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전쟁의 산물인 유엔기념공원(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이 기억유산으로서 지니는 역사적 함의와 가치를 탐구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유산으로 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이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조건부 등재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하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구성 요소 중 국제협력의 핵심 유산인 본 공원이 지역·국내·국제사회에서 의미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필요한 유산 해석의 학술 근거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972년 제17차 유네스코 정기총회에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 이하 세계유산협약)’이 채택된 이후, 세계 각국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이하 OUV)를 지닌 자국의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한숙영, 2015). 그 후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 결과 2020년 3월 현재 세계유산목록에는 1,121건의 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이 중 전쟁유산으로 등재된 대다수는 기준 (vi)1)에 근거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나 내전의 참상을 나타낸다(김기수, 2018). 이에 비해 피란수도 부산유산은 냉전 초기 발발한 한국전쟁 특성상 국제 평화와 인류애를 실천한 공공협력과 22개2) 유엔 참전국 간의 국제협력, 그리고 피란민들이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최근 세계유산 분야의 근현대 전쟁 관련 논의를 살펴보면, 2018년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벨기에와 프랑스가 공동 신청한 잠정유산인 ‘제1차 세계대전의 장례와 추모 유산(Funerary and Memorial Sites of the First World War)’ 등재 논의 중 21개 위원국이 당사국들의 포괄적 반영(comprehensive reflection)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결정을 보류한 바 있다(UNESCO, 2018: 20). 또한 문화유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분쟁으로 인한 기억유산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을 유산 해석 시에 교차 반영하고, 글로벌 관점에서 당사국 간의 대화를 증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었다(Logan, 2019: 65-72).
한편, 유엔기념공원은 2007년 국제 규모의 ‘턴투워드부산(Turn Toward Busan)’ 추모식 제정과 2010년 유엔평화문화특구 지정, 2015년 이후 세계유산 등재 추진 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본 공원을 포함하는 피란수도 부산유산은 광복 70주년과 한국전쟁 65주년을 맞이한 2015년 6월, 피란수도를 상징하는 건축·문화자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필요성과 평화 수호, 인류애의 가치를 국제 사회에 전파하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다(김형균·박상필, 2015). 본 유산은 피란수도 부산이 1,023일간 대한민국의 전시(戰時) 수도로 기능한 사실과 2020년 3월 현재 등재기준 (iii)와 (vi)에 근거하여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조건부 등재되어 있다(이정선, 2020: 307). 그리고 추진 경위는 세계유산 잠정목록 대상유산 공식 선정위원회 개최(2016. 5. 19.) 및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및 보존 관리 조례 제정(2016.11. 2.), 문화재청 현지 조사(2017. 6.15~16.) 등으로 요약된다(하병엄, 2018: 21-22).
이러한 과정에서 현재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8개 구성요소는 ① 임시중앙청, ② 경무대, ③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 ④ 국립중앙관상대, ⑤ 부산항 제1부두, ⑥ 유엔지상군사령부, ⑦ 유엔묘지(유엔기념공원), ⑧ 하야리아기지이나, 2017년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유산 선정 논리 입증과 피란민 구성요소 보완이 지적된 바 있다(이정선, 2020). 이에 따라 부산광역시는 국난을 극복한 피란민 생활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2022년까지 국내 세계유산 우선등재 선정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부산광역시, 2020: 15).
구성요소 중 1959년 체결된 “재한 국제연합기념묘지 및 설치 유지에 관한 국제연합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이하 유엔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에 의거하여 세계 유일의 공식 유엔묘지로 지정된 유엔기념공원은 부산에서 한국전쟁의 의미와 “전쟁 자체의 본연적 성격을 가장 적절하게 구현하는 유산(전진성, 2013: 19)”이다. 한편, 그간 추모 공간과 불가침 지역 특성상 주민들의 삶과 유리되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타자(他者)인 유엔군 묘지를 바라보는 방문객들의 경외심과 유엔평화문화특구의 상품으로 인식하는 상업적 시선, 공원에 대한 인식 미흡에서 오는 대다수 국민의 무관심 간에는 적지 않은 괴리감이 존재한다. 그리고 대내외적으로 2,286구의 유엔군 안장자들에 비해 11구 비전투요원들에 대한 설명은 줄곧 축소되어 왔다(이석조, 2008: 227-228).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 다양한 주체들의 유연한 인식을 가로막아 공원의 가치를 폭넓게 향유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유엔기념공원을 냉전의 산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지역·국제 사회의 역사적 도시 경관으로 재배치시키는 지견과 다각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대표적 선행 연구로는 이석조(2008)와 민주주의사회연구소(2013)의 문헌이 학술적 담론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반면에 초기 유엔묘지 조성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 미비와 유산으로서의 관점 결여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다수의 연구에서는 본 공원을 의미 있는 장소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공감하고 있으나, 최근 세계유산 분야에서 중시되는 유산 해석을 비롯하여 가치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하여 본고는 부족한 학술 논의를 보충하고, 유엔기념공원의 세계유산 등재에 필요한 유산 해석을 마련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참고 사례로 벨기에·프랑스의 ‘제1차 세계대전의 장례와 추모 유산’3)을 조사하고자 연구자는 2019년 4월 139개 구성요소 중 영연방 전쟁묘소위원회(Commonwealth War Graves Commission, 이하 CWGC)의 최대 묘지인 벨기에 타인 코트 전쟁묘지·기념관(Tyne Cot Cemetery and Memorial)를 방문했다. 또한 유엔기념공원에서 11월 11일 개최되는 ‘턴투워드부산’의 비교대상으로, 메닌 기념문(Menin Gate Memorial)의 마지막 포스트(Last Post) 추모식 참여관찰을 시행했다.
세계유산 등재에서 비교연구(comparative analysis)의 당위성은 유네스코가 당사국으로 하여금 등재 신청 시 “세계유산 등재 여부와 관계없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유사한 유산과의 비교연구를 제공”하고, “국가적·국제적 맥락에서 신청유산의 중요성을 설명(UNESCO, 2019: 36)”하도록 의무화한 데 기인한다. 무엇보다 운영지침에서는 “광범위한 국제적 또는 지역적 맥락의 초기 비교연구가 포함(UNESCO, 2019: 34)”되도록 강조하고 있어, 현재 잠정목록 준비 단계에 있는 피란수도 부산유산에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연구자가 선정한 벨기에·프랑스의 ‘제1차 세계대전의 장례와 추모 유산’과의 비교연구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 국제 규모의 전쟁유산이자 기준 (iii), (iv), (vi)에 근거하므로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기준인 (iii)과 (vi)에 유용한 참고가 된다. 특히 (vi)에 입각한 메닌 기념문의 추모식과 해외에서 전사한 군인을 현지에 안장하는 영연방의 전통은 유엔기념공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둘째, 주목할 사항으로 2017년 현장 실사를 담당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 [ICOMOS], 이하 이코모스)가 플랑드르필즈 전쟁박물관(In Flanders Fields Museum)에 균형적인 유산 해석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등재 신청서에는 본 해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한 사실이다(ICOMOS, 2018: 151). 이 같은 평가는 최근 등재 과정에서 유산 해석을 포괄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적군이었던 독일군의 전사자가 안장되어 있는 전쟁묘지에 관한 경합적 해석은 비전투요원이 안장되어 있는 유엔기념공원의 유산 해석에도 참조점이 된다. 셋째, 묘지 설계 배경과 변천 과정을 입증하는 역사적 자료 제시가 미흡하여 OUV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비판 역시 유엔기념공원의 사료(史料) 부족이라는 과제와도 공명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유사 사례에 대한 이코모스의 비평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유엔기념공원의 세계유산 등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지침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당사국들의 논리 수정이 진행 중인 점을 고려하여, 본고에서는 현지조사와 문헌고찰을 통한 유산 현황과 2020년 3월 기준의 이코모스 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려 한다. 특히 벨기에 사례의 시사점을 참고로 유엔기념공원의 숨겨진 역사의 단서를 찾기 위해 연구자는 2019년 7월 미국 유엔아카이브 기록관리부(United Nations Archives and Records Management Section [UN Archives], 이하 유엔아카이브)를 방문하고, 1천여 장의 초기 유엔묘지 사료와 사진을 발굴하였다. 그간 1974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이하 언커크) 해체 후 초기 자료가 유엔으로 이관된 탓에 1950~60년대 사료 부족이 연구의 최대 난점으로 작용해 왔다(이석조, 2008: 226-227; 김선미, 2013: 90). 따라서 연구자의 유엔아카이브 자료 발굴은 역사 문헌을 축적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과제 해결에 기여한다고 생각된다.
종합하여 본 연구는 (1) 문헌고찰, (2) 벨기에 잠정유산 현장답사, (3) 현지 전문가 의견 청취, (4) 추모의례 참여관찰, (5) 유엔아카이브 온라인·현장 조사, (6) 사료 분석과 비교를 망라한 다각적 방법을 통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유엔기념공원의 유산 해석 전략을 도출하였다. 그리하여 공원이 전 인류가 향유하는 세계유산이자 포괄적인 기억유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유효한 제언을 시행하겠다.
Ⅱ. 이론적 논의와 문제 제기
아스만(Assmann)은 장소가 “과거와 현재의 중개자”이자 기억의 매체들로서 보이지 않는 과거를 제시하고, 그 과거와의 접촉을 유지하게 한다고 보았다(변학수·채연수 역, 2011: 458). 그러한 의미에서 전쟁묘지, 추모 시설 등의 기념물은 전쟁에 대한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이자 실천이다(정호기, 2008: 185). 서구 학자들도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기념물과 추모 의례가 각각 중요한 기억의 저장소이자 기억의 행위로 작용(Miles, 2017: 441-442)하며, 특히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에 산재한 전쟁묘지는 죽음의 보고(寶庫)로써 전쟁의 사회적 기억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간주했다(Laqueur, 1994). 이처럼 유럽에서는 전쟁과 관련한 장소와 추모 의례가 ‘기억 만들기(memory making)’의 역동적인 기제로 논의되어 왔다(Miles, 2017).
이 같은 사회적 기억과 장소를 연구를 집대성한 노라(Nora)는 ‘기억의 장소(Les lieux de mémoire)’가 전사자 숭배 영역, 문화재, 현재 속 과거의 존재를 제시하는 모든 것의 3가지 범주로 나뉜다고 피력했다(김인중·유희수·양희영 역, 2010: 59). 기억의 장소는 인간의 의지 또는 시간의 작용에 의해 공동체의 기념 유산을 상징하는 요소를 일컬으며, 그 대상은 박물관, 공동묘지와 같은 유형물과 기념일 등의 무형물도 망라한다(김인중·유희수·양희영 역, 2010: 42). 이러한 논지는 유엔기념공원을 한국전쟁 및 현대사에서 기억의 장소이자 이어서 살펴볼 세계유산 맥락에서의 기억유산으로 파악하는 데 유용한 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노라(Nora)의 개념을 적용시키면 본 공원은 전사자 숭배(유엔군 참전용사 추모), 문화재(제359호 등록문화재), 오늘날 과거(한국전쟁)의 제시를 모두 충족시킨다.
한편, 노라(Nora)는 논의 대상을 단일 국가 차원에 한정한 측면이 있어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이데올로기 충돌이 전 지구적 범위로 확산된 한국전쟁에서 사망하여 공원에 안장된 유엔군들을 단순히 다카하시(高橋)가 언급한 “조국을 위한 죽음(pro patria mori)(이목 역, 2008:12)”의 논리나 자국의 내셔널리즘에 의해 호명된 자들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원 안장자들을 한국전쟁의 체험을 공유하는 ‘유엔군 참전 공동체’로 확대하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기억의 장소 개념이 세계유산 분야에서 어떻게 응용되고 있으며, 또한 기억이 문화유산과 전시에 활용되고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2008년 이코모스는 “문화유산의 해석·해설을 위한 이코모스 헌장(이하 에나메 헌장)”을 수립하여 문화유산 해석 지침을 제시했다. 본 헌장에서는 해석(interpretation)을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적 이해도와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전방위적 활동들(ICOMOS, 2008: 4)’4)로 정의했는데, 이는 인쇄물, 공개 강의, 유산 연관 시설물, 교육 프로그램, 지역사회 활동, 연구, 해석과정 자체에 대한 평가를 망라한다. 문화유산 해석·해설의 7가지 핵심 원칙은 (1) 접근성과 이해, (2) 정보 출처, (3) 맥락과 환경, (4) 진정성, (5) 지속가능성, (6) 포괄성, (7) 연구·트레이닝·평가로 집약된다(ICOMOS, 2008). 이러한 유산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유산의 가치 설명이 장소와 사람들 간의 연결과 지역사회 조성에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 후 2018년 유네스코는 노라(Nora)의 기억의 장소 개념을 차용한 “기억유산 해석(Interpretation of Sites of Memory)”을 실시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유산의 연계 가치를 포괄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도록 권고해 왔다(International Coalition of Sites Conscience [ICSC], 2018: 8-9). 본 해석은 장소에 중점을 두어 세계유산의 맥락에서 접근한 시도이며, 기억유산 범주에는 국제사회에서 해석상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전쟁묘지도 포함된다(이정선, 2020: 308). 기억유산의 적절한 해석을 마련해야 하는 당위성은 불편한 문제(difficult issues)로 인해 특정 장소의 중요성이나 역사에 대한 견해가 상충될 때, 포괄적인 해석을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지역사회를 상이한 관점으로부터 함께 이끌어낸다는 데 있다(ICSC, 2018: 16). 이러한 맥락에서 묘지 등 전쟁유산을 포함하는 기억유산은 종종 세계유산 등재 시 당사국 간의 갈등을 초래해 왔기에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폭넓은 유산 해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박물관이 다양한 주체들 간의 논쟁을 일으키는(divisive) 기억을 통합하는 장소로 기능할 수 있다는 모색과도 연관이 있다(Uzzell, 1998). 우젤(Uzzell, 1998)은 유산 해석이 본질적으로 분열을 초래함을 전제하고, 나아가 해석이 이해관계자 간 공감의 원동력이 되어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주적인(anti-democratic) 사고를 근절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담론은 2010년대 유럽에서 2차례의 세계대전을 재조명하는 박물관 및 기념관의 전시 연구에도 계승되었는데, 그 중 문화적 기억과 유산의 경합주의(agonism)를 분석한 논문에서 다룬 적대적(antagonistic),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경합적 기억이라는 3가지 기억 담론이 괄목할 만하다(Bull, Hansen, Kansteiner & Parish, 2016). 먼저 적대적 기억은 선악의 이분법에 따른 피아(彼我)를 특정 주체에 적용하는 반면, 코스모폴리탄적 서술은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같은 피해자들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갈등을 탈정치화한다. 또한 경합적 기억은 분쟁을 인정하여 다층적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자들이 상호 충돌하는 복잡한 관계로 재인식한다(Hillier, 2003; Bull, Hansen, Kansteiner, & Parish, 2016: 613-614). 따라서 경합적 견해는 피해자-가해자 간의 이항 구도와 현재-과거의 관계를 재배치하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아스만(Assmann)의 논의에 따르면 전쟁기념관과 같은 시설은 정치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구축한 ‘문화적 기억’의 매체이다(김형곤, 2007: 197). 이에 비해 유엔기념공원 기념관은 전쟁 자체에 대한 기념보다는 전사자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강하나, 1968년 유엔이 설립하여 유엔군의 활약상이 담긴 사진과 참전국의 기념품5)이 전시의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유엔군 중심의 문화적 기억이 응축된 매체이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한국전쟁과 묘지 조성 과정에서 배제된 타자들의 기억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시’가 단순히 자료들을 나열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전략적 장치’(최석영, 2004)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를 통해 역사라는 큰 흐름 속의 현재-과거-미래의 관계를 다시금 포착하는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론적 논의를 토대로 다음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보편적 관점에서 세계유산 등재에 유용한 유엔기념공원의 포괄적 해석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균형적 유산 해석에 지역사회와 다양한 주체들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층적 기억유산인 유엔기념공원의 가치 연구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를 위해 벨기에 사례를 분석한 후,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Ⅲ. 분석·평가 및 고찰
모스(Mosse)는 제1차 세계대전이 대량의 희생자를 보살필 무덤의 분수령이 되어 근대 이후 전쟁묘지를 국가적 숭배 장소로 신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경의 주요 무대인 타인 코트 전쟁묘지와 메닌 기념문은 대규모 전투에서 병사의 죽음과 그들의 개별 무덤이 재매장되는 역사를 나타낸다. 베이커(Baker)와 트루러브(Truelove)가 설계(CWGC, 2013)한 타인 코트 묘지의 안장자들은 1917년 8월 이후 예페르(Ypres)의 격전지 파셴달(Passchendaele) 전투의 사망자들이 주를 이룬다(Winter, 2015: 20). 특히 <표 1>이 제시하듯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연방 외에도 적군이었던 독일군의 묘(4기)를 포함하는 사실이 주목된다.
국가 | 신원 확인 안장자 | 미확인 안장자 | 합계 | 안장율 (%) |
---|---|---|---|---|
영국 | 2,336 | 6,630 | 8,966 | 75.0 |
호주 | 578 | 791 | 1,369 | 11.4 |
캐나다 | 451 | 560 | 1,011 | 8.5 |
뉴질랜드 | 198 | 322 | 520 | 4.3 |
남아프리카 공화국 | 24 | 66 | 90 | 0.8 |
독일 | 1 | 3 | 4 | - |
합계 | 3,588 | 8,372 | 11,960 | 100.0 |
자료 : Winter, C.(2015), Ritual, remembrance and war: Social memory at Tyne Cot, Annals of Tourism Research, 54, p.20.
[그림 1]과 같이 CWGC가 조경 작업에 공을 들여 건립한 묘지는 “단순한 정원 조성 차원이 아닌 대영제국의 지리적 상상과 존재감을 명확히 표상”하는 것이었다(Morris, 1997: 424). 괄목할 사항으로는 타인 코트 기념관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안장자 호명(roll-call)이 녹음된 음성 파일이 반복 재생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방문자들에게 전사자의 존재를 청각적으로 재확인시킨다는 측면에서 에나메 헌장의 접근성과 이해 원칙에 유용한 사례라 하겠다. 이를 참고하여 유엔기념공원에서 2016년 실시된 2,300여 명의 전사자 호명식6)의 영상 자료를 공원 내 기념관에서 상시 재생한다면 한국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매체로 기능하여 방문자들의 유산 해석에 관한 이해 증진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타인 코트 기념관에서는 전사자들의 유족의 기억을 망라한 제1차 세계대전 관련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그림 2]의 중앙 “왕과 조국을 위하여 (For King and to the Country)”라는 문구는 조국을 위한 죽음의 사상을 드러낸다. 반면 한국전쟁의 경우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으나, 유엔헌장 제7장의 군사적 강제조치를 국제사회에서 최초로 실현(노동영, 2017)하여 국제평화를 실천했다는 차이점을 세계유산 등재 시 비교 논리로 활용할 수 있다. 즉, 전사자 호명의 시사점을 참고하되 전쟁 배경의 차이를 유엔헌장 및 유엔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에 근거하여 제시하면 유산 해석에 주효할 것이다.
이어서 살펴볼 메닌 기념문의 마지막 포스트는 등재기준 (vi)에 준거하는 추모 의례이다. 본 기념문은 제1차 대전 중 예페르 살리엔트 전투(Ypres Salient Battle)에서 실종된 영연방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블롬필드(Blomfield)가 설계한 추모의 벽(Hall of Memory)에는 약 56,000명의 실종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Stephens, 2009: 7). 매일 밤 8시에 거행되는 추모식의 기원은 건립 이듬해 예페르 시민들이 벨기에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전사한 이들을 기념할 방법을 모색한 데에서 유래한다.
1928년 7월 1일 최초 추모식 개최 후 의례는 나팔수들의 차렷 행렬 → 마지막 포스트 나팔 연주 → 1분간의 묵념 → 레베빌 나팔 연주 → 마무리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며, 정전협정일인 11월 11일에는 특별 기념식이 거행된다.7) [그림 3]과 [그림 4]는 기념문 전경과 마지막 포스트 참여관찰 중 촬영한 현장으로, 연구자는 [그림 4]처럼 나팔수들이 실종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벽을 배경으로 기념문을 통과하는 장면을 관찰했다. 그 가운데 아치형 통로 내에서 공명되는 청각적 음률이 참여자들의 추도 의식을 강화하면서 전이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포스트는 유형유산인 기념문과 무형의 추모 의례가 결합된 신성한 감각(sense of sacred)을 일으켜 메닌 기념문에 중요성을 부여한다(Bell, 2009; Stephens, 2009). 특히 전사자가 본국에 송환되지 않고 사망한 땅에 안장되는 영연방 전통상 영연방국과 전 세계 방문객들이 마지막 포스트에 참여하는 현상은 실종자들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먼 여정의 ‘순례(pilgrimage)’행위로 해석된다(Stephens, 2009: 25). 이처럼 기억의 문에서 백 년 가까이 시행되어 온 마지막 포스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재회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며 세계유산 기준 (vi)의 근거로 재조명되고 있다.
본 메닌 기념문 추모식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연방국이 해외 전사자들을 현지에 안장하는 CWGC의 역사(Imperial War Graves Commission, 1918; Congram, 2017)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유엔기념공원의 ‘턴투워드부산’ 추모 의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8)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확립된 본 전통은 한국전쟁에도 명맥이 계승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 공원에 안장된 전체 11개국 2,310명의 안장자 중 약 70%에 가까운 1,590명이 5개국의 영연방 출신이라는 사실에서도 그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9) 그리고 영연방이 메닌 기념문 추모의 벽에 실종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전쟁 영연방 실종자의 이름을 새긴 위령탑을 1965년 유엔기념묘지(당시 명칭)에 건립한 사실은 비교연구의 중요한 접점으로 작용한다.10)
이러한 논리에서 마지막 포스트는 유엔기념공원의 ‘턴투워드부산’과 상통한다. 2007년 영연방인 캐나다 참전용사 커트니(Courtney)씨가 제안한 이래 11월 11일에 영연방을 포함한 참전국이 참여하는 ‘턴투워드부산’은 그들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타국에 안장된 유엔군들을 추모하고 참전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턴투워드부산’에 공원을 찾는 영연방을 포함한 참전국 유족들의 방문 역시 실종자들의 존재를 문화적 기억인 위령탑을 통해 확인하는 순례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유엔기념공원과 기준 (vi)을 공유하는 메닌 기념문의 영연방 전통을 세계유산 등재 및 유산 해석으로 제시한다면 국제적 관점에서 비교 논리를 중시하는 유네스코의 원칙에 부합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의 기억을 유기적으로 연계한 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코모스가 플랑드르필즈 전쟁 박물관의 전쟁유산 해석에 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본 박물관이 3가지 기억 담론 중 경합적 기억을 재현하는 점은 전쟁 관련 기억유산 해석에 참고가 된다.11)
일례로 1915년 성탄절 임시 휴전 상황에서 [그림 5]와 [그림 6]처럼 연합군과 독일군을 포함한 여러 주체들이 교대로 등장하여 각자의 심정을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는 디지털 영상전시가 괄목할 만하다. 비록 가상이기는 하나, 어느 특정 편이 아닌 쌍방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나타내는 본 전시는 전쟁에 대한 현대인들의 시선의 격자를 촘촘히 한다. 특히 “대화의 병렬구조(dialogic juxtaposition)(Bull, Hansen, Kansteiner & Parish, 2016: 614)”와도 상통하는 경합적 기억의 전시는 참전군인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젊은이들이었으며, 현 세대가 그들의 목소리를 균형 있게 조명해야 함을 일깨운다. 이러한 해석은 피아를 뛰어넘는 모든 희생자들의 서사를 동등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백영제(2013) 및 로건(2019)의 논지와도 부합하는 전시 방식이다.
이처럼 경합적 기억의 전시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3가지 기억 담론은 상이한 유산 해석을 낳는다. 이는 기존 전시 및 해석이 이항 구도를 띠는 유엔기념공원 기념관과 유엔평화기념관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향후 유산 해석의 초국적 연구를 통해 타자의 시선으로 유엔기념공원을 다시금 고찰하는 일, 즉 “배제되었던 ‘적들’을 재현 혹은 상기하여 재배치해보는 작업(하세봉, 2013: 219)”이 요청될 것이다.12)
지금까지 살펴본 잠정유산에 대해 이코모스는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유산의 의미와는 별개로 등재를 통해 궁극적으로 기념하려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ICOMOS, 2018: 144). 즉 139개의 구성요소는 방대한 반면에, 전쟁과 죽음으로 축소된 해석이 유산의 OUV와 다양한 문화적 중요성의 함의를 반영하지 못해 등재의 의의를 반감시킨다는 것이다(ICOMOS, 2018: 151-152). 이코모스는 우선 완전성(integrity) 면에서 당사국들이 제시한 5가지 측면, 즉 (1) 개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국가 간 의지, (2) 지리학적 범위, (3) 비전투요원의 문화적 배경, (4) 묘지·기념물 유형의 다양성, (5) 다양한 건축 시기와 상징적 의미가 OUV를 어떻게 입증하는지 불분명하다고 언급했다(ICOMOS, 2018: 153). 무엇보다 진정성(authenticity) 면에서 묘지가 어떻게 설계되고 배치되었는지 입증하는 역사 자료가 활용되지 않은 점을 반복하여 지적(ICOMOS, 2018)하고 있다. 이러한 비평은 유엔기념공원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표 2> 중 기준 (vi)에서 타 전쟁 추모 의례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사례별로 철저한 분석해야 한다는 평가 역시 ‘턴투워드부산’의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
자료 : ICOMOS(2018:144-152)a)의 재구성.
a) ICOMOS(2018), Evaluations of Nominations of Cultural and Mixed Properties, ICOMOS Report for the World Heritage Committee.
한편, 이코모스는 구체적인 개인·지역·정부·국가별 역할과 일별(daily) 묘지 관리 및 유지 내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개별 전사자의 안장과 기념에 국한된 설명을 뛰어넘는 해석이 부족하기에, 플랑드르필즈 박물관의 새로운 해석을 등재 신청서에 반영하도록 강조한 대목은 유산 해석의 중요성을 재확인시킨다(ICOMOS, 2018: 153). 이상의 잠정유산 사례와 이코모스 평가를 참고로 시사점을 도출하여 유엔기념공원의 세계유산 해석을 위한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코모스 평가에서 보듯이 묘지 조성 배경과 변천 과정을 나타내는 사료 보완은 세계유산의 OUV 입증에 필수 과제인 동시에 에나메 헌장의 7가지 유산 해석 원칙이다. 이처럼 역사적 증거물 제시는 유엔기념공원의 최대 난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연구자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아카이브 온라인 자료를 조사한 결과, 1만 5천 여 장의 문서가 수록된 유엔묘지 등록 파일(United Nations Korea Cemetery register files)을 발견하였다. 그 중 적군 묘역 배치도를 [그림 7] 및 [그림 8]로 제시한다. 이는 8,539구에 달하는 포로 묘지가 현재 문화회관 자리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석조, 2008: 225-226)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코모스가 <표 2>에서 지적한 지형학적 변화를 가늠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나아가 2019년 7월 유엔아카이브를 방문하여 1960년 3월 31일 거행된 언커크의 유엔묘지 인수식 자료를 발굴했다. 아카이브 현장 연구 결과, 1950년대 전사자 안장 보 고서 및 1959년의 유엔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 이후 유엔 관리 시기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13) 또한 사료 고찰을 통해 묘지 설립 후 1953년까지 제28 수습·처분부대(28th Recovery and Disposition Company)가 포로 묘역을 조성했으며, 1954년 제114 묘지등록부대(114th Graves Registration Company, GRC)가 묘지 인근의 “글로리 마을(Glory Village)”에서 유엔군과 적군 양쪽의 유해 관련 업무에 착수한 사실도 발견했다.14) [그림 9]와 [그림 10]은 아카이브 현장에서 확보하여 최초로 공개하는 사료로, 묘지가 정식으로 유엔 산하기관이 되었음을 보도한 1960년 4월 미군 신문 자료와 1963년 4월 유엔기념묘지의 조경 설계도이다.
이처럼 온라인·현장에서 발굴한 미공개 문서는 유엔묘지의 변천 과정과 역사적 경위, 1950년대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OUV인 국제협력을 증명한다. 나아가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구체적 물증(physical evidence) 요건과 유산 해석의 필수 요건인 숨겨진 역사 복원 사항을 충족시킨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 시 1950년대 초 포로 명단과 관리일지를 망라하는 유엔아카이브 문서를 역사적 근거로 활용하여 신청서에 반영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에나메 헌장의 문화유산 해석 원칙인 접근성과 이해, 정보 출처, 맥락과 환경, 지속가능성, 연구·트레이닝·평가 측면에서 [그림 7~10] 등 1950~60년대 기록을 전시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홈페이지, 공원 전시관 및 유엔평화기념관과 연계하여 가상현실(VR) 등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유엔묘지에서 유엔기념공원으로의 변천 과정을 구현할 수 있다. 동시에 역사를 보완하는 설명을 교육 프로그램에 반영하고, 그 과정도 평가해야 한다.
또한 플랑드르필즈 전쟁박물관에서는 다양한 주체들의 기억을 균형 있게 다루는 경합적 전시가 이코모스의 높은 평가를 받은 데 비해, 기존 공원 기념관과 유엔평화기념관은 유엔군의 희생에 대한 추모 성격의 코스모폴리탄 전시에 가깝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를 참고하여 유엔군과 북한군의 이야기, 1950년대 초 묘지 부근에 매장되어 있던 포로의 사연을 스토리텔링으로 나란히 제시한다면 장소가 간직한 다양한 역사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해석이 될 것이다. 일례로 스코틀랜드 전투 유적지 컬로든(Culloden)에서 최첨단 기술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측의 입장을 모두 제시한 점이 영국의 좋은 해석사례로 손꼽힌 바 있으므로, 모범 예시를 참고하여 공원 실정에 맞는 유산 해석을 강화해야 한다(Logan, 2019: 69).
그리하여 유엔군뿐만 아니라 포로의 유해도 매장했다는 공원의 역사적 시공간 층위를 다음 세대에 기록으로 전승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이는 커민스(Cummins)가 강조한 “숨겨진 역사를 복원하고 소외된 기억을 주류화”하는 것과 직결된다(2019: 41).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공원이 대한민국 정부와 유엔군 간의 국제 공공협력을 나타냄과 더불어 포로 교환 “Operation Glory”가 추진된 현대사의 주요 무대이자 전사자 유해를 매개로 한 다양한 주체들의 기억의 장소였음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유산 해석은 유엔기념공원을 국제 사회의 포괄적인 기억유산으로 전환시키는 해석에 일조할 것으로 판단한다.
일례로 거제 포로수용소의 ‘한국전쟁기 자원송환원칙’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위해 관할 지자체가 유엔아카이브와 국립문서기록관리청, 관련국들과 협력한 사례를 들 수 있다(경상남도, 2018). 이를 참고로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 유엔아카이브 및 CWGC와 연계하여 데이터베이스(DB) 구축과 문헌 확보 등 연구 기반을 강화해 나간다면 한국전쟁과 현대사의 잊힌 기록·기억을 복원하는 귀중한 마중물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국제적 차원의 유산 해석 전략의 일환으로 2022년 세종시에 설립될 예정인 ‘세계유산 해석 국제 센터(The International Centre for the Interpretation and Presentation of the World Heritage Sites, 이하 (가칭)해석센터)’와 협업 체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2019년 11월 개최된 제40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유네스코 협력기관인 해석센터 설립이 승인된 바 있다(문화재청, 2019). 본 해석센터는 세계유산의 해석 기준과 원칙 연구, 세계유산 해석과 해설 분야의 역량 강화, 해석 DB 구축 업무 등을 수행할 예정이므로, 향후 피란수도 부산유산을 포함한 국내 잠정유산 연구 체제에 상생 효과를 거두리라 기대한다.
나아가 장기적인 유산 해석 인재 육성을 위해 유네스코 유니트윈(UNITWIN) 프로그램을 문화유산 관련 전공이 개설된 국내 대학에 설치하는 방안도 제언한다. 유니트윈(UNITWIN: University Twinning and Networking Programme)은 116개국 700여 학술기관에서 운영 중인 교육 협력 프로그램으로, 문화유산 국제회의를 통해 관련 연구도 활발히 실시하고 있다.15) 따라서 국내 대학이 본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해외 유산 동향을 수집하고, 협력 기반을 넓혀 나가는 전략은 장기적 관점에서 유산 해석과 인재 육성의 선순환을 극대화하리라고 전망한다.
이코모스 문화유산 해석·해설 국제위원회의 하지스(Hodges)는 세계유산 해석을 위한 국제회의에서 뒤펠(Deufel) 부위원장의 주장을 인용하여 “과거에 대한 모든 측면의 이야기들을 균형 있게 재현함으로써 대중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고 강조했다(2016: 51). 그 후 커민스(Cummins)가 유산 해석의 동향 변화로 거론한 8가지 핵심요소 중 (1) 독백에서 대화적 해석·행동주의적 접근으로 이동, (2) 수동적 존재에서 적극적 참여로 이동, (3) 권위 중심 담화에서 참여 중심 대화-공동 큐레이팅 과정으로 이동, (4) 사물 중심에서 사람 중심 접근으로 이동, (5) 다분야 및 다학제간 프로세스 활용 등을 참고할 만하다.16)
이를 토대로 다성성(multi-vocality)과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역동적 유산 해석을 제언한다. 대화적 해석 및 사람 중심 접근 면에서 영국 참전용사 그룬디(Grundy)씨의 정기 강연은 지역사회와의 연계 가치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유산 해석 활동이다. 전쟁 체험자와의 대화는 현대인들과의 가교를 만들어 주는 진정성 높은 소통이므로 공원의 의의 확산에 기여한다. 일례로 전쟁터에서 적의 주검을 정중하게 수습하는 지휘관은 휴머니티를 상징한다는 이재승(2009: 259)의 논지에 착안하여 시신수습을 전담한 그룬디(Grundy)씨의 강의에 휴머니즘 전승이라는 해석으로 OUV에 반영할 수 있다.
또한 행동적 접근으로 한국전쟁·공원과 관련된 폭넓은 주체들의 구술 자료를 수집하고 e-book이나 출판물로 발간하여 유산 해석에 활용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그 외에도 적극적 참여 면에서 지역사회와 밀착된 시민 활동으로 부경대 유엔서포터즈 등 봉사활동 기록을 체계적으로 집적해야 한다. 공원 차원에서도 한국전쟁 참전국·비참전국을 망라한 국가들과 유엔기념공원과의 접점을 찾아 지역·국내·국제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아웃리치(outreach) 프로그램을 다각화해야 할 것이다.17)
마지막으로 유엔기념공원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유산 해석 방안으로 학제간 비교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공원의 ‘턴투워드부산’ 추모식은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기준 (vi)의 준거인 핵심적인 의식이기에, 메닌 기념문의 마지막 포스트 등 유사 사례와의 테마·시대·지역·특성별 비교 분석이 요구된다. 이에 따라 벨기에 잠정유산에 대한 <표 2>의 이코모스 평가에서 추모식의 철저한 사례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턴투워드부산’ 의례의 선제적 대응 전략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학, 민족학 등 다학제간 연구 프로세스를 마련하여 타 의례와 차별화되는 ‘턴투워드부산’의 OUV를 정립해야 한다. 일례로 본 추모식은 캐나다 참전용사가 제안하여 정부, 지자체, 시민들이 함께 확산시켜 온 초국적 공동 큐레이팅이라는 서술을 고려할 수 있다. 더불어 10년 남짓한 짧은 역사이지만 전 세계인들이 매체와 시공간적 경계를 초월하여 11월 11일 11시에 부산을 향해 평화를 염원하는 현상은 유엔군 참전 공동체를 넘어 전 세계인들을 하나로 연결한다는 해석을 가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종합하여 유엔기념공원이 1959년 체결된 유엔과 대한민국 간의 협정에 의거하는 세계 유일의 공식 유엔묘지라는 특수성과 11개국의 안장국으로 구성된 관리처가 협력하여 관리하는 ‘다국적 기억유산’이라는 차별화되는 가치를 유산 해석에 반영할 수 있다.
Ⅳ. 맺으며
본 논문에서는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구성요소 중 유엔기념공원의 의미를 탐색하고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유산 해석 전략을 제언했다. 그리고 근현대 국제 전쟁의 기억유산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의 장례와 추모 유산’ 검토 후 이코모스의 평가에서 시사점을 도출하여 공원의 유산 해석 방향을 제시해 보았다. 특히 현장답사와 참여관찰, 현지 전문가 의견 청취를 망라하여 분석한 본 잠정유산은 세계유산 등재의 비교연구에 유용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그 결과 벨기에의 장례와 추모 유산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사자들의 죽음의 함의와 양상을 주로 건축사 및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강조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의 산물인 유엔기념공원은 유엔헌장을 기반으로 유엔 사상 최초로 파병된 유엔군들이 안장된 장소로, 1959년 협정에 근거한 국제적 공공협력이 60년 이상 실행되고 있는 세계 유일의 공식 유엔묘지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분단 현실 가운데 유엔기념공원에서 참전용사의 안장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본 장소는 현대사의 살아있는 기억유산이라는 특수성을 지닌다.
이러한 차이를 전제로 본고는 벨기에 사례를 참고하여 공원의 대응 방안을 시론적으로 고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타 전쟁유산, 전시수도, 묘지 등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구성요소별 비교연구와 학술 논의는 향후 과제로 삼아 보완해 나가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두 전쟁의 상이한 배경이 각 유산에 반영된 방식을 규명하여 유엔기념공원의 차별적 가치와 해석을 보다 명확히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한편, 본고는 선행 사례가 유럽의 주요 기억유산 및 전쟁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과 적군이었던 독일군의 유해 안장 사실을 명시한 플랑드르필즈 전쟁 박물관의 경합적 전시, 안장자 호명 음성 재생을 통한 유산 해석의 접근성과 이해 원칙 증진, 영연방 메닌 기념문의 추모의례, 해외 전사자의 현지 안장 전통 등이 공원과의 비교연구에 중요한 접점을 이룬다는 점을 제시했다. 벨기에 잠정유산이 가치 도출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운영체제와 해석에 대한 이코모스의 평가를 참고한다면 유엔기념공원의 유산 해석과 세계유산 등재 정책 수립에 기여하는 바가 있으리라 판단된다.
그리고 본 연구의 괄목할만한 성과는 벨기에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하여 그동안 접근하지 못했던 유엔아카이브 문헌을 직접 발굴함으로써 유엔기념공원의 숨겨진 역사를 규명하는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온라인 및 현장의 1950~60년대 사료는 묘지 조성의 역사적 경위를 밝히는 귀중한 사료로서 그간의 최대 과제를 해소하고, 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여는 데 기여한다. 나아가 선행 사례에 대한 이코모스의 지적을 거울삼아 에나메 헌장의 유산 해석 원칙에 입각한 1950~60년대 유엔묘지 기록 공개와 유엔아카이브·CWGC와의 연구 협력, 유엔평화기념관에서의 숨겨진 역사 복원 및 경합적 기억의 전시, 세계유산해석 국제 센터 및 유니트윈과의 연계를 통한 유산 해석의 선순환 극대화, 지역사회의 상향식 유산 해석, 다학제간 비교연구 등을 제안했다.
중요한 것은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OUV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에나메 헌장의 해석 원칙에 유념하여 공원의 실정에 맞는 유산 해석 계획을 수립하고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다면적 특성을 지닌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문화유산학(Heritage Studies)’이 독립된 융합 학문(이현경·손오달·이나연, 2019: 23)으로 대한민국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학제간 유연한 연계와 지역 사회 맥락과의 접점 찾기, 다각도의 해석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해외 유산의 선제적 분석과 해석 방법론 제언은 최근 세계유산 등재와 유산 해석에서 요구되는 학술 근거의 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 정책 이론과 실용 면에도 일조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의 기억이 풍화하는 가운데 참전국과 우리들이 반복하는 변증법적인 기억-정체성의 상호작용(강인철, 2019: 59)을 촉발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아스만(Assmann)이 제시한 ‘기억의 매체로서 군인들의 육신(변학수·채연숙 역, 2011: 56)’이다. 유엔기념공원은 그러한 매체인 다국적 군인들의 육신의 전유를 통해 숨겨진 역사를 복원하는 다층적 기억유산이다. 그리하여 본 공원은 한국전쟁에 동원된 그 때 거기의 그들을 지금 여기의 우리들과 긴밀히 이어주는 강력한 자장(磁場)으로 기능한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한 2020년, 현대사 연구와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유엔기념공원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대해 부단히 성찰해야 한다. 고로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계기로 보편적 관점에서 공원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유엔군 참전 공동체와 더불어 타자들을 균형 있게 인식하고, 지역·국내·국제사회의 화합을 모색하는 출발점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는 우리의 존립 근거와 정체성, 방향성을 재확립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엔기념공원에 대한 역동적 유산 해석으로 피아의 이항 구도와 망각의 강(lethe)을 건너 가치를 부여할 때, 본 공원은 더 이상 일상과 유리된 묘지가 아닌 다층적 기억의 ‘진리(aletheia)의 장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