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2018년 5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이하, 조사위)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 사례와 유형을 정리․분석한 결과, 총 342개 예술단체와 8,931명의 예술인이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사찰, 검열, 지원 배제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했다.1) 이와 관련하여 조사위는 2018년 6월 책임 규명 권고안을 심의․의결하여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제출했으며 문체부는 2018년 12월 수사 의뢰와 징계 절차에 착수했다. 아울러 조사위는 헌법 개정을 비롯한 다양한 제도 개선을 권고했는데, 2019년 현재 문체부와 산하기관들은 이 권고를 받아들여 제도 개선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줄고 있다. 2017년 1월 일간지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언급되는 수는 3,505건에 이르렀으나 2018년 12월에는 100건에 불과했다.2) 이전에는 조사위의 활동, 새로운 사실 확인, 후속 조치, 관료 징계, 법적 처벌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면 최근에는 사태 전반을 재조명하거나 후속 조치 미비를 개탄하는 사설 형식의 글이 대부분이다. 또한 정치인들의 관심도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3) 2018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블랙리스트 사태 관련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며,4) 2019년 5월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면서 국회에서의 논의는 일단락되는 듯하다.
자칫 후속 조치 동력을 잃을까 우려되는 만큼 학계의 관심이 필요하다. 학계의 객관적인 논의는 사태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정부와 산하기관 간의 관계가 드러난 예외적인 사례인 만큼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이 사태를 학술적으로 기록, 분석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문화예술정책의 패러다임을 진단, 수정, 발전시키는 유의미한 제안을 도출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본 연구는 문체부의 대표적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를 중심으로 책임성의 관점에서 블랙리스트를 실행하게 된 이유를 분석하고, 기존에 논의되고 있는 혁신 의제에 대하여 평가해봄으로써 학계 논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Ⅱ. 블랙리스트 사태
조사위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를 ‘집권세력이 국가기관, 공공기관 등을 통해 법․제도․정책․프로그램․행정 등의 공적(公的) 또는 강요․회유 등의 비공식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권에 비판적이거나 정치적 견해가 다른 문화예술인들을 사찰․감시․검열․배제․통제․차별하는 등 권력을 오․남용함으로써 민주주의 원리를 파괴하고, 예술 표현의 자유와 문화예술인의 권리를 침해한 국가범죄이자 위헌적이고 위법,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사태라고 해석하고 있다(조사위, 2019). 블랙리스트 사태는 블랙리스트 작성(등재)과 지시, 실행(배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사위는 블랙리스트 등재도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표 1>은 블랙리스트 현황 및 규모를 정리하고 있다.5) 시국선언 명단을 제외하더라도 1,094명의 문화예술인들과 342개 단체가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그 규모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관련한 처벌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6년 12월 21일 공식 수사에 돌입한 박영수 특검은 2017년 1월 8일 블랙리스트 작성을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 범죄 행위로 규정했고, 1월 12일 작성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구속하였다. 1월 21일에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을 구속하였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하면서 3월 31일 박근혜 대통령을 구속하였다. 2019년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데, 김기춘의 경우 1심에서 징역 3년을, 2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블랙리스트 실행과 관련해서는 이제 후속 조치가 시작되고 있다. 조사위는 2018년 6월 책임자 처벌과 제도 개선 요구 사항들을 의결했다. 이때 조사위는 문체부에 24명을 수사 의뢰하고 44명을 징계할 것을 권고했었는데, 문체부는 9월, 7명을 수사 의뢰하고 12명에게 주의 처분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예술인들은 문체부의 소극적 대처에 강하게 반발했고, 2018년 12월 31일 문체부는 10명을 수사 의뢰하고 68명을 징계 또는 주의 조치하겠다고 다시 발표했다. 2019년 현재 구체적인 진행 상황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기소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 한편, 예술계는 블랙리스트를 적극적으로 실행한 관료들까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7)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법적 판단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헌법」 제2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정하는데 블랙리스트 사태는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 사건이다. 그리고 「형법」 제123조(직권남용)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는데 블랙리스트를 작성, 지시한 것은 직권을 남용하여 문예위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위법 행위이다. 「국가공무원법」 제56조(성실의무)는 ‘모든 공무원은 법령을 준수하여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제59조(친절․공정의무)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 친절하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정하는데 블랙리스트 사태에 연루된 자는 이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며, 제78조(징계사유)에 따라 징계 대상이 된다.
또한 문예위 임직원이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것도 문제가 있다. 「문화예술진흥법」 제29조(위원의 직무상 독립 등) 제2항에 따르면 ‘위원회의 위원은 문화예술의 다양성과 균형적 발전을 위하여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예위 위원장은 공무원의 위법 행위를 방조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행동강령」 제4조(공정한 직무수행을 해치는 지시 등에 대한 처리)는 ‘임직원은 하급자에게 자기 또는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법령이나 규정에 위반하여 공정한 직무수행을 현저하게 해치는 지시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정하고 제6조(특혜의 배제)는 ‘임직원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지연․혈연․학연․종교 등을 이유로 특정인에게 특혜를 주거나 특정인을 차별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정하며, 제8조(정치인 등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처리)는 ‘임직원은 공무원, 정치인 또는 정당 등으로부터 부당한 직무수행을 강요받거나 부당한 청탁을 받은 경우 (중략) 위원장에게 보고하거나 행동강령책임관과 상담하여 처리하여야 한다’고 정하는데, 문예위 임직원은 이를 위반했고, 제33조(징계)에 따라 징계 대상이 될 수 있다.8)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연구는 2017년 7월 31일 출범한 조사위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9)조사위는 2019년 2월 총 10권의 백서를 발간했다. 1권에서는 위원회 활동을 폭넓게 서술하고, 2권에서는 진상조사의 구체적인 내용, 3권에서는 제도개선의 실질적인 제안을 담고 있으며, 전문가들의 분석적인 시각이 담긴 글은 3권 6장의 ‘별첨’과 4권 ‘블랙리스트 사태의 총체적 조망’에서 확인할 수 있다. 3권 6장에서는 18명의 전문가들이 심사제도, 문화재정, 문화부 조직체계, 문화 전달체계 등 문화정책의 실질적인 집행과 관리가 이루어지는 세부 분야에서 조언을 하고 있다. 4권에서는 총 12명의 전문가들이 독립적인 주제를 소재로 하여 소논문 형태의 글을 기고하였는데, 헌법과 법률(오동석, 이재승, 장지연), 문화사적 접근(이동연, 심용환, 천정환), 예술작품(박현선, 오창은), 예술가의 당사자성(이진아, 오창은, 이양구, 김소연)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서의 글 중 문예위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글로는 노이정(2019)이 있다. 노이정은 문예위 위원 선발 방식 등 관련 제도가 변천해 온 역사를 추적하면서 문예위가 독립성과 자율성이 침해될 수밖에 없는 조직 구조로 변질되었다고 진단하며, 문예위는 지원기구가 아니라 검열기관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노이정은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의 문예위 직원들의 행태도 분석하고 있는데, 직원들이 내부 고발이나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문제를 심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연구로 Yuk(2019)의 논문이 있다. 이 글에서 Yuk은 영화 산업의 측면에서 블랙리스트 사태를 조명하였는데, 박근혜 정권에서 영화산업은 효과적인 사회 통제를 위한 이데올로기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방식은 영화 제작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교묘한 지원과 배제의 동학 사이에서 검열이 작동하였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자율적인 위원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보원이라는 문화예술과 관계없는 국가 기구가 블랙리스트 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정부의 개입이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이 연구에서 밝힌 것들은 영화산업이 아닌 순수예술, 영화진흥위원회가 아닌 문예위로 분석의 대상을 옮겨 오더라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즉, 예술의 분야별 특성이나 위원회 개별 조직의 특수성과 관계없이 정부가 문화예술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한국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전 분야에서 똑같은 검열과 배제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행된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연구는 발생한 사건을 정리하고, 진상 조사한 내용을 사실 그대로 서술한 보고서와 문체부 및 산하기관의 구조 및 심사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보고서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어, 노이정(2019)과 Yuk(2019)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학술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블랙리스트 사태가 제대로 마무리되도록 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기존 문화예술정책의 패러다임을 진단하여 수정, 발전시키는 유의미한 제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도 보다 깊은 학계의 논의가 필요하다.
Ⅲ. 이론 논의
책임성의 합의된 정의를 찾기는 어렵다(Bovens, Schillemans, & Goodin, 2014). 영어로 ‘accountability’와 ‘responsibility’이 혼용되기도 한다. 계층제 내에서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Cooper, 2006), 국민의 뜻에 반응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Daley, 1984). ‘대답하기(providing answers)’ 정도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설명이다(Bovens, Schillemans, & Goodin, 2014).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의무(an obligation to explain and justify conduct)’라고 말할 수 있다(Bovens, 2007). 그런데 책임성의 구조에서 책임을 요구하는 자와 책임을 요구받는 자가 구분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구하는 자는 사전에 재량의 범위를 정한 후 요구받는 자에게 재량을 부여하여 행동케 하고, 사후에 행동의 결과를 확인한다. 이때 요구받는 자가 요구하는 자에 반응적으로(responsively) 재량을 사용하는 것을 책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료의 책임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연구는 Finer(1935; 1941)와 Friedrich(1940)이다. 이들은 내적 책임성과 외적 책임성을 구분하고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놓고 논쟁했다. Friedrich(1940)는 관료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며 내적 책임성을 강조했는데, Finer(1941)는 “공무원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되며,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responsible). 국민의 대표들은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공무원들의 행동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며 외적 책임성을 강조했다. 민주주의적 체제에서 관료들이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이견이 없었는데, 책임성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시작되자 책임성을 여러 유형으로 나눠서 특정한 결정을 함에 있어 어떠한 책임성이 중요한지를 두고 논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료의 책임성 연구는 Romzek & Dubnick(1987)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이 연구는 미국 유인우주왕복선 챌린저호(Challenger) 폭발 사고를 책임성의 관점에서 분석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연구는 <표 2>와 같이 책임성을 통제의 수준과 원천에 따라 네 가지로 유형화하고 관료의 결정이 무엇에 근거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관료적(bureaucratic) 책임성은 위계 구조 내에서 상사의 지시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통제의 원천은 조직 내부에 있으며, 통제의 수준은 상당히 높다. 법률적(legal) 책임성은 관료의 결정을 직접 제약한다는 점에서 관료적 책임성과 유사하지만, 통제의 원천이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문적(professional) 책임성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자주 발견되는 책임성이다. 전문성에 기대는 것이며 사후에 성과를 평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통제의 원천은 조직 내부에 있으며 통제의 수준은 상당히 낮다. 마지막으로 정치적(political) 책임성은 민주적 행정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유권자와 대표자의 관계를 의미한다. 통제의 원천은 조직 외부에 있으며 통제의 수준은 상당히 낮다.
최근 국내에서 Romzek & Dubnick(1987)의 책임성 유형론을 활용한 연구가 활발하다(모창환, 2005; 박석희, 2010; 김병섭․김정인, 2014; 2016; 주재현․한승주, 2015; Ryu & Chang, 2016). 대표적으로, 김병섭․김정인(2014)은 세월호 사고 수습과정에서 나타난 관료들의 책임성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이 연구는 Romzek & Dubnick(1987)의 책임성 유형 분류를 활용하여 분석틀을 만들어 분석을 실시했다. 세월호 수습과정에서 관료들은 법률적 책임성과 위계적 책임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에 걸맞은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으며 전문가적 책임성을 다하기 위한 전문성이 부족했고, 정치적 책임성과 관련해서는 이중성을 드러냈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세월호 침몰 사고 후속 대책 재검토 방안을 제시했다.10)
Ⅳ. 연구 설계
본 연구는 Romzek & Dubnick(1987)을 원용하여 연구의 분석틀을 구성한다.11)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대리인인 관료는 주인인 국민을 대신하여 과업을 수행하므로 재량을 갖고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관료의 재량 행위는 일차적으로 Finer(1935; 1941)와 Friedrich(1980) 논쟁에서는 내적 책임성이라고도 불렸던 Romzek & Dubnick(1987)의 전문적 책임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전문적 책임성에 모든 것을 기댈 수는 없다.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과 이해 상충(conflict of interest)으로 대리인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외적 통제가 가해질 수 있다. 외적 책임성이라고 불리던 것으로서, 관료의 재량 행위가 Romzek & Dubnick (1987)이 말한 법률적 책임성, 관료적 책임성, 정치적 책임성의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이다.12)
그런데 본 연구는 법률적 책임성을 절차적 책임성으로 용어를 바꾸기로 한다. 법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차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McCubbins, Noll, & Weingast, 1987). 절차적 책임성은 정해진 절차 범위 내에서 재량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관료적 책임성은 관료제의 속성인 위계(hierarchy)를 강조하여 위계적 책임성으로 바꾼다. 관료적 책임성 용어를 사용할 경우 관료제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계적 책임성은 위계적 명령의 범위 내에서 재량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한편 본 연구는 결과적 책임성을 추가한다. 결과적 책임성은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 확산 이후 강조되는 것으로 Romzek & Dubnick(1987)이 놓친 것이다. 신공공관리 확산 이후 정부는 절차적 제약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대신 성과 목표를 제시하고 나중에 성과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결과적 책임성은 성과 목표를 달성하도록 재량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Weingast, 1981; 184).
정치적 책임성은 재량 행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절차적 책임성, 위계적 책임성, 결과적 책임성을 거쳐 발현된다는 점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일종의 복대리인 상황이다. 국민은 국민의 대표를 뽑고, 국민의 대표는 입법 과정을 통해 절차를 만들어 조직원의 재량 행위를 제약한다. 그리고 국민의 대표는 가장 상위에 있는 조직의 관리자를 정치적으로 임명하고, 관리자가 조직원에게 명령을 내리고, 조직원은 이에 복종함으로써 재량 행위가 제약된다. 또한 국민의 대표는 조직이나 조직원이 달성해야 할 성과 목표를 수립하여 달성케 하고 그 결과를 평가함으로써 재량 행위를 제약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적 책임성은 실제 분석에서 분석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까지 논의들을 정리하여 연구의 분석틀을 구성하면 [그림 1]과 같다.
문체부 관료가 문예위 임직원에게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했을 때 실제로 실행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문예위 임직원이었고, 실행은 재량 행위였다. 문예위 임직원이 크든 작든 직접 처벌을 받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문예위 임직원의 재량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량 행위는 전문적 책임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절차적 책임성, 위계적 책임성, 결과적 책임성을 달성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책임성이 같은 것을 요구한다면 모든 책임성을 달성할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어느 한 책임성을 달성하면 다른 책임성을 달성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심지어 책임성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떠한 재량 행위를 판단할 때는 네 가지 책임성의 측면 각각에서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13) 한 측면만 봐서는 재량 행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문예위 임직원의 재량 행위는 어떠한 책임성을 달성하고 어떠한 책임성은 달성하지 못한 것인지를 분석하고, 책임성의 측면에서 혁신 의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본 연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14) 그 이유는 첫째, 블랙리스트 사태는 예술인 지원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데, 문예위가 바로 예술인 지원의 핵심조직이기 때문이다. 문예위는 전신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설립된 해인 1972년부터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사용하여 예술인들을 지원해왔다.15) 예산, 역사, 상징성 등 모든 면에서 볼 때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예술지원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문예위는 문체부 산하기관들 중 가장 많은 임직원이 블랙리스트 사태에 연루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문체부가 발표한 수사 의뢰 대상 전체 10명 중 문예위 임직원은 2명, 징계 및 주의 조치 대상 전체 68명 중 문예위 임직원은 17명이었다. 그뿐 아니라 블랙리스트 사태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주요 문건들이 작성된 것은 주로 문체부 공무원과 문예위 직원들과의 회의, 보고문건 등을 통해서였다.
문예위의 블랙리스트 실행 사례 중 문예위가 2018년 11월 21일 징계 처리한 사건은 공통 1건, 공연 14건, 문학 5건, 전시 1건으로 총 21개이다(조사위, 2019: 474-78). <표 3>의 ‘2017직공7’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블랙리스트 실행을 위한 지원 및 심사제도 개편 사건>에서 기존의 심사제도를 개편하는 구체적인 방식과 블랙리스트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결정되었고, 이 기준을 토대로 공연, 문학, 전시 등 모든 예술장르 지원사업에서 블랙리스트 배제가 실행되었다.
본 연구는 21개의 사건 중 ‘2017직공1’ <2015 서울연극제 대관 배제 및 아르코대극장 폐쇄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문예위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주로 공연예술 장르에 집중되는데, 이 중에서 ‘서울연극제 배제 사건’은 공연과 관련된 사건이면서, 이 사건과 연루되어 징계권고된 직원의 수가 5명으로 상대적으로 큰 파장을 미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건은 21개 사건 중 진상 규명이 비교적 확실히 완료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연극협회에서 아르코대극장 공간을 사용하여 서울연극제를 개최한 역사가 오래되어 다른 블랙리스트 실행 사건에 비해 언론 및 관계자의 관심이 가장 집중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둘러싼 관계자들의 각종 진술이 이미 다양하게 외부에 공개되었고, 조사위 백서에서도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어 사실 관계를 둘러싼 논란이 크다고 말하기 어렵다.
서울연극제 배제 사건이 시작된 2014년을 기준으로 문예위의 현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문예위는 1처 1센터 5본부 17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45명의 임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문예위의 미션은 ‘문화예술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창조의 기쁨을 공유하고 가치 있는 삶을 누리게 함’이었으며,16) 한국공연예술센터는 아르코예술극장, 대학로예술극장을 운영하는 조직으로서 별도 법인에서 2014년 문예위의 소속 부서로 재편성되었다. 한국공연예술센터에는 운영총괄본부가 있었고, 그 산하에는 문화사업부와 공연운영부, 무대예술부가 있었다. 서울연극제를 주최한 서울연극협회는 아르코예술극장에 위치한 아르코대극장을 대관하기 위해 ‘2015 한국공연예술센터 정기대관 공모’에 지원하였으며,17) 서울연극협회 및 협회장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블랙리스트 실행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된 것이다.
본 연구는 위의 사건을 분석하기 위해 문헌 분석을 실시하고자 하며, 주요 활용 문헌은 조사위의 백서 자료이다. 2019년 2월 발간된 백서는 총 6천6백여 쪽으로 민관합동으로 운영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의 활동 결과물이다. 이 백서가 기존 정책자료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조사위에서 구축한 기본적인 인터뷰 자료를 최대한 원자료에 가깝게 수록하였다는 점이다. 이 내용은 6권의 부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부록 1권에서는 기관별로, 2권부터는 장르별로 구분하여 본권에서 나온 내용보다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조사위의 인터뷰에 응한 관료들의 직위와 이름은 익명 처리되어 있지만, 대화 형식의 인터뷰 녹취록을 수록하여 블랙리스트 사태에 가담한 관료들의 입장, 의견, 생각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 연구의 분석 방법은 문헌 분석이지만 동시에 백서에 수록된 여러 건의 인터뷰 녹취록을 함께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인터뷰 조사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Ⅴ. 분석 결과
문예위는 영국의 예술위원회(Arts Council of Great Britain)를 벤치마킹하여 설립되었다. 영국 예술위원회는 정부 소속기관이 아니라 독립 법인이며, 독임제 구조가 아니라 합의제 구조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예위 또한 독립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문예위는 다른 정부 소속기관들과는 달리 정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al)’ 실현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기관의 구조적 독립성이 확보되면서 문예위 위원들은 관료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전문적 책임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본적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독임제 구조가 아니라 합의제 구조로 설립되어, 다양한 전문가들이 위원으로 참여하여 함께 심의하고 합의, 의결함으로써 전문적 책임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18)
조직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문화예술진흥법」은 문예위 위원이 전문적 책임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제23조(위원회의 구성) 제1항은 위원들을 “문화예술에 관하여 전문성과 경험이 풍부하고 덕망이 있는 자”로 하도록 하고, 제2항은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전통예술 등 문화예술 각 분야 및 지역 인사가 고루 포함”된 임원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장관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제29조(위원의 직무상 독립 등) 제1항은 “위원은 임기 중 직무상 외부의 어떠한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제2항은 “위원은 문화예술의 다양성과 균형적 발전을 위하여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3항은 결격사유가 확인되거나 심신상의 장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경우를 제외하면 “그의 의사에 반하여 면직되지 아니한다”라고도 규정하고 있다.
사업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본 연구 대상인 ‘2015 한국공연예술센터 정기대관 공모’ 사업을 살펴보면 문예위 산하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소극장), 대학로예술극장(대극장, 소극장)에 대한 정기대관 대상자를 공모를 통해 선정하는 것으로, 문예위는 정기대관 사업을 공지하고 접수를 받았다. 문예위는 접수 마감 후 대관 심의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하여 「한국공연예술센터 운영규정」 제11조(대관 심의기준)에 따라 대관 예술인 및 예술단체를 선정하고자 했다. 대관 심의 기준은 작품의 우수성(20점), 창의성 및 참신성(20점), 단체의 신뢰도 및 공연 참여 인력의 우수성(20점), 공연 추진 계획의 충실도(20점), 행사의 공익성(20점)이었으며, 각 분야 전문가들인 심의위원들이 자율적으로 부여한 점수에 의해 공모의 당락이 결정되는 구조였다.19)
문예위도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여 정부가 설립하고 정부가 예산을 부담하는 산하기관 중 하나인 만큼 절차적 책임성, 위계적 책임성, 결과적 책임성 모두 요구된다. 예를 들어 문체부장관이 문예위 위원장과 위원을 임명하며, 감사는 기획재정부장관이 임명한다. 중기사업계획서와 기금운영계획안을 기획재정부장관에게 제출, 협의․조정해야 하며 사업계획 및 예산은 문체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산보고서는 문체부장관을 경유하여 기획재정부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정원 및 보수에 관한 규정은 문체부 장관과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 2007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문예위는 2018년까지 기금관리형 준정부기관으로 지정되어, 다른 공공기관들과 마찬가지로 경영 공시를 해야 했으며, 경영 실적을 평가받았다.20) 그러나 문예위의 전체적인 구조나 절차의 설계는 전문적 책임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2003년 발족한 서울연극협회는 ‘2015 한국공연예술센터 정기대관 공모’ 사업 전에 이미 블랙리스트에 등재되어 있었다. 2014년 3월 17일 국정원이 작성한 ‘문체부, 좌성향단체 참여 현장예술인지원사업 폐지 방침’ 문서에서 서울연극협회 등의 단체들이 지원사업에 선정되자 사업 자체의 폐지 방침을 정했다는 문서가 그 예이다. 한편 국정원의 ‘주요 좌성향 문화예술단체 현황’ 자료에서도 서울연극협회가 연번 4번으로 등재되어 있었고, ‘문예계 주요 좌성향 인물 현황(249명)에서도 당시 서울연극협회 회장을 지내고 있던 박○○이 연번 86번에 등재되어 있었다. 아울러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 김○○ 사무관의 진술에 따르면, 2014년 4~5월 예술정책과 오○○ 사무관이 청와대가 전한 리스트를 주면서 필사케 한 적이 있는데 그 리스트에도 서울연극협회가 있었다.
서울연극협회는 서울연극제 개최를 위해 공모에 접수했다. 지원 사업 접수는 2014년 10월 8일에 마감됐다. 공연예술센터장의 진술에 따르면, 접수가 마감되자 공연운영부장이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 사무관에게 신청자 명단을 보냈다. 공연전통예술과에서 10월 31일 작성한 ‘2015 한국공연예술센터 정기대관공모 관련 보고’ 문서에 따르면, 30일 청와대가 특정 심사위원 3인을 선정 배제하고 서울연극협회 등 특정 단체 19개를 지원 배제하라고 문체부에 요청했다. 공연예술센터장의 진술에 따르면 공연예술전통과 사무관이 전화를 걸어 신청자 리스트의 접수번호를 불러주며, ‘이 단체들을 유의해서 보라’라고 말했다. 이에 문예위는 심의 절차를 변경하고,22) 심의 과정에 개입하며23) 서울연극협회를 실제로 배제하였다. 배제 사실은 2014년 12월 1일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철저한 검증시스템 운영 중’ 사례로 보고되었다.
한편 미처 예상치 못한 공모 탈락 소식을 들은 연극계는 크게 반발했고,24) 문예위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12월 31일 문예위는 연극인들에게 사과하며 재대관을 알렸다. 그런데 공연운영부장의 자료에 따르면,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대관을 취소하라는 청와대의 지시가 문체부를 거쳐 문예위에 전달되었다. 2월 26일 고소 취하서가 접수됐고 3월 16일 고소는 각하 처리되었다. 그런데 고소 취하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대관 불가 방침을 유지했다. 한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구동부 장치 고장이 3월 10일에 발견되었는데, 3월 말 공연운영부장은 이를 명분으로 대극장을 폐쇄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4월 2일 권영빈 위원장은 김종덕 문체부장관을 면담하여 이에 대해 논의했다. 장관은 청와대 교문수석실과 협의하여 결정하라고 말했고, 개막을 하루 앞둔 4월 3일 대극장은 끝내 폐쇄되었다. 서울연극협회는 재차 배제된 것이다.
일련의 사건을 종합해볼 때 문예위가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2015 한국공연예술센터 정기대관 공모’ 사업의 지원 결정에 있어서 전문적 책임성이 크게 요구되고 위계적 책임성은 상대적으로 크게 요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예위는 문체부로부터 강요된 위계적 책임성을 그대로 따랐다고 말할 수 있다. 위계적 책임성의 강요는 앞서 살펴봤듯이 위법 행위였으며, 강요 내용 자체도 전문적 책임성뿐만 아니라 절차적 책임성 그리고 결과적 책임성에 따른 결정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심의 당시 논의 내용을 종합해볼 때 전문적 책임성을 기준으로 서울연극제는 아르코대극장을 대관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행사였다. 정해진 심의 절차를 따랐다면 이러한 결정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배제 결정이 결과적으로 예술인들의 창작권과 시민들의 향유권을 침해하여, 결과적 책임성의 관점에서 평가하였을 때에도 문제가 있는 결정이었다.
2016년 10월 12일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언론의 최초 보도가 있었다.25) 이후 블랙리스트 사태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법원은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했고, 조사위는 1년간의 조사 끝에 책임 규명 권고안과 함께 제도 개선 권고안을 내놨다. 문예위는 2018년 1월 예술인과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혁신 TF를 구성했다. 혁신 TF는 조사위의 권고안을 기초로 하여 조직 및 사업 분야 혁신 의제들을 도출했고, 문예위가 혁신 의제들을 실천해나갈 것을 요구했다. 문예위는 곧바로 혁신 TF의 요구대로 문예위 혁신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2018년 12월 추진 경과 보고회를 통해 공개한 진행 상황을 보면(문예위, 2018), 문예위는 현재 제도 개선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검토하고 있으며, 제도 개선을 하나씩 해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문예위 임직원이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이유를 전문적 책임성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하지 않았고 위계적 책임성만을 다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책임성의 관점에서 원인을 진단한 만큼 혁신 의제도 그것이 어떠한 책임성과 관련되어 있는지 따져볼 수 있는데,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한 의제는 여러 가지 책임성과 관련될 수 있는데, 관련성의 크고 작음을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으므로 관련성이 명백히 큰 책임성만 서술하기로 한다. 전문적 책임성은 예술인의 전문성과 관련한 것인지, 절차적 책임성은 절차에 관한 것인지, 위계적 책임성은 위계 구조에 관한 것인지, 결과적 책임성은 성과 평가에 관한 것인지를 따져본다. 참고로, 예술인들의 참여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많은데 예술인들의 참여는 전문적 책임성을 높이는 것으로 본다.
① 문예위의 국가예술위원회 전환은 문예위를 독립된 정부기관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문체부로부터의 위계적 책임성을 경감시키는 방안이다.26) ② 문예위의 공공기관 지정 제외는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 변경하는 것으로 바뀌어 추진됐는데, 기획재정부에 대한 위계적 책임성을 경감시키는 것이다. ③ 문예위의 위원 추천위원회 구성 권한 확보/위원장 호선은 문체부가 갖고 있던 권한들을 문예위 위원들이 가져옴으로써 위계적 책임성을 경감하는 방안이다.27) ④ 소위원회 활성화, ⑤ 개방형 직위의 도입 및 운영, ⑥ 사업 과정에서 예술인 및 국민 참여의 확대는 예술인들의 참여를 통해 전문적 책임성을 높이는 방안들이다. ⑦ 문체부와의 수평적 협력관계의 제도화는 양자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전환하려는 것이므로 위계적 책임성을 경감하는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28) ⑧ 단순 수탁 및 지정 교부 사업 정비 및 안정적 재원 확보는 예산 통제를 줄이는 것이므로 위계적 책임성을 줄이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으며, ⑨ 한국지역문화지원협의회 혁신이나 ⑩ 문예위 사무처 조직의 혁신은 특정한 책임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⑪ 결정 과정에서 예술인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것은 예술인의 참여를 통해 전문적 책임성을 높이는 것이다. ⑱ 심의제도 혁신은 심의의 투명성을 높이는 조치로서 전문적 책임성 제고와 관련된 것이다. ⑲ 예술행정 혁신은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점에서 절차적 책임성을 낮추는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㉒ 예술인 교류 활성화나 ㉓ 예술 가치의 확산은 예술인들과의 정보 교환을 촉진시켜 전문적 책임성을 높이는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외의 혁신 의제는 지금까지 정부의 관심 밖에 있던 예술인 및 비평가들을 위한 사업들로서 특정한 책임성과는 관련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⑫ 기초예술 창작 지원 확대 및 창작․향유 지원의 선순환 연계, ⑬ 신진예술인 도전 기회 제공 확대, ⑭ 중견 및 원로 예술인 사후 평가 강화 및 다년간 지원 확대, ⑮ 다원예술 지원 확대, ⑯ 어린이 청소년 대상 사업 발굴, ⑰ 다양한 비평 활동 지원 확대가 그러하다.
조직 분야와 사업 분야를 종합해서 볼 때 혁신 의제에서 위계적 책임성을 경감시키고 전문적 책임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들이 다수 확인된다. 블랙리스트 사태가 지나친 위계적 책임성에 의해 발생한 만큼 위계적 책임성을 줄이고 전문적 책임성을 원래대로 높이는 방안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며, 혁신 의제가 실현될 경우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절차적 책임성과 결과적 책임성에 관한 혁신 의제가 많지 않다는 점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29) 조사위의 백서에서 절차나 성과 목표와 관련한 문제 제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절차적 책임성이나 결과적 책임성의 측면에서 문제는 없었는지 점검하고, 필요하다면 절차적 책임성과 결과적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도 추가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다. 어느 한 책임성이 갖춰진다고 블랙리스트 사태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여러 책임성들의 조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30)
Ⅵ. 결론
본 연구는 Romzek & Dubnick(1987)의 이론을 원용하여 책임성을 정치적 책임성, 전문적 책임성, 절차적 책임성, 위계적 책임성, 결과적 책임성으로 구분한 후 각 책임성의 관점에서 문예위 블랙리스트 실행의 이유를 재정리하고 문예위 혁신 의제를 평가해봤다. 분석 결과를 요약하자면 첫째, 문예위는 임직원이 전문적 책임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상위 기관으로부터 위계적 책임성이 강요되면서 블랙리스트 실행이 이뤄졌다. 둘째, 현재 조직 및 사업 분야 혁신 의제에서 위계적 책임성을 경감시키고 전문적 책임성 높이는 방안들이 주로 확인되는데, 절차적 책임성과 결과적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문예위 블랙리스트 사태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됐다. 조사위에서 조사 결과를 자세히 공개하고 있지만,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학술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에 있다. 외국 저널에서 몇몇 연구가 발표되고 있는데, 국내 학계에서는 오히려 논의가 활발하지 못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연구는 블랙리스트 사태를 연구한다는 점 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이 연구가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편 이 연구는 행정학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Romzek & Dubnick(1987)의 분석틀을 발전시켜 분석틀을 만들었고, 이를 사례에 적용하여 문예위의 혁신 방향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실천적 의의가 있다. 이 연구가 문예위 혁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후속 연구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Hirschman(1970)과 후속 연구들에 따르면 관료는 동의하기 어려운 지시에 대해 복종(loyalty)하거나 침묵(silence), 항의(voice) 또는 이탈(exit)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문예위가 청와대와 문체부의 지시에 복종과 침묵한 사례를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문예위 직원이 복종과 침묵만 한 것은 아니며, 항의와 이탈하며 전문적 책임성을 다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술지원의 핵심 조직인 문예위에게 너무 많은 지시가 내려왔던 것이며 때로는 복종, 때로는 침묵, 때로는 항의, 때로는 이탈한 것이다. 문예위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의 시작은 당연히 복종에 관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향후 문예위 임직원들의 항의와 이탈 사례도 새롭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문예위 임직원의 항의와 이탈 사례를 분석하면 블랙리스트 사태 재발을 막는 미시적 방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