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문화재와 문화유산 개념의 혼용
2004년 문화재청의 영문 공식 명칭은 ‘Cultural Property Administration’에서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으로 변경되었다. 비록 ‘문화재청’이라는 국문 명칭에는 변화가 없었고, 문화재를 뜻하는 ‘cultural property’에서 문화유산을 말하는 ‘cultural heritage’로 영문 단어 하나의 변화가 있었지만, 이는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던 문화재 개념 이해에 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문화재란 명칭은 국가 차원에서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공공의 ‘재산’으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문화유산이란 용어 사용은 유네스코(UNESCO)에서 사용하는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이란 용어를 받아들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는 다양한 범주의 ‘유산’으로 그 개념을 공적으로 확장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어의 변화와 더불어, 현재 한국에서 문화재에 대한 인식 및 활용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문화재는 통상 숭고한 보호의 대상이며 국가의 보물로 인식되었으나, 이제 문화 관광의 중요한 자원으로 관점이 변화되었고, 일반 대중이 향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김규호, 2015: 312-330). 이와 같이 21세기 한국의 문화재의 개념 및 그 범주가 급속도로 확장되는 가운데, 문화재와 문화유산의 개념 정립이 제대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그 용어는 사적 공적 영역에서 혼용되고 있다.
서구 유럽에서는 공식적인 문화유산 보호의 개념 출현을 영국의 고대 기념물 보호법(the Ancient Monuments Act)의 제정이 이루어진 1882년 혹은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설립된 1895년으로 추정한다(Harvey, 2001: 319-338). 19세기 당시에는 문화유산은 고대 기념물 및 건축물 혹은 고고학적 유적으로 인식됐다(Smith, 2006). 특히,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견된(found)’ ‘문화적 산물(cultural product)’로 이해되었고, 중요한 과거 물질문명의 흔적을 나타내지만 ‘부서지기 쉽기(fragile)’ 때문에 전문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Smith, 2012). 하지만 19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유산학(Heritage Studies)의 출현은 문화유산을 과거 박제된 문화적 산물이라는 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현 시대 및 사회의 요구에 의해서 그 의미가 새롭게 부여되고 만들어지는 동적인 사회화 과정(social process)으로서 정의하게 된다(Smith, 2006; 이현경, 2018). 즉, 문화유산화 과정(heritagization)을 통하여 문화유산은 형성되고, 그 문화유산을 둘러싼 특정 기억만이 선택되면서 그 의미가 재탄생된다는 것이다(Harvey, 2001: 320). 이렇게 탄생된 문화유산은 그 유산을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지난 100년 동안 서구 유럽에서 사회적 인류학적 과정으로서의 문화유산 개념이 재정립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문화재 개념은 일제 강점기 문화재 보호령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Pai, 2001; 김창규, 2011; 박정희, 2008). 일제에 의해서 유입된 문화재란 용어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사용하였던 ‘Kulturgut’를 직역한 용어이다(박정희, 2007: 6; 정수진, 2013: 95). 당시 독일이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독일의 문화가 국가의 재산으로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Kulturgut’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문화재의 개념이 경제적인 의미가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가의 자산으로 시작된 한국 문화재 개념은 해방 후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후에도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최근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학계에서 문화재 용어 사용에 대한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문화재에서 문화유산으로의 용어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꾸준히 있었다(박정희 2007; 정수진, 2013). 이에 ‘문화재(문화유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그 연구의 대부분은 문화재보호법이라는 제도를 탐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남궁승태, 2003; 박정희, 2008; 김창규, 2014). 하지만 문화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를 국가의 법적 시스템으로 한정한다면 그 의미와 역할이 국가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문화재(문화유산) 연구 영역에 한계가 생긴다고 볼 수 있다.
본고는 현재 문화재에서 문화유산으로 개념이 확장되는 과도기적 상황과 선행 연구의 제한성을 문제의식으로 삼고, 한국의 문화재 개념이 그 법적 제도 안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볼 뿐만 아니라, 그 제도가 형성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도 더불어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재 개념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기를 일제 강점기, 해방 후 미군정,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등으로 구체적으로 나누고, 그 시기별 문화재에 대한 인식 및 역할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하겠다. 그리고 현재 이와 같은 한국 문화재에 대한 인식체계가 한국의 문화재 보호 및 가치 이해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도록 하겠다. 또한 문화유산으로의 용어 확장이 가져올 수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고, 문화유산 개념의 확장 속에서 문화유산학이 독립된 학제로서 발전해야 하는 필요성도 제언해 보겠다. 이 논문에서 문화재와 문화유산의 개념이 혼용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문화재란 용어 사용이 2000년대 초반까지 지배적이었던 점을 고려해 2장에서는 문화유산 대신 문화재를 사용한다.
Ⅱ. 한국의 문화재 개념 형성과 그 역할의 변화
공식적인 문화재 보호에 대한 법적인 체계가 일제 강점기부터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현재의 문화재 관리 및 보호와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진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청동기 시대에 형성된 고인돌은 공동체의 ‘기념비’로서 현재 문화재의 한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하문식, 2008; 이성주, 2012). 조선시대 인문지리지와 문집(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은 지역을 해설·묘사하는데 있어 ‘고적(古蹟)’과 ‘형승(形勝)’의 용어와 편람을 포함하고 있다(김진영, 2016: 53-55). 고적과 형승은 각각 현재의 문화재보호법에 명시된 사적과 명승 개념에 대응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유적과 경관에 대한 가치 인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박물관 100년사를 연구한 최석영은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현재 박물관과 같이 왕족의 보물, 서화 등과 관련된 귀중품의 보관소 역할을 하였던 장소를 소개한 바 있다(최석영, 2008). 가령 고려시대에 진완서화를 수집하고, 나라의 보물을 보관한 장화전, 조서와 서화를 보관하기 위한 보문관과 청연각을 들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립, 일원원경, 궁도장전 등이 비장되었다는 경흥전도 포함된다.
이와 같이 근대 이전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가치 있는 물건 및 풍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 문화재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 제국의 출현과 함께 발전한 문화재 보호 체계가 한반도에 도입되면서로 볼 수 있다. 이제 문화재 개념과 그 체계의 발전을 각 시대별로 나누어 정리하면서, 그 발전에 영향을 미친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그 역할 변화를 살펴보겠다.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법적 또는 정책적 보호제도 내에서 공식화되었음을 전제할 때, 한반도에 동 개념이 도입된 것은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과 식민 통치의 과정에 일어난 일이라 여겨진다. 일제에 의해 수립된 문화재 관련 제도의 효시는 <향교재산관리규정(1910)>과 <사찰령(1911)>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제도는 직접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개념과 관리사항을 적시하고 있지 않지만, 예부터 이어져 내려온 ‘귀중한 유산’에 대한 국가적 관리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문화재 관리에 관한 제도의 초기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1). 여기서 향교와 사찰은 문화적, 학술적, 종교적 장소로서 장소에 관련된 재산은 국가적 관리 및 통제의 대상으로 정의된다.2) 향교와 사찰 운영에 관한 국가(조선총독)과 지방(지방장관 등)의 통제를 법제화하고, 그 재산의 자유로운 처분을 금지한다.3) 이는 일견 향교와 사찰이 소유한 귀중한 유산이 매매·양도·교환으로 인하여 반출 및 유실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조치로 여겨질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향촌사회에 대한 유림과 불교계로부터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오세탁, 1996: 24, 김순석, 2014: 38). 실제로 일제는 <향교재산관리규정>과 <사찰령>을 통해 지방 유림과 승려가 그들의 세력기반인 향교와 사찰을 자의대로 운영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이들의 정치적, 사회적 및 경제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오세탁, 1996: 26). 또한 <향교재산관리규정>과 <사찰령>은 일제에 의한 문화재 약탈과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제도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중요 재산의 목록은 일제의 수탈 대상 유물의 목록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향교와 사찰의 재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유물이 수탈되기도 한 것이다.(오세탁, 1996: 24). 이 제도 안에서 문화재는 귀중한 유산이라고 칭하지만, 국가가 통제하는 자산으로서의 경제적 의미가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문화재 보호에 적용되던 제도를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이식하였는데, 그 최초의 법제는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1916)>이었다. 동 법률의 제정은 국권피탈을 전후로 일제가 추진한 대대적인 한반도 고대 유적 및 민속 조사를 토대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문화재청, 2011: 24). 1902년 일제는 동경제국대학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통해 주요 사찰과 건축물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추진하였고, 이후 1910년 9월부터는 조선총독부 내에 취조국을 설치해 조선에 전해오는 관습, 풍습 및 제도를 조사하였다. 일제는 고고인류학적 선행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재하는 공식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하였다. 관련 연구자들은 이러한 일제의 유적발굴과 민속조사의 목적이 서구 제국의 식민지배 방식과 마찬가지로 동화이데올로기의 창출과 제국주의적 관제약탈과 관련이 있다고 평가했다(Carprio, 2011; 최석영, 1997). 이러한 평가에 대한 근거로 조선총독부의 5개년 발굴사업의 대상이 옛 한사군(漢四郡)의 통치지역과 남선경영설(南鮮經營設)의 중심인 가야 지역에 집중된다는 것과 조선 민속에 대한 조사가 일본과의 동질성을 주장하는데 이용된 사실을 들 수 있다(조유전, 1996: 56). 또한, 앞서 언급한 향교와 사찰 관련 규정을 통해 유물 목록이 완성되었듯이, 대대적인 고건축 조사와 유적 발굴이 일제의 관제 약탈을 위한 자료적 기반을 마련한 행위로 해석되기도 한다(이구열, 1997; 차순철, 2009).
이와 연관하여 탄생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은 문화재를 통한 일제의 동화정책과 관제 약탈을 조선총독부가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방식으로 통제하기 위한 법적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으로 평할 수 있다(문화재청, 2011: 24; 이구열, 1997: 379-392, 차순철, 2009: 90).4) 동 법의 수립을 통해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발굴현장을 직접 통제하였고, 출토된 유물은 조선총독부 산하 박물관에 수장·전시되었다(문화재청, 2011: 24). 또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은 발견 또는 발굴된 유물의 등록을 경찰관서를 통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5), 이와 같은 철저한 관 중심의 통제 시스템이 보호적 성격보다는 합법적으로 추진된 관제약탈과 더 연관이 깊다고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오세탁, 1996).
이후 1933년에는 문화재 관리에 대한 총독부의 권한을 한층 강화하는 내용의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이 제정된다. 이는 일본 내에서 국가중심의 문화재보호제도가 고도화된 영향이 나타난 것으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史蹟名勝天然紀念物保存法, 1919), 국보보존법(國寶保存法, 1929) 그리고 <중요미술품등의 보존에 관한 법률(重要美術品等ノ保存ニ関スル法律, 1933)>의 주요 내용을 도입해 하나의 법률로 재구성한 것이다. 일제에 의해 도입된 법제도를 통해서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1933년 법을 통해 나타난 문화재 범주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동 법에 의해 유물로서의 동산문화재와 건조물로서의 건축문화재에 한정되던 것에서,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의 4개 유형으로 세분화되고, 동산과 부동산, 인공물과 자연물 그리고 점과 면(장소)을 아우르는 등 문화재 개념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었다.6) 또한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도 역사성, 예술성, 학술성의 3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문화재의 가치가 고고유물부터 미술품, 학술자료에까지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체계가 형성되었다.7) 주목할 점은 소유자의 동의 없이 문화재의 지정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8)과 보물의 소유자에 대한 박물관 전시의 공개 의무를 부과하였다는 데 있다.9) 또한, 발굴 뿐 아니라, 문화재의 이전 및 수출에 있어서 역시 허가제를 적용하고,10) 가지정(假指定) 제도를 도입하여 지정되지 않은 동산 유물의 반출금지를 실현하였다. 이로써 조선총독부는 더 넓은 범위의 유산에 대해 보다 강력하고 구체화된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일견 일본 내에서 발전된 문화재 보호에 관한 제도를 망라하여 문화재 보호의 수준을 일신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문화재 관리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여 기존의 동화정책과 관제약탈을 더욱 본격화하기 위한 의도로 평가된다.
일제 강점기 문화재 보호 제도는 한반도에 도입된 최초의 근대적 문화재 관리 체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제국의 시선으로 문화재가 평가받았고, 문화재에 대한 제국의 강력한 통제력이 후대에 물려줄 유산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식민지배지의 재산 관리에 집중되었기에 그 한계가 있다. 또한 당시 시작된 ‘국가 주도적’이고 ‘규제 중심적’인 문화재 관리 체계와 국가 재산으로서의 문화재 개념은 해방 후에도 상당 부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고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중됨에 따라, 정치 사회적 변동 속에서 국가에 대한 정체성 혼란이 대한민국의 중요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대한민국 건립 후 자신을 ‘한국인’으로 재규정하기도 했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도 하였으며, 이런 정체성 혼돈을 겪는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공동체의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전용우, 2015: 44-45). 이에 초기 이승만 정권(1948-1960)은 일제에 억압받았던 한국의 ‘민족문화’를 부활시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 의례 만들기에 나섰다. 가령 홍익인간의 이념을 강조하면서 단기(檀紀) 연호를 사용하였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공포하는 등 민족의 기원을 기념하는 공공 의례들을 창출하였다(정수진, 2007: 357). 이와 같이 공동체의 뿌리를 찾아 국가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노력은 정부의 국내외 문화재 보호 및 활용에도 나타났다.
한국전쟁(1950-1953)으로 인하여 수많은 문화재가 소멸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정부는 신문과 뉴스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문화재를 지키자는 국민의 도덕적 의무를 각인시키고자 노력하였다(정수진, 2007: 358-359). 이와 같은 문화재 보호활동은 문화재 자체의 물리적 보호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통해 표상된 국가의 정신을 보호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따라서 민족문화의 표상인 문화재를 전쟁의 참화 속에서 지키고 구해내는 것은 곧 민족을 구하는 일로 통했다(정수진, 2007: 359). 그리고 전쟁 중이었던 1952년에 국가는 급히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 임시보존위원회’를 구성하여, 국보 고적의 보존과 원형미를 살릴 수 있는 수리공사 등의 중요 안건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전쟁 속 파괴된 문화재를 보수하기 위해 힘썼다.11) 또한 문화재를 지키고 관리한 개인들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공로를 인정하여 ‘문화재보존 공로자 표창장’을 시상하였다. 전쟁 당시에 강조하였던 민족문화를 지키는 도덕적 의무를 다한 국민으로서 치하하고자 함이었는데, 파손된 문화재를 보수하거나 일제 강점기부터 문화재를 보호한 개인 등이 그 대상이 되었다.12)
이외에도 정부는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서의 인식을 구축하기 위한 문화재 활용 사업도 추진했다. 1952년 문교부에서 문화재의 해외 전시계획을 국회에 상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1956년 국외전시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듬해인 1957년 미국 워싱턴을 시작으로 국보급 문화재의 해외 전시가 이루어졌다(정수진, 2007: 361-365). 이 사업은 한국이 ‘전쟁피해국’이라는 이미지를 쇄신하고, 문화전통의 나라로서 국제적 인식 변화를 꾀하기 위해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조무근, 2007). 하지만 국위선양이라는 미명아래 대대적인 문화재 반출이 정당화되었고, 공예품과 같은 특정 유형 문화재만이 전시에 선정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화재 개념과 보호에 대한 이해가 제한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미 국무성에서 파견된 동양문화 전문가들이 반출 문화재를 선정하는 데 포함되면서 전시대상국(미국)의 시각에서 선정된 문화재가 국가를 대표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한계를 가진다. 당시 정부가 문화재를 민족의 상징물로 상정하여, 국내외적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문화재를 통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국내 극심한 빈곤 문제와 정치적 혼란으로 문화재가 의도된 역할을 하는데 실패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미군정 및 한국전쟁 등의 상황을 거치면서 한국의 문화재는 상당 부분 훼손되고 손실되었으며, 당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공예품과 같은 유형 문화재에 한정되어 있었고, 문화재 보호 제도는 황실 공예품 및 유물 보호와 같은 지엽적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문화재와 그 보호 제도는 1960년 5·16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발전하고 확장되었다.
대한민국의 문화재 정책은 1961년 10월 ‘문화재관리국’이 문교부 외국으로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적인 법적 체계로서의 ‘문화재보호법’은 1962년 1월 10일 법률 제 961호로서 제정되었고, 문화재 보호의 전문적, 학술적 자문기관으로 ‘문화재위원회’가 1962년 3월 27일 처음으로 구성되었다(김창규, 2012: 32). 문화재 보호에 대한 법적, 구조적 시스템이 갖춰진 후, 1964년부터 1968년에는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문화재 정책기반의 조성과 함께 문화재 원형보존사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장지정·한동수, 2013: 225). 그 후 1970년대에는 문화재관리국의 기구가 확대, 개편되면서 예산 규모도 1960년대에 비하여 10배 이상 증가되어 문화재 보호에 대한 양적, 질적 성장이 나타났다(김창규, 2012: 32).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진행된 문화재 개발 5개년 계획을 비롯하여, 1974년부터 시작된 제 1차 문화중흥 5개년 계획 중 63.1%의 예산인 301억 원이 문화재 관련 예산으로 편성되었다(장지정·한동수, 2013: 226). 이후 문화재 보수 3개년 사업(1977-1979)을 통해서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고, 국민정신 함양의 기틀로 삼으려고 하였다(김창규, 2012: 32; 장지정·한동수, 2013: 226).
1970년대 문화재 보호 정책이 가시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역사관이 문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정유진, 2012: 175-213). 196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보여준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1970년대에는 주체적 민족 사관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인다(장지정·한동수, 2013: 225-226; 최광승, 2012: 183-214).13)임학순(2012: 159-182)의 연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박정희 대통령의 주체적 민족 사관은 한국의 정신 및 민족문화를 조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한 기반으로 보는 것으로 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문화의 주체성 확립이 전통으로 확인되며, 전통의 계승 및 발굴이 경제적 근대화에 필요한 국민정신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전통을 물질적으로 표현한 문화재 보호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다. 문화재 보호를 통한 전통문화정책은 박정희 정권의 체제 정당성 획득 및 유지를 뒷받침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상징이 되는 전통을 창출하는데 직접적 역할을 하였다.14)
박정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루어진 문화재 보호 정책 중에서 국가의 전통을 창출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는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겠다. 먼저, 국가 정통성 회복을 위한 세 가지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960년대 후반부터 전국 단위의 문화재 조사 및 발굴활동을 통해서 문화재 보수 및 개발에 대한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장지정·한동수, 2013: 226). 먼저, 한국 전통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경복궁의 광화문이 1969년 복원되었다. 광화문은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건립과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건춘문 북편(현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이건 되어졌고, 한국전쟁 당시 피폭으로 문루가 소실되었으나, 복원되어 본래 위치로 옮겨졌다.15) 알려진 바와 같이 광화문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적었고, 광화문의 복원은 콘크리트로 진행되었는데, 이 역시 나무보다 강하게 지속될 수 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에 의해 진행되어졌다(최광승, 2012: 203-204). 광화문 복원은 한국 전통의 권위 회복을 상징하였으며,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했던 그 어떠한 외세의 침입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는 강화된 정통성과 발전된 근대성을 보여주는데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Lee, 2019: 175-176).
다음으로, 1971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10·26 사건 직전까지 의욕적으로 진행된 경주 고도개발사업이다. 약 125억 원이 투입된 대한민국 문화재 관리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사업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굴조사, 문화재 보수, 정화사업이 종합적으로 추진되었다(최광승, 2012: 184). 1970년대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한 북한정권과의 경쟁체계 속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찬란한 문화와 화랑정신을 강조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경주의 문화재 개발에 힘을 쏟았다. 체계적인 발굴을 통해 경주의 신라 유적지를 복원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민족중흥의 찬란한 역사를 재현하고 당시 체제를 선전하고 견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였으며, 10년간의 개발을 통해 경주를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변모시키고자 하였다(최광승, 2012: 184). 이는 일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진행한 경주 지역 고적조사를 통해서 일본과 한국의 내선일체설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상황을 상기시킨다. 문화재 발굴이 체제의 통치 기반의 내러티브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고, 문화재 활용을 통한 국가에 필요한 역사적 내러티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Pai, 2001: 72-95).
마지막으로 1974년도부터 시작된 한양도성 복원사업이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지만, 일제 강점기 도시화 과정과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훼손 당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양도성의 복원이 바로 한국의 정통성과 국가 권위의 회복으로 주장했고, 1974년부터 한양도성의 복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유승훈, 2004: 65-67). 한양도성 복원은 냉전체제 하 북한과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국가의 허물어진 벽을 재건하여 안보 의식을 강화하고,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굳건히 지킨다는 상징성도 합의했다(유승훈, 2004: 65-67).
이와 같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문화재와 그 보호 정책이 보다 체계적으로 진일보 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강화시키고, 체제를 견고히 하는 경향성이 뚜렷하게 났다. 하지만 문화재 보호 정책과 문화재 개념 이해에 대한 한계점도 존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이 전통문화 계승과 정신문화 영달에 초점을 맞추어진 것은 이를 통해 강화된 국민정신이 국가의 발전에 궁극적인 힘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장지정·한동수, 2013: 225). 즉, 국가의 경제적 성장과 국력의 증진을 위해서 문화재 보호가 존재하였기에 당시 우선순위는 경제발전이었다. 따라서 경제 개발 정책과 문화재 보호 사이 가치 충돌이 일어났을 때에 경제 개발이 우선순위로 이루어졌다. 가령, 1963년 보물 177호로 지정된 사직단 대문은 1962년 도시계획을 하면서 원위치에서 14미터 뒤로 옮겨진다(장경호, 1995). 또한 1963년 사적 제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은 1979년 성산대로 건설을 위해 원래 위치에서 70미터 옮겨지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당시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는 문화재의 가치를 무시한 도시계획에 개탄하는 신문사설을 개재하기도 하였다.16) 당시로서는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전했다고 하지만, 문화재의 의미는 외형적 건물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위치의 장소성도 포함된다. 따라서 당시 문화재는 장소성을 외면한 채, 외형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경제발전을 우위에 둔 문화재 정책 방향성을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동산문화재’ 개념으로 한정 짓고 외형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초점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62년 문화재보호법은 일제 강점기 문화재 보호 정책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국이 식민 통치를 위해 창출한 문화재 보호 정책은 국가 주도적 성격이 더욱 강화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그대로 반영하였기에 국민은 문화재 보호 주체에서 배제된 채, 국가 주도로 문화재 보호 정책이 진행된 한계점을 보여준다(Pai, 2001: 72-95).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한국의 문화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국제 사회에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경향성은 국제적인 메가이벤트(mega event)인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정부는 이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서 국제 사회에 뿌리박힌 한국에 대한 부정적 분단국가 이미지를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 개최지로 바꾸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다. 특히, 한국의 문화재를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전후로 세계에 널리 알릴 ‘대한민국의 얼굴’로 상정하여, 한국의 전통과 화려한 역사를 알리는데 적극 활용하고자 노력했다. 1985년에는 조선왕궁들과 종묘를 국보와 보물로 대거 지정하고 국가 지정 문화재로서 격상하였고,17) 대대적인 문화재 보수 정비 및 주변 조경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18)하여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조선왕궁의 아름다움을 외국 방문객과 세계적 미디어에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문화재청, 2011: 315). 뿐만 아니라, 올림픽과 함께 이루어진 문화예술 축전, 전시 행사 및 개·폐회식 행사를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정찬모, 2001: 132-149). 1988년 9월에는 1972년부터 시작된 유네스코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하여 한국의 문화유산을 국제 흐름에 편입하고자 하는 시도도 함께 이루어졌다(한숙영, 2015: 132-149). 이는 한국의 문화재가 국내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 요소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귀중한 문화 외교의 자산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시작된 세계화 속 한국문화의 정체성 찾기 및 전통 계승 정책은 1990년대 들어 더욱 강화되었다(권혁희, 2015: 154). 서울시는 올림픽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하면서, 증가하는 외국 방문객들과 내국인들에게 서울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기 위하여 1991년 ‘서울 정도 600년 사업’을 기획했다(권혁희, 2015: 157). 이 사업을 통해 역사 재현 행사, ‘서울명소 600곳’ 선정 및 서울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 기획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고,19) 조선왕궁을 중심으로 유적 복원 정비 사업도 함께 이루어졌다(권혁희, 2015: 161-162).20) 문민정부(1993-1997)는 세계인류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동력으로서 문화재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일제 잔재 청산과 전통문화 복원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를 구체화하였다.21) 대표적 사건으로, 1995년 해방 50주년을 기념하여 8월 15일 경복궁 안에 자리 잡았던 일제 통치의 상징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22) 전통의 상징물인 경복궁 복원을 진행한 것을 들 수 있다.23) 그리고 1997년을 ‘문화유산의 해’로 선정하고 ‘문화유산 헌장’을 제정 선포하였는데, 당시 유네스코에서 불국사, 석굴암,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일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문화재를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국민들에게 국가의 자긍심을 더욱 고취시키고,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켜 대한민국을 세계화 속 ‘문화대국’으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24)
한국의 문화재가 국제화 물결에 편승하는 동안, 1995년부터 시행된 지방자치제도를 통해서 지역 특색을 강조하는 다양한 문화재를 활용한 정책이 추진되었다. 당시 지방문화 육성을 위한 문화정책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세계화로 인해 ‘무분별한 외래문화의 수입과 함께 대중매체를 통한 향락주의적 저질문화의 보급’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추진되었다(유진룡, 1991: 28). 지방문화 육성정책의 기본방향인 지방의 자발성을 유도할 수 있도록 같은 해에 ‘문화관광축제’ 제도를 지방자치제도와 함께 도입하였다.25) 이 사업이 추진되면서 서울 소재 문화재에 비해 소외 받았던 지방 소재의 문화재가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구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산물로서 각광받게 되었다. 또한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 상품으로서의 기능이 부각되면서 지방 문화재는 문화 경제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아지게 되었다.
1980년대 및 1990년대에 세계화와 지방자치화의 물결 속에서 문화재는 국제사회에 한국적인 것을 알리는 선전 도구가 되기도 하였고, 지방 경제의 활성화를 불러일으키는 문화 상품으로 점차 변모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이후 2000년대를 기점으로 문화재 개념의 외연이 획기적으로 확장되면서 그 활용이 다양화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나타나게 된다. 이는 관리대상, 관리방식, 관리범위, 관리주체의 4개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첫째, 문화재 관리대상의 확장이다. 이는 2000년 7월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등록문화재 보호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26) 통상 문화재는 그 형성 시기가 100년 이상이 된 건축물 및 유물이 대상이었으나, 이 제도를 시작으로 근현대에 형성된 일제 강점기 유산, 냉전기 전쟁유산, 민주화 운동과 연관된 유산, 고도압축성장기의 산업유산 등도 문화재 범주에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 근현대기에 형성된 문화재의 재질, 양식, 형태, 구조 등이 다양하기에 문화재 관리 영역도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27) 이로 인하여, 앞서 언급한 1990년대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일제 강점기 건축물이 사라져야할 ‘일제의 잔재’로 여겨졌던 것과 달리, 현재에는 역사의 교훈이 담긴 ‘근대 유산’으로서 인식하고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불편문화유산(difficult heritage)’ 즉, 근현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논란이 있는 유산이 등록 문화재로 보호되어야 하는지 제외되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이현경, 2018).
둘째, 문화재 관리방식의 다양화이다. 2000년대를 기점으로 문화재에 대한 접근은 원형보존에 원칙을 두고 전통을 있는 그대로 보호하는 것에서 문화재에 담긴 전통의 가치를 향유하고 현재의 실정에 맞게 활용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기존에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던 보존과 활용을 동시에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는 앞서 언급한 1990년대 지방자치화 시대 지방에서 문화재를 문화 상품으로 활용했던 경향이 발전했다고도 있다. 2002년 문화재청이 발표한 <문화재보존관리 및 활용에 대한 기본계획>은 문화재 관리 방식이 문화재에 대한 보존뿐 아니라, 문화 복지와 산업화(관광)을 함께 이루려는 뚜렷한 경향을 보여준다(문화재청, 2002: 16-132). 또한 최근 발표된 <문화재 보존·관리·활용 기본계획 2017-2021>에서는 문화재를 통한 지역 재생과 국가 브랜드 창출에 대한 사안까지 포함한다(문화재청, 2016: 46). 이는 문화재를 소비 가능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으로서 인식하고(Throsby, 2010: 107), 이와 관련하여 문화재 관리의 방식이 기존의 ‘강성규제’로부터 ‘연성규제’와 ‘진흥정책’에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셋째는, 문화재 관리면적의 확대이다. 이는 문화재 관리에 대한 면적 관리 개념이 획기적으로 확장되는 ‘1999년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28)’과 ‘2007년 고도보존법’ 제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관리 대상 면적의 확장은 문화재 관리가 단일 문화재 보호에 집중되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변의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문화재를 둘러싼 주변 지역의 역사적 풍모와 역사적 경관 보호까지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전제로 한다.29) 특히 2007년 <고도보존법>은 지역에 밀집된 문화재를 개별단위로 관리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옛 정치·사회·문화 중심 도시 전체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이 제도화된 것으로 평할 수 있다.
넷째는, 문화재 관리 주체의 확장이다. 일제 조선총독부에 의한 중앙집권적 문화재 관리 제도가 수립된 이후 해방 후에도 문화재의 관리는 국가가 전담하는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민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문화재 분야에서도 시민의 참여와 공헌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문화재청, 2002: 80). 이러한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 국민신탁’제도가 수립되기에 이른다. 이는 영국 내셔널트러스트의 민간본위 문화재 보존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시민의 문화유산을 시민을 위해 시민의 힘으로 관리한다는 기본정신을 갖고 있다.30) 또한 2005년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운동의 도입과 정착에 의해, 문화재 분야의 자원봉사 역시 획기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명목상의 참여자였던 일반 국민이 문화재 관리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창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최근 지역문화재 활용사업(2008~)31)과 문화재 돌봄사업(2010~)은 문화재 활용과 보존관리 분야에 인적자원을 갖춘 민간 사업자가 참여하는 구조를 수립한, 일종의 ‘민영화 모델’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문화유산의 관리가 국가 중심에서 국민 일반의 참여와 협력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와 같이 2000년대를 기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문화재에 문화재 범주에 대한 인식 및 활용 방식의 확장은 최근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있어 문화재 인식은 가치판단과 접근방식에 있어서 보편화, 다양화, 일반화되는 경향이 포착된다. 일상적이지만 개인에게 소중한 것에 대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민간이 문화재 관리에 직접 참여함이 독려되는 현상은 국가로부터 문화재의 가치가 일방적으로 부여되는 것에서 다양한 사회 주체로부터 ‘문화유산’이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Ⅲ 결론: 한국 문화재 개념 및 발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정리한 바와 같이, 근대 이전 한국의 문화재 개념 및 보호 관리의 형태가 존재하긴 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근대적 의미의 문화재 보호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일제 강점기의 문화재 관리 체계는 식민지 조선에 적용되었기에, 정부가 강력하게 제재하고 주도하는 방식이었다. 해방 후 분단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재는 국가의 정체성 강화 및 국제 사회에 한국의 이미지 전달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 문화재보호법이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문화재 관리 체계의 상당 부분을 차용하였기 때문에 정부 주도의 강력한 문화재 보호 시스템에 기반을 두어 성장했다.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자연유산 협약 및 무형문화유산 협약 등에 가입하면서 글로벌 패러다임에 발맞추기 위한 노력도 늦추지 않았다. 문화재에서 문화유산으로의 용어 확장 및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문화재가 다양하게 활용되고 문화 산업 자원의 핵심으로 발전하는 현 시점에서, 한국 문화재 인식의 발전 과정에서 필요한 네 가지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문화재 인식에 대한 양극단의 태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강력한 국가 주도 체계 하에서 문화재를 보호하다보니, 문화재는 국가의 영원불변의 자산으로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숭고한’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하여 절대적 보호와 보존에 강조를 하였고, 문화재의 활용에 다소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21세기 문화재가 문화 관광 산업의 중심 자원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소비의 대상’으로서 그 인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은 문화재를 보호하면서 그 가치를 ‘향유’하는 방법을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채, 문화재를 ‘소비자’로서 이용하고 문화재 훼손 문제, 무분별한 관람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양극단의 인식 체계가 극복되면서 문화재 보호 및 활용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문화재에 대한 ‘현 세대’의 수동성이 변화되어야 하는 필요가 있다. 문화재는 과거에 형성된 특별한 나라의 보물이고 미래 세대에 반드시 계승되어야 하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비록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가치와 미래 계승의 의무가 부여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 체계 속에서 문화재의 가치는 과거와 미래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따라서 문화재를 보호하고 향유해야 하는 주체인 ‘현재의 세대’가 과거에서 미래로 문화유산을 방관자적 자세로 흘려보내는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현세대가 문화재의 가치 형성, 보호 및 향유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방향성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문화재 보호 및 가치 창출이 국가 주도로 강력히 진행되는 하향식(top-down)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국가 형성 과정에서 하향식 접근이 문화재보호 체계를 정립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문화재 보호 체계 성립 후 다음 단계로의 발전을 꾀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그 가치를 발견하여 사회적 가치로 확장시키는 상향식(bottom-up) 발전 구도도 강화될 때 문화재 가치 발전이 더욱 생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향식 발전 구도 안에서 문화재를 이해하기 위해 그 법과 제도만을 살펴보는 한계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상향식 발전 구도와 결합된다면, 문화재를 둘러싼 이해는 법과 제도를 넘어서서 문화재와 관련된 개인의 기억 형성과 문화재가 지역 공동체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에까지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나타난 민간의 개입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문화재가 국제화 시대에서 정치적, 외교적 도구로의 역할이 확장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문화재는 과거에 형성된 아름답고 찬란한 국가의 상징물로 광범위하게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2015년 한국과 중국에게 강제 징용의 기억이 있는 아픈 역사적 공간인 일본의 하시마 섬이 찬란한 메이지 산업혁명의 중요 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었던 예를 생각하면 문화재가 국가 간 분쟁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이현경, 2018). 문화재는 국가의 특정 이미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시마 섬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국제 사회에 그 장소에 새겨진 메이지 산업혁명의 성취만 강조하게 되고, 그 섬에서 이루어진 한국인과 중국인이 받은 고통과 상처는 국제 사회의 기억 속에서 약화된다. 따라서 문화재는 국가 간 역사 분쟁에서 국제 사회에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외교적,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세계화 속 한국의 전통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확장된 문화재의 역할을 이해하고 국제 사회 안에서의 대한민국 문화재의 가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서론에서부터 언급하였듯, 현재 대한민국은 문화재와 문화유산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용어의 사용이 그 사회의 인식을 대변하기에 문화재와 문화유산 용어의 혼용은 그 개념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인식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사라질 수 있는 과거의 문화적 산물인 문화재는 정적인 개념으로 국가가 주도적으로 보호해야 하였지만, 이제는 현 시대에서 선택된 기억이 사람들과의 합의에 의해서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문화유산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과거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강조했던 문화재는 이제 근현대사를 둘러싼 역사 분쟁에서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상대방 국가와 대결하는 외교적 정치적 도구인 문화유산으로 그 역할이 발전되는 과정에 있다.
문화재에서 문화유산으로 그 역할과 개념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문화유산의 본질과 가치를 함께 확장시키는 과정도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정치적, 미적, 역사적, 사회적, 교육적, 경제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의 복합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는 다면적 특성을 지닌 문화유산이 ‘문화유산학’이라는 독립된 학제로서 발전할 때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과 북미 및 호주 지역에서 융합학문으로서 성장하는 문화유산학(Heritage Studies)을 살펴보면서, 다른 학문과의 연계를 통해서 문화유산의 법, 체계를 정비할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및 개인의 삶 속에서 깊숙이 스며든 문화유산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탐구하고 발전하는 학문적인 기반이 마련된다면 문화유산의 보호 및 활용과 이해가 건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고 전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