어의 내적 특성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르디외의 주장처럼, 보유자는 전승교육사와 동일한 칭호로 불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표 1). 그렇다면 ‘보유자’라는 명칭은 그들의 권한과 지위를 다른 집단과 구별 짓기 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 것일 수 있다. 또 그들이 ‘보유자’보다 더 특수한 명칭(인간문화재 등)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명칭(언어)에 부여된 사회성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개인이, 무형의 공동유산을 ‘소유’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논박의 여지가 없을까? 다른 국가에서는 무형유산의 ‘보유’를 인정할까?
III. 2003년 협약 아시아 당사국의 주요 전승자 명칭과 차이
먼저 유네스코에서 권고하는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 절차에도 ‘전승자(bearer)’란 표현만 등장할 뿐, ‘보유자(holder)’와 같은 표현은 찾아볼 수 없었다.3) 무형유산 관리에 대한 유네스코 매뉴얼에서 또한 주요 전승자를 bearer로 표기하고, 유산 관련 실무자를 모두 포괄해 practitioner로 표기하고 있었다(UNESCO, 2022). 그러니까 국제 표준이라 이르는 유네스코는 규정과 원칙에서 무형유산 전승 주체를 ‘보유자’와 같은 명칭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 <표 2>를 통해, 아시아 당사국들은 전승자를 어떻게 표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자료: UNESCO ICH 홈페이지에서 Group IV 아시아 권역의 각 정기보고서를 참고하였음. 당사국들의 정기보고서 출처는 참고문헌에 기술하였음.
유네스코 분류에 따른 Group IV는 아시아와 태평양을 포괄하는데 2003년 협약에 가입한 당사국은 2025년 2월 3일 현재 44개국으로 분류된다. 이 중 태평양 권역은 13개국으로 이를 제하면 아시아 당사국은 31개국으로 분류된다. 각국의 전승자 명칭을 분석하는 이 글에서는 2003년 협약에 따라 유네스코 무형유산을 등재한 국가만을 추출하였다. 유네스코 등재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자국 내 관련 시스템이 미비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개국 중 유네스코에 무형유산을 등재하지 못한 아프가니스탄·브루나이·네팔 3개국은 배제하였고, 위 표는 28개국만을 다루었다. 정기보고서 분석 결과, 문서를 확인할 수 없거나 명칭 자체가 모호한 국가들이 있었다. 먼저 부탄의 경우, 정기보고서 내 전승자 제도 관련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관련 제도가 미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국가들이 전승자 관련 처우나 보존 제도를 상세히 규명하고 있는 데 반해 부탄에서는 그러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밖에 정기보고서를 기간 내 제출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는 국가들인 라오스·타지키스탄 2개국이 있었다. 또 최초 정기보고서 공개 기한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국가들 말레이시아·미얀마·싱가포르·태국·동티모르 5개국이 있었다. 따라서 전술한 8개국은 수치를 내는 데서 배제하였다.
유네스코 아시아 당사국의 전승자 표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20개국 중 주요 전승자를 ‘보유자’ 그러니까 holder로만 표기한 국가는 한국밖에 없었다. 표에서 보다시피 holder를 다른 용어와 일부 혼용하는 국가는 있었지만 holder로만 설명하는 국가는 한국뿐이라 더욱 특수한 대목이다. 둘째, 20개국 중 주요 전승자를 ‘전승자’ 그러니까 bearer로만 표기한 국가는 12개국이었다. 셋째, 20개국 중 holder와 bearer을 혼용한 국가는 일본밖에 없었다. 눈여겨볼 점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공유하는 문헌 상에는 전승자 집단을 유네스코에서 활용한 용어 bearer로 설명하고 있지만 자국 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 두 국가의 자국 상황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보유자’, 일본은 ‘보지자(保持者)’로 주요 전승자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영문명칭을 양국 모두 자국 내에서는 holder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무형유산법」의 영문법령인 「ACT ON THE SAFEGUARDING AND PROMOTION OF INTANGIBLE HERITAGE」의 Article 2에서 확인할 수 있다.4) 일본은 「文化財保護法」의 영문법령을 제공하지 않고 있는데 무형유산의 영문 홍보자료에서 보지자를 ‘holder’라 표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文化庁, 2022: 2). 즉, 우리가 공유하는 ‘보유’한 자라는 인식이 대동소이한 것이다. 넷째, holder와 bearer 외 기타 명칭을 활용하는 국가들이 있었다. 인도는 두 용어 모두 사용하지 않고 artist·practitioner·community 등 전승자 명칭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bearer로 전승자를 설명하고 있으나 community란 표현도 활용하였다. 이란 또한 bearer로 전승자를 설명하고 있으나 master·living human treasure 표현도 활용하였다. 필리핀 또한 bearer로 전승자를 설명하고 있으나 community·expert·practitioner·teacher 등 실천과 교육을 상징하는 용어를 혼용하기도 하였다. 튀르키예 또한 bearer로 전승자를 설명하고 있으나 living human treasure 표현도 활용하였다. 스리랑카는 holder와 community·practitioner을 혼용하고 있었다.5) 이처럼 다양한 명칭을 혼용하는 국가는 6개국이었는데, 이 중 bearer과 기타 명칭을 혼용하는 국가가 5개국, holder와 기타 명칭을 혼용하는 국가는 1개국이었다. 이밖에도 각국의 정기보고서를 분석하다 보면 흥미로운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전승자 집단이 특수했다. 인도네시아는 전승자(bearer)라 표현하고 있었는데, 전승자 집단이 아주 다양했다. 해당 종목이 공예기술(N)이라 가정했을 때 해당 종목의 도구를 만드는 공예가(crafts person who make the sheath, hilt and other accessories), 수집하는 애호가(enthusiasts and collectors), 전문가 및 교사(experts and teachers), 해당 종목을 사랑하는 대중(the general public who appreciate N culture) 등 광범위한 것이다(Indonesia, 2013: 15). 공동의 무형유산이 특정인의 독점물이 아닌, 아주 광범위한 집단에 향유되는 것이 ‘전승’ 그 자체로 인정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분류 방식이었다.
정리하면, 표에서 제시한 28개국 중 정기보고서 실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20개국이었고, 주요 전승자를 holder로만 표기한 것은 한국뿐이었다. 12개국은 전승자를 의미하는 bearer로만 표기했고, 5개국은 bearer과 practitioner 등 기타 용어를 혼용해 명칭을 표기하고 있었다. 즉 20개국 중 17개국 압도적 다수가 bearer이란 용어를 통해 전승자 집단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한국만이 holder라는 용어로 주요 전승자를 규정하고 있을까? 왜 유네스코는 무형유산 제도를 세계무대에서 선점한 한국과 일본 내 명칭 holder를 채택하지 않은 것일까?
이 절에서는 유네스코와 다수의 국가가 채택한 주요 전승자 bearer, 한국이 채택한 holder의 어원과 용례 등을 분석해 그 차이를 분별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부르디외가 주장한 언어가 가진 내적 특성을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먼저 bearer의 사전적 정의는 “무언가를 운반하거나 가져오는 사람 또는 동물(a person who, or animal which, carries, brings, or transports something)”6)이다. bearer은 동사 bear로부터 파생되었다. bear의 사전적 정의는 “짐을 나르다(to carry a burden)”, “들어 올리다(lift)”, “임신하다(to be pregnant)”, “누군가를 대신해 선물 등을 가져오거나 전달하다(to bring; deliver(a gift, a letter, a message, etc.), esp. on behalf of another)”7)이다. bear은 주로 “운반하다”, “전하다” 등 의미로 자주 쓰이는데 이는 그 어원과 관계돼 있다. bear은 게르만어로부터 파생됐는데, 다양한 국가 및 경계에 걸쳐 유사 의미가 쓰여 왔다. 예컨대, 고대 네덜란드어 beran, 고대 독일어 beran, 고대 아이슬란드어 bera, 고트어 bairan, 고대 덴마크어 bæræ 등 동사들의 뜻은 모두 “운반하다(to carry)”, “가져오다(to bring)”, “견디다(endure)”, “출산하다(to give birth)”라는 의미였다. bearer의 용례를 살펴볼 수 있는 복합명사로는 ring bearer(결혼식에서 반지를 들고 오는 사람), stretcher bearer(들것을 옮기는 사람), coffin bearer(관을 옮기는 사람), cup bearer(연회 등에서 술을 따르는 사람), color bearer(군대에서의 기수, 기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 등이 있다. 종합적으로 bearer은 그 어원 및 용례에 미루어 보았을 때, 주로 ‘운반’, ‘이동’, ‘전달’을 연상케 하는 명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holder의 사전적 정의는 “붙잡거나 움켜쥐는 사람(one who holds or grasps)” 또는 “보유, 점유, 소유하는 사람(one who holds, occupies, possesses, or owns; a tenant, occupier, possessor, owner)”8)이다. 동사 hold의 사전적 정의는 “잡다”, “감시하다(to keep watch over)”, “도망가지 못하게 하다(to keep from getting away)”, “억류하다(detain)”, “절대적으로 또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가지거나 유지하다; 소유하다; 재산으로써 가지다(to have or keep as one's own absolutely or temporarily; to own, have as property)”, “지위나 자질 따위를 소유하다(to possess, have, occupy(a position, office, quality, etc.))”9) 등이다. holder는 약 1400년경 임차인(tenant), 점유인(occupier) 등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고대 독일어 halter, 고대 프리지아어 haldere, 고대 네덜란드어 houder 등에서도 유사한 의미로 쓰여 왔다.10) holder의 복합명사로는 stockholder(주식 소유자), account holder(예금 소유자), copyright holder(저작권자), power holder(권력자; 실권자) 등이 있는데 이러한 용례들은 경제적 배타권과 연관돼 있고, 배타적 관점의 ‘소유’ 의미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합적으로 holder는 그 어원 및 용례에 미루어 보았을 때, 주로 ‘소유’라는 경제적 관념을 연상케 하고 이때의 소유는 배타적 관계로부터 설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bearer은 ‘전달’, ‘운반’ 기능이 더 강조되었고 배타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반면, holder는 ‘소유’, ‘점유’, ‘보유’ 등 배타권이 인정되는 경제적 영역과 더 가까웠다. 여러 국가 중, 한국과 일본만이 holder라는 모호한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한국과 일본이 무형유산 제도나 전승체계를 세계무대에서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가들이 이러한 명칭 잔재는 수용하지 않은 것 또한 특수하고 놀라운 대목이다. 이는 국가가 지정하고 지원하는 ‘무형’의 유산이 한 개인에게 배타적으로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기 때문 아닌가.
무형유산은 ‘소유’되기보다 ‘전달’되는 것이라는 보편적 인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보유자들은 ‘보유자’라는 명칭을 ‘인간문화재’, ‘인간국보’로 개정해줄 것, 나아가 인간문화재에 대한 예우 등 법률을 특별하게 제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11) 2010년대 초반에는 「무형문화재법」 제정을 앞두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의견수렴 과정이 진행됐었다. 이러한 자리에서 일부 보유자들의 의견이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인간문화재에 대한 존중과 예우의 문화를 국가적 차원에서 조성할 것”, “무형문화재에 대한 사회문화적 지원이 부족. 집에 문패라도 달아주고 배지라도 만들어주어서 사람들이 존경할 수 있도록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해주어야”, “명예보유자를 예우할 것(보유자보다 위에 두어야 함)”, “이수증만 받고 더 이상 교육을 받으러 나오지 않거나 활동하지 않는 이수자들은 보유자 권한으로 이수증을 반납할 수 있게끔 할 것, 이수증을 받고 3년 혹은 5년에 한 번 다시 시험 보게 할 것”, “보유자에게 이수를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것”(국가유산청, 2014: 26, 31-32, 78, 81, 84) 등 보유자의 위상과 권한을 더욱 확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무형유산을 전승하는 개인들은 그것이 공적 영역에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론적 배경에서 주장했듯, 법률과 제도의 영역에서 사람을 구별 짓는 일은 차별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가 필요한 일이다. 개인적 관계에서 우러난 존경심, 그에 따른 “당신은 보물 같은 사람이다”라는 생각과 국가가 공인한 “보물인간”은 평등을 대원칙으로 삼는 우리 헌법과도 괴리가 있다. 가령, 재벌에 대한 특수한 인식은 비제도적 영역에 있는 것이지, 법률상 그 어떤 내용도 부자와 빈자의 구별을 명시하지 않는다. 존경에 대한 강제와 차별을 법치의 영역에서 규정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무형유산 전승자들의 삶, 다양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세계 무형유산의 전승 가치가 위협받을 수 있다. 이밖에도 일부 보유자들은 이수를 마친 전승자들의 삶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러한 행위 또한 다른 전승자에 있어 배타적이고 위협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가 필요한 일이다. 이수자는 보유자처럼 정기적이고 영구적인 지원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종목만으로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다수의 이수자가 생업을 위해 잠시 전승활동을 보류하거나 전승활동과 부업을 겸업하는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수자들의 현실 문제는 외면한 채, 선배 전승자인 보유자가 후배 전승자인 이수자가 쌓아온 노력의 결실(이수증)마저 빼앗으려 한다면 불완전한 한 개인의 판단으로 다수의 전승활동과 생계를 위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 자격시험도 활동을 안 한다고 해서 자격증을 도로 빼앗아가는 일은 없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로, 자기자신의 이익추구를 가장 큰 목표로 설정한다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격언은 대개의 자유주의사회가 동의하는 가치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발생한 이익집단 역시,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가장 큰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적 분야에서의 특수 이익인지 아닌지는 구별되어야 한다. 공적 이익은 공동체의 모든 혹은 실질적 의미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통의 보편적인 이익을 의미한다. 이에 반대되는 말은 ‘특수 이익’이다. 특수 이익이란 소수의 사람이나 공동체의 한 분파만이 공유하는 이익이다. 그것은 다른 이익들을 배제하며 그들에 대해 적대적일 수 있다. 특수 이익집단들은 자주, 자신들의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합리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그 조직이 추구하는 혜택의 성격이 배타적이냐 혹은 포괄적이냐에 따라 일정한 추론을 끌어낼 수 있다(E.E. Schattschneider, 1975: 68-73).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적 영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과 공적 영역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은 천양지차의 문제라는 점이다. 샤츠슈나이더의 주장처럼, 보유자 집단은 다른 집단과 차별받기를 선호하거나 다른 집단을 배제할 권한을 요구하는 등 배타적인 경향이 있었고, 또 그들의 권한이 강력해지기를 원해왔다. 샤츠슈나이더의 분류에 따르면, 보유자 집단은 특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유자 집단은 법령에 따라 공적 영역에 있는 집단이다. 2010년 권익위의 권고사항12), 2015년 감사원의 감사결과13)가 무형유산 영역이 공적 영역에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또 모든 보유자의 전승지원금이 세비에서 출자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공적 영역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유자 집단 역시 다른 공적 집단과 다르지 않으며, 국가와 공공의 영역에서 그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공동의 것이자 무형의 것인 무형유산을, 특정한 개인이 배타적으로 점유할 수 없다는 것은 유네스코 및 다수의 국가가 공유하는 보편적 인식이다. 한국에서만 유독 이러한 사고를 못하게 된 까닭은 명칭의 내적 특성에서 오는 특수한 경우일 수 있다. 전술한 인용은 일부 보유자들의 인식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인식들은 자신이 해당 종목을 ‘소유’했기 때문에 드러난 타 전승자에 대한 배타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무형유산을 함께 공유하는 대상이 아닌, 보유자 외 다른 전승자에 대한 시험자격, 보유자 집단 내 포섭 가능성 등을 배제하려는 시도 말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그러니까 언어에 따른 관습의 내면화 문제로 이미 많은 분야에서는 명칭을 개선하려는 시도들을 해왔다. 가령 경기도에서는 ‘소외계층’이란 명칭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대상이라는 인식을 유발하고 사회적 낙인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취약계층’으로 변경할 것을 권고한 바 있었다.14)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경기도와 인천 등지에 걸쳐 있는 고속도로였는데, 이러한 명칭이 서울 외 다른 지방을 서울의 주변부로 인식하게끔 한다고 하여 2020년부터는 ‘수도권순환고속도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진명선, 2020). 2009년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이런 말에 그런 뜻이? -차별과 편견을 낳는 말들」은 언어에 내재된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관습을 지적하고 더 나은 명칭을 제시함으로써 관습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국립국어원은 발간사에서 “차별적이고 비객관적인 표현이 널리 쓰이는 사회는 건전성을 잃기 쉽다. 한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사고를 반영한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사회가 되려면 남을 생각하고 불평등한 관계에 놓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평등한 사회, 차별 없는 사회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 ”고 언급한 바 있다(국립국어원, 2009: 2-3). 이러한 각계의 시도는 명칭과 부정한 관습을 개선하려는 노력 중 하나이다. 부르디외 주장처럼 언어 안에 이미 그 내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이는 특히 배타성을 허용하지 않는 공적 영역에서 더욱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관습처럼 일상에 오래 뿌리내린 것일지라도 그것이 변화하는 세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혹은 그것이 차별을 발생시키는 요인이라면 변화해야 한다. 무형유산 제도의 목적은 ‘전승’에 있는 것이지 ‘보유’에 있는 것이 아니며, 무형유산 존속의 이유는 후대에 물려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특정 개인의 독점물로 오인될 만한 ‘보유자’ 같은 명칭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
IV. 결론
이 글은 무형유산의 주요 전승자인 ‘보유자’가 국가가 관리하는 무형유산을 ‘보유’한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유자’ 명칭이 보편적인 것인지 2003년 협약의 아시아 당사국과 비교 분석했다. 명칭을 분석한 이유는, 언어의 내적 특성에 따라 곧 사회적 지위에 구별이 생긴다는 부르디외 주장에 근거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을 등재한 아시아 권역 20개 국가 중(정기보고서 미확인 등 모호한 국가 8개국 제외), 한국만이 holder라는 명칭을 통해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전승체계를 유네스코에 보고했다. 나머지는 bearer 12개국, bearer과 기타 용어 혼용 5개국 등이었다. 즉 표본 추출이 가능한 아시아 20개국 중 17개국, 압도적 다수가 ‘전승자(bearer)’라는 명칭을 활용하고 있어 한국과 대별됐다. bearer과 holder의 어원 및 용례를 분석한 결과, bearer은 그 어원이나 용례 면에서 ‘전달’, ‘운반’ 기능이 강조됐고, holder는 ‘소유’, ‘점유’ 등 배타권이 인정되는 경제적 영역에 가까웠다. 한국과 일본이 무형유산 제도나 전승체계를 세계무대에서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가들이 이러한 명칭 잔재는 수용하지 않은 것이 특수하고 놀라운 대목이다. 이는 국가가 지정하고 지원하는 ‘무형’의 유산이 공동의 산물이지, 한 개인에게 소유될 수 없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기 때문 아닌가 생각한다.
‘보유자’라는 명칭은 보유자가 무형유산을 ‘보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학술적 근거나 사회적 공정성·타당성 등에 대한 합의과정이 불충분했다. 이 명칭은 관련 법 취지 및 무형유산의 전승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규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전승 목적’은 무형유산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15) 이는 보유자가 죽을 때까지 매월 전수‘교육’지원금(전승지원금)을 수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형유산을 ‘소유’한다는 차원의 ‘보유자’보다는, 무형유산을 교육하는 명분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다수의 국가에서 ‘보유’라는 의미는 쓰지 않고 무형유산을 후대에 전달하는 자로서 bearer을 채택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현재의 전승교육사와 보유자를 통합할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되면 이들의 명칭은 말 그대로 전승을 통한 ‘교육자’로 남게 되고, 기존 4개로 분류됐던 계층은 전수자 → 이수자 − 전승교육사로 축소된다. 이는 무형유산을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이수한 사람, 이수한 중에서도 ‘활동’보다는 ‘교육’에 자의적으로 관심이 많은 개인을 선발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즉 활동지원과 교육지원 2트랙으로 제도를 나누어 운영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현행처럼 획일화된 전승 시스템보다 무형유산을 다양하게 보급하는 데, 또 세부적으로 나누어 지원하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국가는 교사 임용과 문화예술강사 선발에 개입하는데, 이처럼 누구나 무형유산을 배울 수 있고 다양한 목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교육자를 선발하는 것이 법 취지에도 더욱 적합하고 사회경제적 갈등 요인을 방지하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현행법보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사를 ‘권위자’라고는 인식하지만, ‘권력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보유자가 무형유산을 ‘소유’하도록 방임해 모든 추천권한을 일임하는 체제보다는 보편적으로 납득할 만한 역할, 교사 기능만을 부여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전승에 초점을 맞추어 교육 역할을 강화하자는 대안은 강정원(2002), 송준(2012), 이재필(2011) 등 연구에서도 강조된 바 있었다. 이는 무형유산 전승의 목적이 개인에 대한 배타적 소유가 아닌 교육을 통한 미래세대로의 전달이라는 데 여러 학자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유’를 연상케 하는 전승 제도보다는 교육의 명분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명칭을 변경하고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전승자를 인정하는 데 있어 모호한 실기평가만을 고수하기보다 교육자로서의 자질, 음악교수법 이수, 공교육에 필요한 인성교육 이수 여부 등이 다각도로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방식은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기존에 인정된 보유자에게 소급 적용하기보다 향후 인정 시 고려되어야 할 항목이라고 생각한다. 각 종목의 명인이 실기를 얼마나 어떻게 잘하는지는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 대중의 평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국가가 나서 선택받은 자/그렇지 못한 자를 나누어 구별 짓기 한다면, 전승자 간 비화 문제는 지속될 것이다. 무형유산 전승자 지원이 현행처럼 영구적인 체제에서는 되도록 주관적 평가는 최소화하고 전승에 대한 의지(혹은 성과)만을 평가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된다. 이밖에도 상시적인 전문가 검토, 대국민 의견수렴 과정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 이미 사회적 언어로 정착된 용어는 이를 개선하고 인식을 제고하기 위하여 많은 논의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다양한 개선방안을 모색하고 발굴하여 언어가 사회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강현철, 2021: 136-137). 유사한 방식으로, 지방정부에서 많이 활용하는 명칭 공모도 개선 용어를 탐구해 나가는 데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또 앞서 제시한 인도네시아 사례처럼 전승자 범위 안에 다양한 집단을 포용해 무형유산 보존 주체를 확대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물론 필자의 대안이 최선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개선 및 견제 시스템들은 이 글에서 다루는 ‘명칭’의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로써 깊이 있게 논의되어야 할 것들이라 본다. 그러나 국가가 관리하고 공공이 향유하는 무형유산 ‘보유’ 현상이 보편 타당한 현상은 아니라는 점, 법령에서 차별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점, 전승자 간 갈등 해결과제가 있다는 점 등은 보유자를 중심으로 한 구속적 전승 제도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칭과 인식 개선 노력을 통해 전보다 더욱 보편 평등하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무형유산 보존 시스템이 구축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