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정상의 비주류, 공옥진
공옥진은 한국에서 20세기 후반 이래 누구보다도 널리 알려진 전통예인 중 한 사람이다.1) 제도적 차원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비주류에 속했으나, 동시대에 활동한 전통예인 가운데 대중성에 관한 한 비교 대상이 없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공옥진 이래 다른 그 누구도 공옥진 만큼의 대중적 환호에 도달한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내 공연, 해외 공연 따질 것 없이 그는 늘 최고의 무대에 서 있었다. 인생 말년에 이르러서는 ‘심청가’ 종목의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이는 문화재 보호제도의 법리나 원칙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만들어낸 무형유산 분야에서의 가장 돌출적 사건이기도 했다.
1인 창무극 <심청가>, <수궁가> 등을 통해 공옥진이 성취한 대단한 성공과 활약에 대해서는 개인의 역량과 수요층의 성장 그리고 제도적 영향 등 여러 가지 배경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민중적 민족주의가 수요의 저변이었다면 굴곡진 생애와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에서 비롯된 근성 넘치는 무대 운용 역량은 공급 부문의 핵심 자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잘 포착되지는 않겠지만 정부 정책으로 추진되어 온 공적 문화예술 지원사업 역시 성공의 한 배경으로서 간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생을 비주류로 살아왔으며, 그 명성에 비해 ‘인간문화재’ 급의 명예를 제도적으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옥진 역시 전통연희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원정책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연희 활동을 전개해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전통연희에 대한 공적 지원은 문화재보호법과 문화예술진흥법이라는 양대 법안으로 대표되어 왔다. 이들이 각기 독자적인 법률로 제정되어 현재까지도 별도로 존속해 왔다는 것은 양대 법안의 정책적 목표와 추진 방안에 나름의 차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 수혜 대상 차원에서 보자면 문화재보호법의 경우, 변수랄 게 따로 없을 만큼 수혜자가 이미 특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데 반해, 문화예술진흥법의 경우는 사업에 따라 수혜 대상이 사전에 특정되지 않고 일정한 정책 결정 과정을 거쳐 매 시기 갱신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전통연희 생태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협력자들의 정책 과정 참여 여부에 영향을 끼쳐 왔다.
본 연구는 문화재보호 정책과는 별도의 영역에서 주로 전개된 공옥진의 연희 활동이 문화예술진흥정책과 상대적으로 강한 친연성을 가질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수행되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공옥진의 연희 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문화재보호법과 문화예술진흥법으로 대표되는 전통연희 지원정책의 상대적 특징과 의의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전통연희 지원정책으로서 양대 법안의 특징과 역사적 경과를 간단하게 살피고, 신문 지상에 등장한 공옥진의 인물, 장소, 기관 관계 연관어 비교분석을 통해 전통예인과 특정 제도와의 관계성을 양적 차원, 가시적 차원에서 도출해 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통연희 지원정책에서 매개 활동의 의의를 환기해 보고자 하였다.
Ⅱ. 매개 활동과 전통 연희 정책
매개자 혹은 매개의 개념은 문화예술 영역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강조되어 왔다. 생태계가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매개 활동 혹은 매개자들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민지은·지영호(2016)는 문화 매개의 관점에서 문화예술의 가치를 논하게 되면 ‘미학적 가치에 의한 평가가 아닌 이를 향유하는 관객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문화예술은 향유자의 만족감을 높이는 문화 매개 활동을 통해 그 가치가 더욱 높이 발현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문화 매개’의 개념은 프랑스의 용례를 가져온 것인데, 프랑스 정부가 문화 민주화 실현을 목적으로 매개자 개념을 정책에 도입한 것이다.2)
2016년에 채택된 ‘무형유산에 관한 유네스코 협약 이행지침’3)도 매개 활동의 개념을 중용하였다. 전통연희를 포괄하는 무형유산의 보호와 지속가능한 개발 지침을 담은 제4장 ‘개별국가 차원에서의 무형문화유산 보호와 지속가능한 개발’ 항목에 매개 활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록해 두었다. 무형문화유산이 당사국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일익을 담당하려면 매개자들을 통해 적극적인 소통과 협력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사국은 관련 전문가들, 문화 중개인들(brokers) 및 매개자들(mediators)을 참여시키는 협력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당사국은 기획, 정책 및 프로그램 안팎으로 무형문화유산 보호 활동을 적절하게 통합시키기 위해 지속 가능한 개발 전문가 및 문화 중개인과의 협력사업을 강화해야 한다.4)
앞 단락을 통해 매개 개념의 일반적 의의에 대해 요약했다면 이번에는 전통 연희 관련 제도의 변화와 매개 활동과의 상관성 혹은 상호작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연희 활동과 관계가 깊은 문화재보호법과 문화예술진흥법의 법령 개정 이력 및 관련 사업의 생성 추이를 요약하여 매개 활동과 관계된 정책의 변화양상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전통연희를 지원하는 우리나라의 공적 제도로는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먼저 꼽을 수 있다. 1962년 제정 이후 1999년까지 모두 18차례에 걸쳐 법안의 개정이 단행되었고, 이 중 전통연희 분야의 개정은 단 3차례에 불과했는데, 횟수 자체도 몇 차례 되지 않았지만 법 개정의 목표와 결과도 그에 못지않게 단순했다. 문화재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보유자 및 보유단체 지정, 그것의 명맥과 전승을 대외적으로 입증하는데 필요한 전승 교육 지원 등으로 개정 법안의 효력 범위가 국한되었다. 그나마도 ‘인정제도’, ‘의무화제도’ 등 관행적으로 집행되어오던 지원사업을 사후에 법안으로 명문화하는 작업에 가깝기도 했다. 1980년대 이래 전통연희에 대한 박제화 비판이 예술계 안팎에서 거세게 이루어졌으나, 법제적 대응의 내용은 <표 1>5)에서 확인되다시피 매우 소극적이었다.
개정 시기 | 개정 내용 |
---|---|
1970.08 | (신설) 기예능 보유자 인정제도 시행 / 지방문화재 지정 |
1982.12 | (신설·추가) 기·예능 전수교육 의무화제도 도입 /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의 인정과 그 해제 (삭제) 중요무형문화재 녹음 및 악보제작 등 승인 폐지 |
1999.01 | (삭제)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공개 의무조항 폐지 |
문화재보호법을 근거로 시행된 구체적인 개별 사업을 살펴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표 2>6)에서 보듯 예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현금성 지원을 하는 사업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제도 도입 이래 초기 10년간 펼쳐진 정책 사업은 무형문화재 원형의 보존을 위하여 보유자의 형상 보존, 즉 생활과 건강에 투자하는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무형유산의 사회적 저변이 빠르게 몰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최소한의 정책이기도 했지만, 무너진 생태계를 복구하고, 향유 저변을 복원하는 근본적인 해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문화재보호법의 등장을 통해 비로소 정규화된 전통연희 정책이 예인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했지만, 유형문화재가 개념적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무형유산 분야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포괄하는 데에 줄곧 한계를 드러내 왔다.7) 게다가 이 법은 수혜 대상의 범위가 매우 좁게 설정되어 있었다. 실무적인 제도 운용 과정에서 이런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상·예술상 가치가 크고 향토색이 현저한 것’8)으로 대상을 제한한 해당 법제의 문화재 지정기준 자체가 문제 발생의 근본 원인이었다. 제도의 실행은 반드시 삼각형 구조의 꼭대기를 점유한 보유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는데, 이수자, 전수자 등 보유자 휘하 수직적 계보 내의 소수 정예 인력으로 수혜 대상이 특정되었고, 외부의 다양한 협력자 혹은 매개자들의 참여는 제한되었다. 원형의 보존과 유지라는 전제하에서만 수혜 대상의 충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폐쇄적 구조를 통해 전승되는 전통연희는 사실상 텍스트의 단순 복제를 추구하였기에 개성이나 다양성 개념이 등장할 여지가 없었고 박제화 경향은 가속되었다.
이상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박제화 비판이 장기 누적되는 과정에서 매개 활동을 자극하고 포용할 수 있는 법령 개정 등의 정책적 대응은 문화재보호법 영역에서는 사실상 등장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을 하위범주로 포괄하는 총체적 문화예술 진흥 제도로서 문화예술진흥법은 문화재보호법보다 10년 늦은 1972년 8월에 등장하였는데, 정책대상의 포괄 방법에서 기존의 문화재보호법과 차이가 있었다. 보호법의 정책대상이 사업 기획 단계에서부터 특정되는 방식이었다면 진흥법의 경우는 작품이나 실연, 공간 등의 매개물을 통해 사후적으로 포괄되는 형식이었다. 이른바 ‘인간문화재’들이 제도에 의해 사전에 이름이 특정되어 정책대상으로 고정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문화예술진흥법의 여러 사업은 지원 방식에서도 문화재보호법과 일정한 차이를 드러냈다. 기본적으로 후자가 예인들에 대한 직접지원, 현금지원 중심의 제도였다면 전자는 매개자 혹은 매개활동에 대한 지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다. 전통연희에 대한 차별화된 지원 방식은 다양한 성격의 생태계 구성원들을 정책과정에 참여토록 하였다. 생태계 내부에서 청중의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민간에서 극장운영, 공연기획 등을 담당해온 인물들과 전통연희의 자원을 발굴하고 잠재적 가치를 길어올리던 연구자 공동체가 수혜 당사자로 선정되어 정책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수월성 향상과 함께 공동체 중심의 지속가능한 전통연희가 재발견되고 새로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해 왔는데, 새롭게 등장한 진흥제도는 이들을 정책대상으로 포괄하였다.
특정인 직접 지원이 아닌 매개 활동을 자극하는 유형의 문예진흥원 사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 나갔다. <표 3>9)은 문예진흥원이 정리한 1980년대 이래 문예진흥기금의 중점방향, 추진과제, 실행전략 내용을 본고의 흐름에 맞게 임의로 축약, 재편집한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이 예술인 직접지원으로부터 매개자, 수요자 등 생태계의 다양한 주체들에 대한 지원을 향해 변화하는 흐름이 보인다. 문화재보호법과 달리 매개 활동의 흐름을 인식하고, 그것의 가치를 고양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성장시켜온 것이다.
개별 사업으로는 공옥진을 비롯 전통예인들 상당수를 발굴해낸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연구 지원사업’이 초기부터 시행되었다. 1985년에는 창작은행제도를 도입해서 작가와 공연단체를 적극적으로 연계하고, 우수한 작품을 발굴하는 성격의 ‘작품개발 및 단체육성 지원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는 문예진흥원이 적극적인 매개자의 역할을 자임한 독특한 사업이기도 했다. 1986년부터 시작된 문화촉매사업도 예술단체들의 자체 매개역량 강화를 촉진한 사업으로 볼 수 있으며, 1989년부터는 ‘소극장 우수기획 프로그램 지원사업’도 시행되었다. 이때 결정된 지원대상 목록에는 공옥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소극장 공간사랑과 극장 관계자들의 이름도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0)
Ⅲ. 전통연희 생태계 범주 도출
공연예술 전반에 대한 생태계 구성요소 정의는 장르에 따라 혹은 연구자의 관심사에 따라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이다. 2017년에 음악산업 보고서를 발간한 미국 뉴욕(New York)시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국(The Mayor’s Office of Media and Entertainment)은 현대 뉴욕의 음악 생태계를 4개 주요 주체, 즉 ‘지역 예술공동체’, ‘소비 대중’, ‘글로벌 영업 부문’, ‘인프라 및 에이전시’가 상호 협력하는 생태 환경으로 요약하였다.11) 이들을 인격체로 변환한다면 예술인, 소비자 및 후원자, 흥행기획자, 서비스업자 및 스탭 등이 차례대로 그와 대응될 수 있을 것이다. 권혁인 외(2015)는 뮤지컬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예술 산업 생태계의 발전 방안을 연구하면서 상대적으로 확장된 생태계 모델을 제시하였다. 산업 내부의 주체로는 창작자 및 저작권자, 제작자, 인프라 및 에이전시, 구매자 및 관람객 등이 도출되었고, 보조 지원 주체를 추가로 제시하면서 교육기관과 정부기관 등을 배치했다. 교육기관과 정부기관이 포함된 것은 뉴욕시의 사례와 차별성을 가지나, 산업 내부 생태계 요소로 거명된 주체들로 한정할 경우는 뉴욕시 사례와 유사한 생태계 구조가 도출되어 있다. UNESCO에서는 <2009년판 문화 통계를 위한 유네스코 프레임워크<를 발행하면서 문화의 일반적인 순환 과정을 [그림 1]12)과 같이 요약해 두었다. 이는 특정한 문화활동 부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와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전체적인 순환 과정은 창작(creation), 제작(production), 배급(dissemination), 연행(exhibition-reception - transmission), 소비(consumption - participation) 등의 연쇄로 표현되었는데, 장르 혹은 영역의 차이에 따라 순환의 성격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언급해 두었다.
이상의 예시들을 참고한다면 공연예술 생태계를 구성하는 주요 주체로서 ‘예술인’, ‘매개자’, ‘인프라’, ‘소비자’ 등의 범주를 도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매개자 범주는 경계가 상대적으로 유동적이어서 외려 복수의 생태계 주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
공옥진의 활동 관계성 분석을 위해서는 예인들에 대한 다양한 협력자들 외에 인프라로서의 시설을 매개자 범주로 간주하는 것도 유용한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알렉산더(Victoria D. Alexander; 1959- )는 예술계의 네트워크 구조를 ‘창작자, 매개자, 소비자’ 구성으로 간단하게 요약한 바 있는데,13) 바로 앞에서 요약적으로 정리한 본고의 포괄적 범주 구성은 그의 주장과도 잘 호응한다. 한편, 이상에서 정리된 범주들을 다시 우리나라 전통연희 생태계의 속성으로 치환한다면 예술인은 ‘전통예인’이 되고, 매개자는 1차적으로 ‘공연 기획자’, ‘비평가’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밖에 ‘업계 동료들’과 인프라로서의 ‘공연 장소’ 등도 매개자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관객’과 ‘사적 후원자’, ‘정부 당국’ 등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도출된 전통연희 생태계 범주들은 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예인들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확인하는 기준 속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예인들의 생애과정 및 전통연희 정책의 실행 과정을 살펴보는 데에 유용한 범주일 뿐만 아니라, 예인들의 활동 관계에 대한 데이터 분석 시에도 관찰과 분석의 기준점으로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다.
Ⅳ. 공옥진 활동 관계 비교 분석
특정 전통 예인의 활동 관계를 양적 데이터로 치환한다면 협력 관계의 인물이나 주요한 활동 무대 등에 대한 양적 차원의 가시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1990년대 이래 신문기사에 나타난 공옥진의 활동에 대해 양적 데이터 분석을 수행하여 그의 활동의 특성을 객관적 지표로 환원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은 개별 예인 활동의 분석 외에 복수 예인 간의 특성 차이를 가시화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공옥진의 데이터와 함께 20세기 후반 한국 판소리계의 대표 여류명창이었던 성우향과 성창순의 데이터를 비교분석대상으로 설정하고 살펴보려 한다.14) 이 두 사람은 공옥진과 생몰연대가 유사하면서도 동시대 보호제도 하의 대표적 예인으로 활동하였기에 제도적 차원에서 공옥진과 뚜렷이 결을 달리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이들 데이터의 비교분석을 통해 전통연희 양대 정책의 특성과 효과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15)
전통예인들의 생애는 역사적 기록물이나 공적 기록을 통해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2000년대 접어들어 구술채록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공적 기록 부재의 반증이기도 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타 부문에 비해 공적 기록이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궤적이 공연, 전시 등의 이벤트를 통해 주기적으로 신문 지상에 등장해 왔다는 점이다. 덕분에 예인들의 생애 기록은 대중매체를 통해 상당량의 데이터가 누적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신문 지상에 나타난 공옥진의 활동 관계 데이터 수집 및 분석을 통해 공옥진과 비교 대상 예인들이 형성해 온 네트워크 양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인물, 장소, 기관 영역에서의 연관어 추출 및 분석을 통해 그들의 활동 관계 및 차별성을 양적으로 가시화하고자 한다.
연관어 분석에 활용할 수 있는 신문 매체 데이터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신문 아카이브 ‘빅카인즈’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빅카인즈에는 고신문과 현대 신문의 역대 기사들이 아카이빙되어 있는데, 고신문의 경우는 PDF 형식으로 데이터를 구축, 제공하고 있고, 현대 신문은 1990년대 이후의 기사를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16) 텍스트 파일 형식으로 데이터를 구축, 제공하고 있다. PDF 형식으로 제공되는 고신문 데이터는 현행 시스템 환경에서 텍스트 인식이 어려워 텍스트 파일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연관어 분석의 시대적 범위는 일부의 데이터를 제외하고 1990년 이후로 제약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는 보호제도 하의 주류 예인들이 한 차례의 생애 순환을 마무리하며 안착하는 단계이므로 그들의 제도적 존재 양상을 요약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충분한 유용성이 있다.17)
예인의 성격을 입체적 관계 속에서 확인하고자 전통연희 생태계의 특정 요소들을 기초로 입력값을 설정하였다. 빈도 비교에 의한 유사성 검토를 통해 예인들의 관계 특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첫째로는, 인물 간 관계를 살펴보았다. 두 번째로는, 공간적 매개체로서 장소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는 예인들의 입지에 따라 공연 장소의 유형이 차별화 되는지 여부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는, 예인들과 기관과의 관계를 지원 제도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살펴보았다.
인물 데이터는 검색된 기사의 자연어처리를 통해 추출된 ‘인물’ 항목으로 진행하였다. 빅카인즈 데이터에는 ‘키워드’ 항목과 ‘특성 추출’ 항목에도 인물 정보가 있다. 인물 항목과 나머지 항목의 인물은 유기적인 단어 정제 과정을 통해 나누어 도출된 것이 아니라, 추출 기사를 대상으로 인물 정보 정제를 별도로 하고, 다른 맥락에서 키워드 추출을 별도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항목을 합산하는 것은 중복의 문제가 있어 적절치 않다. 양적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분석 조건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물 항목에 추출된 용어만을 사용하였다.18)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이 가시화되었다([그림 2])(<표 4>).
구분 | 공옥진19) | 성창순 | 성우향 | |||
---|---|---|---|---|---|---|
순위 | 인물 | 빈도 | 인물 | 빈도 | 인물 | 빈도 |
1 | 심우성 | 9 | 안숙선 | 16 | 조상현 | 13 |
2 | 임방울 | 7 | 박동진 | 15 | 안숙선 | 12 |
3 | 김수근 | 6 | 조상현 | 15 | 정광수 | 12 |
4 | 김연수 | 5 | 김소희 | 13 | 김소희 | 10 |
5 | 김명곤 | 4 | 황병기 | 10 | 박봉술 | 9 |
6 | 정병호 | 3 | 이성림 | 9 | 정권진 | 8 |
7 | 김운태 | 3 | 오정숙 | 8 | 정응민 | 8 |
8 | 박동진 | 3 | 은희진 | 7 | 성창순 | 7 |
9 | 김대환 | 3 | 정권진 | 7 | 강도근 | 7 |
10 | 왕대순 | 3 | 김연수 | 7 | 김청만 | 7 |
데이터 수량 | 기사 162건, 1,147자, 295단어 | 기사 154건, 3,661자, 922단어 | 기사 92건, 1,718자, 437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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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이전의 경우, 데이터 절대 수량이 다소 적음에도 불구하고 양대 유형의 예인들은 특정한 경향성을 보여주었다. 공옥진의 경우, 민속학자 심우성이 가장 많은 신문 지면에서 공옥진과 동시에 등장했다. 또한 김수근, 정병호 등 전통예인 아닌 이들이 주요 인물관계로 등장하였다. 소고의 명인으로 알려진 김운태 역시 당시에는 서울의 두레극장 대표로 공옥진과 연계되었다. 공옥진과 연계된 인물들 상위 10명 가운데 예인의 발굴과 공연 기획으로 특화된 매개자로서의 인물이 4명이나 등장하였다. 이들 중 김운태를 제외한 3명은 모두 공간사랑에서 공옥진과의 인연을 만들었다. 정통 판소리 계열의 예인들로는 임방울, 김연수, 박동진 등이 등장하였는데 이 중 임방울과 김연수는 1980년대 이후에는 이미 고인이었다. 실질적 동료 예인으로는 박동진 정도가 유일하게 남는다. 김명곤은 예인과 기획자를 오가는 인물이었으므로 그 성격의 특정을 보류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밖에 프리재즈로 유명한 타악 주자 김대환과 중국의 마임배우 왕더순이 추출되었다. 전자는 공간사랑이라는 공간을 공유한 특성으로, 후자는 1996년에 충남 공주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 1인극제 무대를 통해 관계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데이터는 2000년대 이전 인물 관계 속의 공옥진이 주로 매개자로서의 민간기획자들과 협력하여 활동을 펼쳐나갔음을 보여준다.
성창순과 성우향은 주류예인의 전형으로 살아왔으므로 두 사람의 인물 관계는 성격이 대동소이하다. 안숙선, 조상현, 김소희, 정권진 네 명의 예인을 공유하고 있다. 이 중 김소희와 정권진은 이들의 스승격이고, 조상현은 두 사람과 동등한 세대의 인물이며, 안숙선은 제자 단계의 인물이다.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예외 없이 전통음악의 연희자들로 채워져 있으며, 공옥진과 달리 활동 기획자 성격의 매개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성우향의 경우는 상위 10명의 인물 전원이 판소리 사제(師弟) 및 동료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판소리 분야의 이른바 ‘인간문화재’들이다. 소이(小異)한 부분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공옥진과 비교를 하자면 두 예인은 동일 지대의 인물이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드러낸다.
성창순이 공옥진과 김연수, 박동진 두 명의 인물을 공유하는 것과 달리, 성우향은 공옥진과 상위 10걸에서 한 명의 인물도 공유하지 않는다. 성우향과 공옥진은 1990년대 내내 전통예술의 중추적인 존재로 살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예인으로서의 공통 인물 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성창순은 바디와 바디로 이어지는 예인의 관계 외에도 가야금 연주자이자 국악계의 중요 인물이었던 황병기 그리고 국악협회장과 한국예총 회장을 지냈던 민속악계의 유력자 이성림 등과 관계가 나타난다. 이에 비해 성우향은 그러한 관계가 전혀 없다. 아마도 공연을 많이 하지 않아서인 듯한데, 한편으로는 공연 무대보다도 제자 교육에 몰두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성창순이 10년 먼저 보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제도의 중심축을 차지하는 전수 교육 영역에서 성우향은 성창순을 압도해 왔다([그림 3])(<표 5>).
구분 | 공옥진 | 성창순 | 성우향 | |||
---|---|---|---|---|---|---|
순위 | 인물 | 빈도 | 인물 | 빈도 | 인물 | 빈도 |
1 | 김수근 | 50 | 정응민 | 62 | 안숙선 | 94 |
2 | 공대일 | 39 | 안숙선 | 56 | 조상현 | 68 |
3 | 김덕수 | 33 | 조상현 | 50 | 성창순 | 63 |
4 | 박동국 | 32 | 박유전 | 47 | 정응민 | 51 |
5 | 공민지 | 29 | 송순섭 | 44 | 박유전 | 50 |
6 | 유인촌 | 27 | 성우향 | 39 | 송순섭 | 49 |
7 | 이매방 | 27 | 신영희 | 37 | 박송희 | 45 |
8 | 박동진 | 23 | 박송희 | 32 | 정광수 | 41 |
9 | 강준혁 | 22 | 김연수 | 26 | 강도근 | 38 |
10 | 김숙자 | 17 | 강도근 | 22 | 김소희 | 37 |
데이터 수량 | 기사 583건, 9,568자, 2,367단어 | 기사 448건, 10,789자, 2,761단어 | 기사 531건, 11,901자, 2,979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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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는 데이터 수량이 늘어남에 따라 결과값이 한결 안정적이다. 그런데 예인들의 유형별 인물 관계의 차별성은 2000년대 이전의 경향이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모습이다. 전 시대와 조건상 차이가 있다면 3인의 예인들이 신체 조건상 활동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20) 성창순과 성우향은 제자들이 성장하여 무대에 오르면서 그들의 이름이 기사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옥진은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근황을 중심으로 기사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기사화되는 것은 당대의 활동 양상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호출되는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이들의 인물관계는 예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완결되고 정의되는가를 보여주는 일이 되었다.
김수근, 김덕수와 함께 공옥진은 70년대 말 이래 비주류 전통예인들의 요람이었던 공간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세간의 시선들이 모여 김수근이 공옥진과 가장 많은 지면을 공유한 인물로 나타나게 되었다. 김수근 외에도 공간사랑을 공유했던 이들이 상위 10명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였다. 사물놀이의 김덕수와 승무(僧舞)의 이매방, 도살풀이의 김숙자 등 무대에 올랐던 이들과 공간사랑을 이끌었던 문화기획자 강준혁이 그들이다. 공옥진과의 관계에 나타난 인물 가운데 가장 낯선 이는 4위에 등장한 박동국일 것이다. 박동국은 민간의 한국 전통연희 공연 기획자다. 1990년 국립국악원에서 ‘한국의 명인명무전’을 올린 이래 2020년 현재까지 해당 공연을 103회에 걸쳐 지속해 왔다. 민간 영역의 전형적인 매개자로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공연의 공동주최 형식으로 예인들에 대한 정부 후원을 대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해당 공연은 근 30년간 3,000여 명의 예인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기업체 후원을 거의 받은 바 없다고 했는데, 달리 말하자면 정부 및 지자체의 전통예술 진흥 정책에 의해 민관이 결합된 생태계가 그의 거처이며 공옥진과의 관계도 거기서 발생한 것이다.21) 그리고 인물 관계망에 전 문화부장관 유인촌22)이 등장하는 것은 공옥진의 생애가 보호제도와 맺어 온 관계가 표출되는 상징적 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창순과 성우향은 2000년 이전 시기의 데이터보다도 이후 시기의 데이터에서 유사성이 더욱 크게 나타난다. 두 사람이 상위 10명을 기준으로 공유하는 예인들은 8명이나 된다. 약간 다른 부분이라면 성창순의 경우는 신영희와 김연수가 상위 목록에 나타났고, 성우향은 정광수와 김소희가 그러했다. 성우향의 인물 관계 목록이 전원 보유자들로 나타난 것은 아까와도 마찬가지인데, 이번에는 성창순도 그와 같았다. 1990년대의 목록에서는 황병기, 이성림, 은희진 등의 인물이 비보유자였으나, 2000년대의 목록에서는 상위 10명이 모두 보유자들로 채워졌다. 반면에 공옥진과 관계를 공유하는 인물은 상위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공옥진이 맺고 있는 인물 관계는 그가 연결망을 타고 확산될 수 있는 구조와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 시점에서의 생존 여부는 논외로 하고 인물 관계의 구조만을 이야기하자면 공옥진은 김수근, 김덕수, 박동국, 강준혁 등을 매개로 더욱 다양한 무대와 연결될 수 있다. 단독공연을 주로 펼치는 공옥진에 대해서 매개자들은 적극적인 기획을 투입할 수 있다. 반면에 성우향과 성창순의 인물관계는 과거보다도 더욱 견고해진 이너서클을 향한다. 외부와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도할 수 있는 매개자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견고하고 폐쇄적인 내부로 결속하는 인물 관계의 양상은 예술의 정체와 박제화를 비유하는 듯하다.
예인들의 활동 장소24)는 공연장으로 대표된다(<표 6>).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 공연
구분 | 공옥진 | 성창순 | 성우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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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장소 | 빈도 | 장소 | 빈도 | 장소 | 빈도 |
1 | 동숭홀 | 17 | 국립국악원25) | 48 | 국립국악원 | 45 |
2 | 서울두레극장 | 12 | 국립극장 | 17 | 국립극장 | 16 |
3 | 세종문화회관 | 10 | 예술의전당 | 15 | 예술의전당 | 7 |
4 | 강원대 | 6 | 세종문화회관 | 14 | 정동극장 | 6 |
5 | 호암아트홀 | 5 | 카네기홀 | 10 | 세종문화회관 | 5 |
데이터 수량 | 기사 162건, 5,826자, 1,372단어 | 기사 154건, 9,412자, 2,029단어 | 기사 92건, 4,487자, 1,022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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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서의 연행이 예인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공연 장소에 따라 수준 높은 예술과 저급한 예술을 분리하고, 차별화하려는 시도도 오래도록 이어져 왔다. 그래서 예인들은 공연장을 고를 때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며, 또 특정 공연장에서 공연한다는 사실 자체를 홍보 전략으로 도입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그와 같은 태도와 작전의 정점에는 바로 앞 성창순의 공연 장소로 등장하는 뉴욕 카네기홀26) 등이 자리잡고 있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공연장을 통해 예인의 지위를 구별짓고자 하는 세간의 편견은 실존하는 것이다. <표 7>은 빅카인드를 통해 1990년~2017년까지 국내 중앙과 지역의 일간지들에 대해 ‘고급예술’을 검색어로 도출된 기사들 속 극장 명칭의 빈도를 정리한 것이다. 기자들의 통념을 기준으로 보면 일정한 위계질서가 현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인들의 공연 장소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1977년 데뷔 무대에 오른 이후 20년이 지난 시점을 전후로도 공옥진은 무대 활동의 중심이 대학로 소극장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빈도수가 적기 때문에 분명한 경향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일이다. 좀더 구체적인 분석과 평가를 하려면 세부적 내용들에 대한 사례조사를 추가적으로 수행해 보아야 한다. 공옥진이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한 것은 사실 1회에 불과하다. 두레극장에서는 총 2회의 공연을 했다. 체육관부터 백화점 문화센터, 소극장부터 대극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대 활동을 펼치던 공옥진에게 이 정도의 빈도로서 대학로 중심성을 논하는 것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그러나 대학로의 의미가 특정한 지리공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대학로는 한국 소극장 중심지로서의 상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당시 북촌창우극장, 연강홀, 공간사랑소극장 등 범 대학로 권역에서 다수 공연을 펼쳐온 공옥진에 대해 활동 장소의 특성을 대학로로 부여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공옥진의 기타 공연 장소로는 세종문화회관, 강원대27), 호암아트홀 등이 뒤를 잇고 있는데, 역시 빈도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겠다.
한편, 동숭아트센터 공연은 1999년의 무대였다. 원래 민간극장이었던 것을 그해 문예진흥원 임대 형식으로 공공극장화 하였고,28) 재개관의 첫 번째 공연 주자로 공옥진을 선택한 것이다.29) 동숭아트센터의 공연은 문예진흥원 진흥사업의 일환이 되었다. 그 혜택을 입을 예술인의 선정을 통해 문예진흥의 취지와 대중의 향유성 만족을 위한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 공옥진은 매우 적절한 예인이었다.
인물관계에서 확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연 장소 관계에 대한 성창순과 성우향의 유사성은 매우 뚜렷한 반면, 공옥진과 비교할 경우 큰 차이를 나타냈다. 성창순과 성우향은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을 공유하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성창순은 카네기홀 공연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빈도수를 확보했고 성우향은 정동극장의 기획 프로그램에 참여한 결과로 빈도가 부여됐다. 정동극장 공연은 <판소리유파발표회>였는데, 이는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의 지원으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사)한국판소리보존회의 정기공연으로서 1996년 제26회 공연부터 1999년 제29회 공연까지 정동극장에서 열린 바 있다.30) 정동극장은 1995년 국립극장 분관으로 등장하였고, 현재도 문체부 위탁기관으로서 문체부 장관에 의해 이사장, 극장장이 임면되고 있는 일종의 관립 극장이다.31) 공연 장소를 통해 이해하는 성우향의 공연 양상은 정부지원금으로 공연을 기획하고, 정부가 운영하는 무대에서 연희를 펼치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보호제도 생태계 내의 활동에 해당한다.
공연 장소를 통해 확인되는 성창순의 무대도 성우향과 다를 바 없다. 성우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민간 흥행극장인 카네기홀 공연의 등장인데, 해당 공연은 소극장 와일리사이틀 홀(Weill Recital Hall)에서 개최되었다.32) 마루의 객석과 2층 객석을 합해서 268석 규모의 극장이다.33) 연행의 가치와 무관하게 아주 작은 공연이었기 때문에 성창순의 카네기홀 공연은 당시에 어느 언론에서도 기사화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인 활동 생태계의 맥락에서 성창순의 궤적에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한편, 카네기홀 무대는 공연이 끝나고 한참 이후부터 이력의 형식으로 기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2017년 성창순 타계 후 쏟아진 기사들은 카네기홀 공연을 무대 활동의 정점으로 묘사했다.34)
2000년을 기점으로 3명의 예인 모두 공연장 관계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다(<표 8>).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공옥진이다. 시장과 정부가 혼합된 제도 위에서 지역과 극장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공연장을 거점으로 두루 활동했던 이전까지와 달리 2000년대에 이르게 되면 이른바 인간문화재 부류의 예인들이 주로 섰던 공연장들이 공옥진의 중요한 장소 관계로 나타난다. 이전 시기의 동숭홀, 서울두레극장, 강원대 백령문화관, 호암아
구분 | 공옥진 | 성창순 | 성우향 | |||
---|---|---|---|---|---|---|
순위 | 장소 | 빈도 | 장소 | 빈도 | 장소 | 빈도 |
1 | 링컨센터 | 51 | 국립국악원 | 41 | 국립국악원 | 116 |
2 | 국립극장 | 31 | 국립극장 | 28 | 국립극장 | 67 |
3 | 국립국악원 | 24 | 소리문화의전당 | 23 | 소리문화의전당 | 32 |
4 | 예술의전당 | 17 | 광주문예회관 | 17 | 전주전통문화센터 | 26 |
5 | 세종문화회관 | 16 | 다향체육관 | 16 | 예원당 | 16 |
데이터 수량 | 기사 583건, 12,566자, 3,431단어 | 기사 448건, 2,5037자, 5,641단어 | 기사 531건, 2,8827자, 6,328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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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홀 등 민간 생태계 성격의 공연장들은 목록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링컨센터,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예술의 전당 등이 채웠다.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예술의 전당 등은 이전 시기 성우향과 성창순의 주요 무대로 나타난 공연장소다. 덧붙여서 링컨센터는 국가적 차원의 문화사절의 맥락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인으로서의 한 생애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에 대한 사회적 기억이 재구성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35)
성창순과 성우향의 경우, 가장 중심적 활동 장소로서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 시기 목록에 나타났던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이 후순위로 밀려나갔다. 이는 공옥진과 비교하면 반대의 경향이라 흥미롭다. 공옥진의 경우는 이 시기 세종문화회관이 유지되었고, 예술의 전당이 목록에 새롭게 진입하였다. 성창순의 경우, 빠져나간 빈자리를 소리문화의전당, 광주문예회관, 다향체육관 등이 채웠고, 성우향의 경우는 역시 소리문화의전당, 전주전통문화센터,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이 채웠다. 3명의 예인들과 각각 연계된 상위 5개 장소들은 모두 보호제도 기반의 생태계를 표상한다. 성창순과 성우향은 과거의 경향이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장소에서 특기할 점이 더 있다면 그것은 전주 및 전북지역이 대두하는 모습이다. 판소리를 하는 전통예인들의 활동 장소로서 서울지역의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이 전주지역의 소리문화의전당 등으로 대체되는 양상이다.
인물, 장소와 마찬가지로 예인들과 관계를 형성한 기관36)들의 경우에도 공옥진과 나머지 두 예인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표 9>). 빈도 비교에 사용된 단어 숫자를 감안할 때 성창순과 성우향의 경우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사업을 수행하는 기관, 그리고 자신이 속한 이익단체로서의 기관과의 연결 중심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반면에, 공옥진의 경우는 문예진흥원이라는 진흥 기구로부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 기관들이 중심성 없이 한자리 빈도에 머물고 있다. 소속된 이익단체도 없으며 나열된 기관들 다수는 전통예술 지원사업의 집행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공옥진 역시 문예진흥원이라는 정부 정책을 대리하는 기관과 비중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다만 문예진흥원과 맺는 관계는 앞서 논한 바 있듯이 원형에 대한 보호제도가 아닌 창작 및 활성화를 추구하는 진흥제도의 맥락에 선다는 점에서 비교 대상과의 차별성이 나타난다.
구분 | 공옥진 | 성창순 | 성우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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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기관 | 빈도 | 기관 | 빈도 | 기관 | 빈도 |
1 | 문예진흥원 | 9 | 국악협회 | 28 | 국립창극단 | 23 |
2 |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7 | 국립창극단 | 20 | 국립민속국악원37) | 12 |
3 | 동국예술기획 | 5 | 국립국악관현악단 | 15 | 성우향판소리연구소 | 9 |
4 | 자갈치 | 5 | 전북도립국악원 | 9 | 문화재보호재단 | 6 |
5 |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5 | 문화재보호재단 | 6 | 국립국악관현악단 | 5 |
데이터수량 | 기사 162건, 5,826자, 1,372단어 | 기사 154건, 9,412자, 2,029단어 | 기사 92건, 4,487자, 1,022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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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창순과 성우향은 각각 국악협회와 성우향판소리연구소를 제외한 나머지 기관들을 정부 관련 기관으로 채웠다. 성창순은 배우자가 1960년대 말에 국악협회 회장을 지냈고, 그 자신 오랫동안 국악협회의 이사였다. 성우향판소리연구소는 성우향이 운영하는 판소리 전수 공간이었다. 두 예인이 목록을 공유한 기관으로는 국립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 문화재보호재단 등이 나타났으며, 전주에 위치한 전북도립국악원과 남원에 위치한 국립민속국악원 등 비수도권 소재 기관들을 각각 따로 목록에 올려두었다. 이들의 기관 관계에서 민간에서 활동하는 매개자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공옥진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나 극단 자갈치 등 민간 예인들이 모인 기관과도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반해, 이들은 자신과 공연을 같이 할 수 있는 동료들을 정부 출연 예술기관을 통해 만나고 있다. 성우향과 성창순은 문화예술지원의 대표기관인 문예진흥원과의 관계가 상위 목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문화재보호재단을 통해 해당 수요와 기능을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창순과 성우향이 공유하는 기관의 소재지는 모두 서울인 반면, 서로 엇갈려 관계를 맺고 있는 기관들이 모두 전라북도에 소재해 있다는 점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2000년 이후 기관과 형성된 관계가 크게 변한 것은 장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공옥진이다(<표 10>). 민간의 매개자인 공간사랑이 이전 시기와 달리 목록에 등장하였다. 2000년 이후 김수근이 인물 간 관계에서 공옥진의 가장 중요한 관계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인 것으로 파악된다. 과거에는 소극장 공간사랑이라는 구체적인 공연장과의 관계로 드러났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공간의 본류인 공간건축 영역과도 함께 언급되고 있다. 공옥진과 건축적 상징으로서의 공간사랑 양자 모두 우리 사회에서 회고적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공옥진이 무대에 서지 않음에도 3위 자리에 나타나 공옥진과 비중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민간 공연기획사 동국예술기획의 존재는 뜻밖이다. 이는 관계 구도의 역전을 짐작케 한다. 이에 대해서는 관련 데이터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기사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알려준다. 공옥진의 활동이 이들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활동을 위해 공옥진이 매개자로 호출되는 것이다. 공옥진 자체가 일종의 브랜드가 된 이후 역으로 동국예술기획이 공옥진이라는 인물을 홍보활동의 매개체로 활용하는 양상이다.
구분 | 공옥진 | 성창순 | 성우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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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기관 | 빈도 | 기관 | 빈도 | 기관 | 빈도 |
1 | 문화재위원회 | 47 | 국립창극단 | 56 | 국립창극단 | 119 |
2 | 문화재청 | 44 | 유네스코 | 37 | 국립민속국악원 | 101 |
3 | 동국예술기획 | 37 | 국악협회 | 30 | 전북도립국악원 | 50 |
4 | 문화체육관광부38) | 35 | 국립민속국악원 | 27 | 유네스코 | 46 |
5 | 공간사랑39) | 30 | 전북도립국악원 | 21 | 예술종합학교 | 36 |
데이터 수량 | 기사 583건, 12,566자, 3,431단어 | 기사 448건, 25,037자, 5,641단어 | 기사 531건, 28,827자, 6,328단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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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예술기획이 1990년부터 개최하기 시작한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지난 26년간 매년 수차례 국내 및 해외(미국, 일본, 중국 등)를 돌며 수많은 전통예술인을 무대에 세운 공연 브랜드다. 특히 김천홍(명무), 이매방(명무), 공옥진(일인창무극), 박동진(판소리), 이은관(배뱅이굿) 등 지금은 고인이 된 명인들도 한국의 명인명무전에 출연하며 전통예술 원형 보존 및 전승을 함께 시도했다.40)
나머지 3개 관련 기관으로는 모두 정부 당국이 등장한다. 문화재위원회, 문화재청, 문화체육관광부가 차례로 나타난다. 예외적 예산 편성이 없진 않지만, 이 기관들은 예인들의 무대 활동 지원을 직접적인 업무로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다. 구체적인 기사들을 참고하면 이는 인물 간 관계에서 유인촌이 등장하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특히 심사 평가를 전담하는 문화재위원회가 최상위를 차지한 것은 2009년 전국적 여론을 환기시켰던 공옥진 문화재 지정 논란과 연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에는 성창순과 성우향도 관련 기관에서 각각 2개, 3개 기관의 목록이 바뀌었다. 그러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특이사항이 감지되지 않는다. 여전히 상위 기관의 목록은 정부당국 중심성을 조금도 벗어난 바가 없다. 관주도 보호제도 생태계에 여전히 머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전 시기 따로따로 관계를 맺고 있던 전북도립국악원과 국립민속국악원을 두 사람이 상위 목록으로 공유했다는 점이다. 이는 장소의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되었던 바 서울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논의와 다른 별도의 맥락에서 흐름을 인식하고 살펴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유네스코가 양자 모두의 목록에 올라선 것도 눈에 뜨인다. 2003년 판소리가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여파가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본 절에서는 이상의 논의들을 빅카인즈가 제공하는 연결망 가시화 프로그램을 통해 시각적으로 부연해 보고자 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다수의 양적 데이터를 노드 간 선 연결을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데이터 집합에 내재된 의미를 독자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질의에 대해 정확한 대답이라고 기계적으로 판명된 기사 우선순위 100건을 선별하여 그것을 시각화의 로(raw)데이터로 활용하였는데, 연결망 지도를 사용할 때는 이러한 조건 혹은 한계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41)
시각화의 시간적 범위는 앞 빈도분석의 시기 구분에 준해서 수행하였다. 시각화의 대상은 인물관계를 제외하고 장소-기관 연결망을 통합하여 수행하였다. 공옥진, 성창순, 성우향 순서로, 앞선 시기에서 후행 시기의 순서로 분석, 가시화된 연결망을 그려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개인을 기준으로 한 시계열 비교 대신 동시대의 예인 비교가 가능하도록 공시적 차원으로 배치해 두었다. 각각의 연결망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석을 덧붙여 두었다. 한편, 글자가 작아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으나, 연결망 그림의 중앙 노드는 공옥진, 성창순, 성우향 등 질의어로 사용한 예인을 지시한다([그림 4]~[그림 9]).
이상 매개자로서 장소-기관 통합 데이터의 연결망을 시각적으로 살펴보았다. 시각화된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더라도 공옥진과 성우향-성창순은 유형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고, 성우향과 성창순은 동형적 관계가 두드러짐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Ⅴ.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한국 전통연희 영역의 정책적 변화상을 공옥진이라는 인물과 매개 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다. 사회적 가치가 법적으로 정의되어 있던 보호제도 하의 예술과 달리 작품과 활동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야 했던 공옥진과 같은 비주류 예인들에게 매개자는 필수적인 존재였고, 매개자의 개입과 협력이 가능한 제도적 기반을 통해 자신들의 무대를 가까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상당수의 매개자들은 청중 수요에 대한 전문가였으므로 이들의 기획 행위는 비주류 진영 생태계 활성화의 주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들의 정책 과정 참여를 통해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자유로운 전통 연희가 일부나마 부활하여 존재감을 과시했고 청중들은 예측된 수요에 부응했다.
반면, 매개 활동 및 매개자의 존재감이 미미했던 보호제도 하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경우는 대부분의 관계가 보호제도 내부에서 맺어진 관계 그리고 보호 정책을 집행해 나가는 국공립기관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작품과 공연은 제도가 설계한 대로 이른바 ‘원형’의 재현을 성실히 추구했고, 정부의 구호(救護)에 의해 순환하는 생태계가 고착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무대에 대해서도 수요가 아예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청중 수요가 창출되거나 폐쇄적인 생태계 외부로 확장할 수 있는 매개고리 창출 수준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호 정책을 통해 그나마 상당수의 전통 연희가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겠으나, 전승 현장의 활력과 의미까지 되살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구제(救濟) 상태가 영속화하거나 소수 관계자의 이해를 위해 보호 제도가 유지되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행된 공옥진의 인물, 관계, 장소 관계에 대한 비교분석 결과는 전통 연희 활성화 정책 수립 시에 특정 예인에 대한 직접 지원 대신 매개 활동 및 매개자들의 활력을 자극할 수 있는 간접적 지원사업 지향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매개자들이 정책 과정에 두루 개입하여 국가사업이 경직되지 않도록 하고, 유동하는 사회적 수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옥진과 같은 창의적이고 대중적인 전통 예인의 등장 환경을 조성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일러준다.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