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살던 지네가 숲속의 현자 올빼미를 찾아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조언을 구했다. “매일 다리가 퉁퉁 붓고 너무 아파 죽겠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큰 눈을 잠시 껌뻑이던 올빼미는 근엄한 목소리로 해법을 일러주었다. “자네는 다리가 100개나 있으니 그렇게 많이 아플 수밖에. 다리가 두 개인 참새가 되어봐. 그러면 고통이 98% 줄어들지. 그리고 날개로 날아다니면 모든 다리 통증은 완전히 사라질 거야.” 이 말을 듣고 문제가 깨끗이 해결된 것 같아 기뻐하던 지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가 참새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올빼미가 버럭 화를 내며 야단쳤다. “내가 그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 하나?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일러줬으면 나머지는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1)
Ⅰ. 서론
“존경하는 OOO 의원님!” 국회 상임위 회의장에서 흔히 들리는 말이다. 의원들이 서로를 지칭할 때 입버릇처럼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존경”이란 “남의 인격, 사상, 행위 따위를 받들어 공경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정말 서로를 그토록 “존경”하는가? 또 우리는 그들에게 서로를 진정으로 “존경”하라고 요구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어느 유명 정치인도 말했지만, “존경하는”이라 말했다고 정말 존경하는 줄 알면 곤란하다. 비록 멋있는 말이긴 하지만 백 퍼센트 액면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는, 혹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책의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합리성/효율성은 공공행정이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라는 것은 모든 행정학개론 교과서가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바이다. 합리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효율적으로 집행해야 한다는 명제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Simon(1945)이 오래 전에 갈파했듯이 인간의 합리성은 제약되어 있다. 그리고 정책, 특히 문화정책에서 다루는 사안들은 계량화가 어렵고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들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실제 문화정책 현장에서 사전적 의미의 합리성/효율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 무시하고 마치 교과서적인 합리성/효율성이 실제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믿거나 나아가 마땅히 철저하게 구현해야 한다고 밀어붙인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정책의 합리성이나 효율성은 나쁜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상호 존경하는 것이 나쁜가? 그러면 안 되는 것인가? 이 역시 물론 아니다. 그럼 어쩌라는 것인가? 우리말에는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 있다. 바로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라는 관용구이다. 이는 문화정책에서 합리성/효율성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매우 적절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즉 합리적 정책결정과 효율적 예산배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그렇다고 목숨 걸듯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제약된 합리성과 문화예술의 초합리성을 고려할 때 문화정책에서 합리성/효율성은 결코 완전히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여기고 덤비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불가능한 원칙에 병적으로 집착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대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이 논문은 문화정책에서 어느 정도의 비합리성, 비효율성은 그러려니 하고 용인해 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II. 합리성/효율성 패러다임의 한계
합리성과 효율성의 교과서적 개념은 매우 명쾌하다. 합리성이란 주어진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하는 최적의 대안 선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합리성이라 함은 통상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을 뜻한다(Moran, Rein, & Goodin, 2006). 효율성이란 투입 대비 산출의 극대화를 의미한다. 정부는 국민을 섬기는 공복(公僕)으로서 마땅히 정책결정의 합리성과 예산활동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교과서적 진술이다.
그런데 합리성/효율성이 현실 정책에서 적용되려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요건들이 있다.2) 특히 산출(혹은 성과)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합리성/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자원배분은 미래에 대한 완벽하고 정확한 예측을 전제로 한다. 또한 정책결정이 얼마나 합리적이었는지를 확인하려면 당초의 문제가 과연 얼마나 잘 해결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판정되어야 한다. 예산활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보려면 투입된 예산으로 인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가 나타났는지 명확히 파악되어야 한다. 만약 산출(성과)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합리성이나 효율성이란 개념 자체가 아예 성립될 수 없다. 여기서 합리성/효율성 패러다임의 한계가 드러난다.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 번째는 미래의 불확실성 문제이며, 두 번째는 측정가능성 문제이다.
첫째, 미래의 불확실성은 정책결정의 합리성을 가로막는다.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정책의 산출(성과)은 당연히 미래에 발생한다. 결정과 집행은 지금 해도 그 결과는 나중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한 미래 예측은 불가능에 가깝다.3) 최적의 대안 선택을 위해 아무리 애쓴다 해도 막상 나중에 가보면 기대에 못 미치거나 실패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Landau(1977)는 “정책의 인식론적 지위는 마치 가설(hypothesis)과 같다”고 지적했었다.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질문에 대해 아무리 그럴듯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직은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다. 그 가설의 진위 여부는 검증을 거친 이후에야 판명될 수 있다. 정책결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정책이 합리적 선택이었는지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집행을 하고 평가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비로소 논할 수 있다. 사전에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후적으로는 정확한 판정이 가능할까?
둘째, 측정가능성 문제는 정책결정의 합리성/효율성 논의 자체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어떤 정책이 진정 합리적 결정이었는지를 알려면 그 목표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와 그 성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목표가 애매모호하다면 어떤 정책수단이 합리적 선택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결과가 불명확하다면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가늠하기 어렵다. 정책의 목표가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으면 무엇이 최선의 수단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문제가 얼마나 잘 해결되었는지 혹은 목표가 얼마나 잘 달성되었는지 확실하게 측정할 수 없다면 당초의 정책결정이 과연 최적의 선택이었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다. 예산을 투입한 사업의 결과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산출했는지 정확히 계산되지 않는다면 예산 배분/집행의 효율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와 용역은 화폐단위로 그 가치가 매겨지고 측정된다. 반면 공공정책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사안들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경우가 흔하다. 때로는 객관적인 계량화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래서 부득이 대략적인 추정치(estimate)로 대체하곤 한다.
III. 문화예술, 요지경 세상
합리성/효율성 패러다임의 한계는 특히 문화정책 영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정책목표의 명확한 설정이나 최선의 수단 선택이 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과에 대한 객관적인 판정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문화와 예술의 세계는 불확실성과 불규칙성 그리고 모호성으로 가득한 요지경 세상이기에 교과서적인 합리성/효율성 구현은 백일몽과도 같다.
문화와 예술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부딪혀 호소하는 것이며 감정의 공명이 발생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고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남의 마음도 알기 어렵지만 내 마음 역시 알 수 없는 때가 허다하다. 사람의 마음이 언제 어떤 이유로 감동을 받게 되는지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 바뀌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좋아서 죽을 것 같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시들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무언가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고 예측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논리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불규칙성과 불확실성은 문화예술의 소비(향유)뿐 아니라 생산(창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후의 명작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탄생할 것인지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상효과가 극히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문화에 대한 투자는 지극히 “모험적”인 일이다(김문조, 1998: 28). 무엇을 어떻게 하면 위대한 예술가 혹은 불멸의 명작이 탄생되는지에 대한 기계적인 법칙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 창조의 과정이나 동기에 있어서 어떤 체계적인 인과관계 패턴이나 공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Throsby, 2001: Ch.6). 설령 특정한 명작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되었는지 사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방식 그대로 반복한다고 해서 또 다른 걸작이 나오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문화적 성취 혹은 성과의 수준을 객관적인 수치로 측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과연 문화예술의 세계에 모든 사람이 승복하는 ‘절대 정답’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과연 누가 완벽하고 권위 있는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문화예술은 본질적으로 계량적인 측정이나 비교가 곤란한 주관적 가치의 영역이다. 그래서 타 분야에 비해 문화정책에서는 객관적인 정책평가의 어려움이 훨씬 더 심하다. 왜냐하면 문화예술 영역에서 적용되는 보편적인 기준이나 잣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의 세계에는 과학의 본질 및 방법론에 관하여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일정한 규준이 존재한다. 그래서 동료평가(peer-review)의 권위가 인정된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세계에서는 예술적 성취/성과를 평가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표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Rushton, 2000). 예나 지금이나 어떤 예술인 혹은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은 너무나 흔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에 따라 그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합리성/효율성 신조에서 파생된 성과주의가 공공부문에까지 파상적으로 퍼지면서 “평가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각종 평가들이 횡행하게 되었다(최영조, 2018). 이런 것이 잘 적용되고 나름 긍정적 순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영역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요지경 같은 문화정책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화정책의 평가에 참여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성과에 관한 진정한 정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표가 애매모호하거나 산출가치의 계량적 측정이 어려운 경우에는 소위 ‘성과역설(performance paradox)’ 현상이 발생하기 쉽다(Thiel & Leeuw, 2002: 272-273). 정책의 성과 전모를 그냥은 판단할 수 없기에 그 대신 조작적 정의가 가능한 대리지표(proxy indicator)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Lowe, 2013: 214). 측정과 자료수집이 용이한 성과지표들을 채택하다보면 아무리 꼼꼼하게 측정한다고 해도 실제 성과에 대한 심도 있고 충실한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 즉 성과지표로 측정된 기록과 실제 성과 자체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주어진 지표 틀에 입각해서 아무리 열심히 성과평가에 임한다고 해도 그 점수가 문화적 성취의 실제를 충실히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Hodsoll, 1998).
IV. 벌거벗은 임금님의 아름다운 옷
벌거벗은 임금님이 입은 옷은 아름다운가? 이 질문은 말도 안 되는 난센스다. 옷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벌거벗고도 마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척하거나 혹은 있지도 않은 옷을 가지고 멋지네, 형편없네 왈가왈부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문화정책에서 합리성이나 효율성을 따지려는 시도 역시 어쩌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난센스에 불과한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문화정책에서 이루어졌던 수많은 정책들은 과연 모두가 합리적 결정이었는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하여 지금까지 엄청난 공공 재정이 지출되었는데 이들은 전부 효율적 자원배분이었는가? 아니면 반대로 모두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었는가? 일부는 합리적이고 또 일부는 비효율적이었는가? 어떤 정책이 얼마나 합리적/효율적이었는지 정말 확인할 수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혹은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진짜 실재인 양 대하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 자세가 아닐까?
문화정책의 세계에서 합리성/효율성은 실체를 잡을 수 없는 허상이다. 물론 매우 멋지게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허상(illusion) 혹은 확인 불가능한 신화(myth)에 불과하다. 문화정책에서 합리성/효율성에 집착하는 ‘왕자 패러다임’은 마치 허상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비이성적인 태도이다(김정수, 2002). 인간의 합리성은 제약되어 있고 한계비용은 체증한다. 따라서 결사적으로 좋은 선택을 하려고 결정과정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소요되는 계산비용(calculation cost)은 기하급수적으로 체증한다. 하지만 결정의 질(quality)은 여전히 형편없는 수준에 그친다. 즉, ‘계산의 효율성(computational efficiency)’은 급락하는 것이다(Simon, 1976). 결국 합리성/효율성에 집착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비합리성/비효율성이 더 커지게 된다.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하려다 보면 전혀 의도치 않은 혹은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이 발생하기 쉬운 것이다.
문화정책 현장에서 합리성을 향한 집념은 정책평가 과정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합리적 정책결정으로 목표를 최대한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 자체는 거부하기 어렵다. 이를 위해 정책집행 후 평가 작업이 필요하다는 당위성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문화 영역에서는 정책산출의 가치 혹은 수준을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 반드시 평가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부득이 측정가능한 몇몇 지표들을 (그나마 고작해야 두세 개 정도) 골라서 평가가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관객수, 건축공정률과 같은 계량지표 혹은 만족도 같이 숫자로 환원하는 지표들이 사용되기도 한다(문화체육관광부, 2024). 그리고 이렇게 수행된 평가결과는 문화부 공무원들의 인사고과나 성과급 등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런데 그 수치들이 과연 해당 정책의 성과/산출의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완벽한 정보일까?4)
다른 사례로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사업을 생각해 보자.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여 1973년에 설치된 문예진흥기금은 문화예술의 창작과 보급, 민족전통문화의 보존ㆍ계승 및 발전, 남북ㆍ국제 문화예술 교류 등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2024년 12월 말 기준 총 조성액은 약 5조 5,720억 원, 총 운용액은 약 5조 3,269억 원에 달한다(문화체육관광부, 2025: 83). 그런데 구체적인 기금지원 사업들의 구성은 이런저런 사유들로 인해 거의 매년이다시피 바뀌어왔다. 이는 문예진흥기금의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지출을 위한 최적의 프로그램 구성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렇게 막대한 공금을 투입해서 운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의 수혜자를 선정하기 위한 심의제도에서도 합리성 집착이 드러난다. 심의제도의 핵심은 선택이다. 즉, 수많은 신청자들 중에서 진정한 적격자들을 가려내는 것이다. 심의제도의 구체적인 절차와 규정 역시 수시로 바뀌어 왔다. 그 기본 취지는 분야별 전문가들이 공정하고 투명한 심의절차를 거쳐 최적의 지원대상자들을 선정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50여 년간 이러한 선발결정은 과연 항상 합리적이었는가? 즉 그동안 기금 수혜자들로 인하여 매번 문예진흥기금 사업의 목표가 최대로 달성되었는가? 혹시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신청자가 선정되거나 혹은 반대로 충분한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락한 경우는 없었는가? 있었다면 언제 어떤 사업에서 어떤 신청자들이 이에 해당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전부 “모른다”이다. 각 지원사업의 성과에 대한 정확한 정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매년 사업별로 평가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절차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감사 성격의 검토일 뿐이다. 지금까지 시행되었던 그 수많은 지원사업들 덕분에 산출된 예술 작품ㆍ활동들의 결과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이 얼마나 ‘진흥’되었는가에 대한 평가는 찾아볼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진정한 성과에 대한 평가를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예술적 성취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의 심의제도 하에서 이루어졌던 수혜자 선정이 과연 합리적 선택이었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면서 또 심의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하자고 열심히 애쓰는 셈이다. 사실 공정하고 투명한 심의제도를 갖추면 최적의 선정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적어도 문화예술이라는 요지경 세상에서는, 공허한 환상(fantasy)에 불과하다(김정수, 2024).
V. 율법?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 문화정책에서 합리성/효율성 구현이 불가능하다면 이들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합리성이나 효율성은 결코 유해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며 분명 정책에서 존중되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정책결정과 효율적 자원배분을 위한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완전한 합리성 달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합리성/효율성을 달성하고자 하는 강박관념은 마치 종교적 열심으로 율법을 대하는 신심(信心)에 비유할 수 있다. 극단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율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준수하기 위해 목숨을 걸 정도로 열심을 낸다. 그들에게 율법이란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어기거나 태만히 하면 지옥에 떨어질 형벌에 처해질 것이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율법의 수많은 지침들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죽기살기로 애쓰는 것이다.
2000년 전 예수와 그의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교 율법의 철두철미한 준수에 집착하던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같이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은 더러운 위선자들이라 비난하였다. 물론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은 단호했다. 인간이 율법을 모두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율법준수를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율법주의자들에게 더 분노했던 것은 자신들도 실상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으면서 사람들에게는 율법준수라는 올무를 단단히 씌우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노력하면 무엇이든 다 된다고 믿고 반드시 달성해야만 한다고 집착하는 사람은 절망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으로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다시 도전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또다시 실패하게 되고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한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그리고 열심히 하면 성취할 수 있는 일이기에 또다시 도전한다. 결국 도전 → 실패 → 좌절 → 재도전의 쳇바퀴만 돌게 된다.
이러한 어리석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먼저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이라 인정해야만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민망함을 덜어주는 첫걸음은 그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벌거벗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화정책의 세계에서 합리성/효율성이란, 마치 율법과도 같이, 근원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
율법주의적 인식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관점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문화정책을 구현해야 한다”는 명제는 멋진 구호이긴 하지만 절대적 지상과제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저 느슨하게 수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정책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좋은 말이지만, 완벽하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정책결정과 효율적 자원배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죽기살기식으로 집착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합리성/효율성 실현이라는 불가능한 과업을 억지로 수행하느니 그냥 좀 적당히 사는 게 차라리 더 낫다. 그런다고 망하지 않는다: 사실 망할지 아닐지 알기도 어렵다. 좀 모자라고 좀 부족해 보여도 괜찮다. 정책 결정이든, 집행이든, 평가든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그냥 멈춰도 된다. 마치 만족모형(satisficing model)처럼, 그 정도면 괜찮은(good enough) 수준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합리성/효율성은 철저히 지키면 천당 가고 어기면 지옥 가는 식의 율법이 아니다. 멋진 격언(proverb)이긴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VI. 낭비(浪費)? 아니, 낭비(朗費)!
통상적으로 ‘낭비’라는 단어는 바람직하지 않은 부정적 이미지로 통용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용처에 꼭 필요하지 않은 돈과 시간을 쓴다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허비하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효율성 원칙을 초월한 낭비가 적지 않다. 낭비에 대한 율법적 인식에서 자유로워지는 상황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효율적인 자원배분임에도 불구하고 낭비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례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상금, 스페어타이어, 재난대비훈련 등은 우리 일상생활 속의 낭비이다. 비상금은 꼭 필요한 금액 이상의 돈을 여분으로 준비해둔다는 점에서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아니다. 스페어타이어를 추가로 구입해서 차에 싣고 다니는 것은 무게를 더 나가게 함으로써 기름을 더 많이 소모하게 한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인 낭비다. 재난대비훈련은 발생하지도 않은 재난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아까운 시간과 인력을 허비하는 셈이다. 또한 삼권분립체제나 3심재판제 같이 공공제도 속에도 낭비 요소가 존재한다. 하나의 유능하고 청렴한 권력자 혹은 통치기관만 설치하면 효율적인데 굳이 세 개의 권력기관을 운용한다. 한 번의 재판으로 시시비비를 확정짓는 게 효율적인데 굳이 세 번씩이나 재판을 반복한다. 이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중복/중첩은 효율성 원칙에 어긋난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를 어리석은 낭비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지금 당장 꼭 필요한 정도 이상의 추가적인 자원이 소요된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효율적 자원배분이다. 그러나 낭비라고 욕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려 깊은 대비 체계라고 장려된다. 지금 상황에 꼭 맞게 예산을 준비해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돈 쓸 일이 갑자기 생길 수 있기에 비상금을 챙겨둔다. 지금은 멀쩡한 자동차 타이어가 언제 어디서 펑크 날지 모르기에 스페어타이어를 항상 싣고 다닌다. 위급한 재난이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알 수 없기에 평상시에 미리 대응훈련을 한다. 제아무리 유능하고 도덕적인 왕이라도 언제 어떻게 타락할지 모르기에 항시 상호견제가 가능한 삼권분립 체제로 운영한다. 아무리 현명한 판사라 해도 때로는 판결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판사들의 추가적인 심리를 제도화한 것이다.
Landau(1969)는 이러한 현상을 가외성(redundanc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가외성이란 꼭 필요한 이상으로 중첩/중복된 여분을 뜻한다. 미래가 확실하고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면 효율성은 정책에서 마땅히 바람직한 가치로 지향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도의 불확실성 하에서라면 효율성 집착은 오히려 시스템 전체의 신뢰성과 안정성을 해하기 쉽다. 반면 일견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가외성이 문제해결에 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김창수, 2013: 247). 가외성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의 오류(decision error)에 유연하게 잘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김영평, 1991). 또한 국지적ㆍ부분적 오류가 발생한다고 해도 전체가 고장 나지는 않도록 함으로써 시스템의 안정적인 작동을 가능하게 해준다. 따라서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가득한 문화정책의 세계에서는 때로는 비효율적인 낭비(처럼 보이는 가외성)도 존중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눈에 안 보이고 귀에 안 들리고 손에 안 잡혀도 분명히 실재(實在), 실존(實存)하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는 ‘감동’이나 ‘사랑’과 같이 단순히 존재한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보배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무형의 가치(intangible value)의 크기나 무게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으로 그 가치를 환산하는 것도, 억지로 추정해 볼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서 실없는 농담이나 지껄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가정해 보자. ‘시간은 곧 돈’이라는 신조로 무장한 효율성 지상주의자라면 이 사람은 자신의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어리석은 자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행태경제학의 거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Kahneman에게 이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한 사람이다. 그는 행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답하였다.5) 일을 하고, 연구를 하고, 회의를 하고, 장사를 하는 시간만이 뭔가 의미 있는 성취를 가능하게 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그저 잡담이나 나누는 시간이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효율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모든 낭비가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거룩한 낭비’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6)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의 시간을 내어주고 비싼 선물을 사 주는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끔찍한 재난의 피해자들을 위해 구호금을 기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행동이 어리석은 시간 낭비, 돈 낭비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효율적 자원배분인지 아니면 낭비인지 계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사랑은 낭비를 낳는다. 사랑하면 쓸데없이 마음을 쓰게 된다. 그래서 시간을 쓰게 되고, 재물을 쓰게 되고, 생명을 던지게 된다. …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투자 또는 소비를 넘어서 낭비를 하며 산다. 자신은 낭비가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낭비한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7)
문화예술을 위해 시간이나 돈을 쓰는 것은 ‘기쁨의 낭비(朗費)’, ‘즐거운 낭비’ 혹은 ‘아름다운 낭비’가 될 수 있다. 문화는 여러 가지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의 본원적 가치는 인간의 생래적 욕구인 정신적 즐거움, 희열, 풍요로움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김정수, 2017: 43). 문화에 대한 돈이나 시간 투자의 효율성을 따지려면 이러한 무형의 가치를 금전적으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본전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만족스러운 지출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비효율적인 낭비로 비칠 수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의 효율성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일견 낭비처럼 보이는 지출도 용인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정책에서 낭비같이 보이는 사업을 죄다 축소ㆍ폐지한다면 문화예술이 주는 엄청난 즐거움과 기쁨을 날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VII. 즐거운 낭비를 실험할 방안
합리성/효율성을 율법이 아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로 이해한다면 때로는 낭비(처럼 보이는 지출)도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정책에서 즐겁고 아름다운 낭비가 용인될 수 있는 시범적인 방안으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정책실험에서 중요한 것은 소위 ‘정답’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즉, 합리적 결정과 효율적 지출을 위해 노력하다가 설령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해도 괜찮다고 용인하자는 것이다.
첫 번째 방안은 모든 공식적인 규정에서 자유로운 예산을 일정 금액(예컨대 전체 예산의 10%) 한도 내에서 허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실무 담당자가 간섭 없이 자유롭게 예산을 쓸 수 있도록 완전한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책입안 단계부터 시작해서 사후평가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제도적 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소위 ‘묻지마’ 예산은 문화예술 관련 공공기관의 각 부서 혹은 개인 단위로 책정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소신껏 사업을 구상하고 시행할 수 있도록 모든 족쇄를 풀어주자는 것이다.8)
이러한 주장은 공금 사용과 관련된 행정의 통상적인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이단사설처럼 들릴 수 있다. ‘묻지마’ 예산이 문화정책의 취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용처로 사용되거나 때로는 몇몇 개인들의 호주머니만 불리게 될 가능성도 물론 있다. 하지만 공적 지원의 불공정성 혹은 사적 전용 같은 문제는 현재와 같은 문화행정 시스템에서도 종종 불거지는 의혹들이기도 하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근다면 맛있는 된장찌개는 먹을 수 없다. 다소간의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담한 실험은 충분히 시행해 볼만하다. 어차피 기존의 효율성 집착 문화정책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적인 관료 시스템에서는 개개인의 정책 창의성이 발현될 여지가 극히 제한적이다. 기존의 딱딱한 규정들이 벗겨진다면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새롭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시도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정책과 프로그램들이 모두 기존의 것들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물론 더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에 없던, 꽤 쓸만한 정책들이 새로이 발굴될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다는 점에서 그 효용이 충분히 인정될 것이다. ‘묻지마’ 예산처럼 자율성이 보장된 정책환경은 담당자들의 공적 마인드를 촉진하고 역량 발휘를 극대화할 수 있다.
예술지원 프로그램에서 대상자를 선정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분야별 전문가들로 패널을 구성해서 심의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심의제도는 ‘전문가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공정하게 숙고하면 훌륭한 적격자들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공정하고 전문적인 심의 체계를 구성한다고 해도 잘못된 선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존한다. 즉 진정한 적격자가 탈락되거나 반대로 충분한 자격이 없는 신청자가 선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오류(judgment error)를 방지하기 위해 심의절차를 보다 공정하고 엄정하게 설계ㆍ운용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심의과정에서 아무리 열심히 애를 쓴다고 해도 판단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문화예술이라는 요지경 세상의 불확실성과 모호성을 감안하면 지원 대상자 선정에서의 판단오류는 불가피하다. 아니 사실은 판단오류인지 아닌지 자체를 판가름하는 것도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굳이 선택의 합리성을 높이려 많은 공을 들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무작위 추첨으로 지원 대상자를 뽑는 편이 더 현명할 수 있다(김정수, 2007).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이라면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하다. 그러나 결정비용을 더 많이 들인다고 해서 결정의 질이 그에 상응하게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렇지 않다. 열심히 공부하건 아니면 마냥 놀기만 하건 성적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시험이라면 굳이 힘들게 애쓰지 않는 것이 현명한 (도덕적이진 않더라도) 학생이다. 문화예술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진정한 정답인지 객관적으로 확인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그렇다면 굳이 정답을 찾으려 목숨 걸 필요는 없다. 지원 대상자는 그냥 간단하게 추첨으로 선발하고, 그동안 심의제도 운영에 들어가던 비용은 사업비 예산으로 돌려서 증액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VIII. 맺는 말: “내 사전에 불가능은 있다”
대부분의 행정학개론 교과서들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공공행정이 추구해야 할 기본 가치로 제시하고 있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던 돌 판에 새겨진 10계명처럼 단순명료해 보인다. 교수들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친다. 국민의 공복인 정부는 공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정책을 만들어야 하며 효율적으로 공금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명한 명제로 들린다. 그런데 문화정책에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하다. 또한 현실이 그러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버려야 할 나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국회의원들이 “존경하는 OOO 의원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 서로를 존경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굳이 거짓말한다고 비난하거나 혹은 진심으로 존경해야만 한다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아예 존경하지 말라거나 존경이란 단어도 쓰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다. 사실 그렇게 다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다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서로 존경한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다만 그렇다고 목숨 걸고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실현불가능한 목표라고 해서 반드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지향할 필요 없다거나 혹은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완전한 사랑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 폄훼할 수는 없다. 완전한 합리성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행정시스템의 합리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을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문화정책의 성과를 미시적ㆍ단기적으로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거시적ㆍ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판독 가능한 윤곽이 파악될 수도 있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려는 노력이 완전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관건은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이라 알고 인정하는 것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자신감 넘치는 사자후는 무리를 지휘하기 위한 나름 효과적인 리더십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문자 그대로 진짜 그렇게 믿고 무모한 작전들만 감행하다가는 참혹한 희생과 참패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문화정책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합리성/효율성이란 꽤 괜찮은 격언 혹은 구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성시해야 할 금과옥조는 아니다. 그럴듯한 신화일 수는 있어도 절대적인 신앙일 수는 없다. 문화예술의 세계는 합리주의 신봉자들이 꿈꾸는 그런 단순명쾌한 세상이 아니다. 합리적 정책결정과 효율적 자원배분을 향한 집념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엉터리인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도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않는 ‘침묵의 나선(the spiral of silence)’이 고착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Noelle-Neumann, 1993). 율법주의 시각에서 보면 합리성/효율성을 그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정도로 이해하자는 주장은 어쩌면 정통교리를 파괴하는 이단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평범한 상식인 지동설(地動說)도 중세시대에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위험한 이단사설 아니었던가? 이제 합리주의의 색안경을 벗어두고 일견 위험한 낭비처럼 보이는 정책이나 사업들도 좀 과감하게 시도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